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타락론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8
사카구치 안고 지음, 최정아 옮김 / 책세상 / 2007년 5월
구판절판


그 집에는 사람과 돼지와 닭과 오리가 살았는데, 사는 곳도 먹는 음식도 서로 거의 다르지 않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창고 같이 생긴 심하게 휜 건물에, 아래층에는 주인 부부가 살고, 다락방에는 모녀가 세 들어 살았다. 그리고 그 딸은 누군지 알 수 없는 상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89쪽

그날부터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집에 여자의 육체가 하나 늘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무엇 하나 달라진 것도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거짓말같이 비현실적이었고, 그의 신변에, 그리고 그의 정신에 여하한 새로운 기운도 움트게 하지 못했다. 그 사건의 기이함을 어쨌든 이성적으로 납득한다는 것일 뿐. 생활 자체에는 책상 놓인 자리가 바뀐 만큼의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출근을 했고 그가 비운 집의 벽장 속에는 백치 하나가 홀로 남겨져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 게다가 그는 집을 나서는 순간 백치 여자 같은 건 까마득히 잊었으며, 그 사건은 벌써 기억조차 희미한 십 년, 이십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111쪽

여자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여자를 두고서 떠나고 싶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귀찮게 생각되었다. 사람이 물건을 버리기 위해서는, 비록 휴지 한 조각을 버린다 하더라도, 버려야 한다는 의욕과 결벽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여자를 버릴 의욕도 결벽도 상실되고 남아 있지 않았다. 털끝만큼의 애정도 없었고 미련도 없었으나, 버릴 만큼의 의욕도 없었다. 살기 위한, 내일의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나날에 여자의 모습을 지워본다 한들, 어딘가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갈까. 어디에 살 집이 있고, 잘 수 있는 혈거가 있을지, 그것조차 알 수 없지 않은가.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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