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구판절판


나중에 나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졌을지,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들었어야 했다. 그가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가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말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사실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고, 너는 어떤 약속을 받아 낼 수도 없는 그런 배신자니?" 그는 "나 때문에 루스를 배신할 거니?" 하고 물었고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54쪽

요하네스가 "검은 방울새." 하면서 숲을 가리켰고, 나는 방울새는커녕 아무것도 볼 수 없었는데도 "응."이라고 했다. 나는 누구에게 이걸 얘기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정오의 정적이, 우리 중 누구의 마음에 들었는지. 만약 우리가 아니라면 내가 얘기를 들려줄 수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었는지. "요하네스, 난 누구든 얘기를 들려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 편지 써 본 지가 한참 되었어." 요하네스는 눈썹만 추켜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53쪽

"데어 이즈 어 라이트 커밍 인투 마이 윈도." 요하네스는 오후에 죽은 중국 여자의 커다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정말 노래를 부른 게 아니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뭔가 새어 들어왔는데, 빛, 그런데 빛은 아니었고 뭔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옛날처럼, 항상 그랬듯, 이상하게 보슬보슬한 머리, 좁은 턱, 거친 살갗. 나는 죽은 사람 옆이나, 다른 누구 옆이든 상관없고, 또는 전혀 다른 곳에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는 내게 무심했고, 나 또한 그에게 그렇게 무심했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 서로 가까웠다. 그건 나를 아프게 했는데, 분명히 그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4쪽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라져 있을 때 요하네스가 전화를 걸어 거절하기 힘든 간곡함으로 반지를 돌려 달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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