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미란다 줄라이 지음, 이주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절판


핍과 나는 자갈길을 걸어 조그만 갈색 집으로 향했다. 맛없는 음식 냄새가 집 밖까지 진동했다. 잠시 후 한 여자가 포치로 나왔다. 그녀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쪽에서는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우리 나이에는 늙은이들의 몸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는 대략 내 큰 이모뻘쯤 될 것 같았다. 린 이모처럼 리앤도 감청색 쫄바지에 아플리케 같은 걸로 장식된 풍덩한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풍선처럼 부풀었다. 나는 핍을 흘깃 바라보고는 아주 짧은 순간 생각했다. 인생이라는 큰 그림에서 보면 얘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야. 물속에 가라앉기 위해 제 다리에 나를 묶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그런 계집애인지도 모르지. 눈을 한번 깜빡이자 나는 다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112쪽

리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도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라고 할 만큼 가까워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이윽고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다. 이제 우리의 거리는 포옹해도 될 만큼 가까웠지만 그러지는 않는다. -112쪽

안으로 들어와요, 좀 어두워요, 애들은 없고, 그녀가 말한다. 물론 애들이 있을 리 없다. 핍이 재빨리 돈부터 달라고 말한다. 우리끼리 미리 정해놓은 것이다. 뭔가를 요구해야 한다는 건 언제나 끔찍한 일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것, 예를 들어 페인트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페인트조차 바래면 새로 칠해야 한다. 리앤은 생각보다 우리가 어리다면서 앉으라고 권한다. 우리가 낡은 비닐 소파에 앉자 그녀는 방을 나간다. 여기저기 잡지들이 쌓여 있고 모텔에서 가져온 것 같은 가구가 놓인 끔찍한 방이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 얼굴이 비칠 만한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내 무릎만 뚫어져라 내려다본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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