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클럽
배수아 지음 / 해냄 / 2000년 9월
품절


무열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두 주먹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마 울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은 엉망이었다. 나는 갈비뼈가 부러졌을 거라고 짐작했다. 폐를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귀에서 통증과 함께 멍한 폭풍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왼뺨을 카펫에 대고 있다. 왼쪽 귀 속에는 무열의 정액이 가득 찬 채 말라가고 있었다. 아아, 나는 결국 이반과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카펫 위에는 부글거리는 검은 거품이 끓고 있었다. 귀 속의 정액을 향해서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개미들은 카펫과 내 가슴과 목에 뒤덮여 있었다. 귀의 통증과 소음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예민한 성격이었다면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죽었다. 무열은 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186쪽

나는 무열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열은 그 스스로가 행한 폭력 때문에 겁먹고 있었다.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무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열이 있고 뜨거웠다.
무열,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떠나. 너가 사는 곳으로 가라.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입술이 굳어가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한나, 정말 괜찮은 거야?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
-187쪽

그럼. 봐, 코피가 난 것뿐이야. 다른 곳은 아무것도 다친 데가 없어.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어디가 찢어지지도 않았어. 그러니 난 괜찮아.
그런데 너 이상해, 한나. 왜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거야?
난 피곤할 뿐이야. 너무 많은 일을 했거든. 그래서 좀 자고 싶어. 아침이 되면 모든 일은 다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테니 무열,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목소리를 상냥했다. 무열은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너를 볼 면목이 없다. 나는 못난 놈이다. 이렇게까지 내가 부끄러워 보기는 처음이다.
무열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 마지막 담배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나란히 앉아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그리고 무열은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왼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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