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그의 일기를 끌어 안고 잠들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6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6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문학적인 글쓰기는 기, 승, 전,결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남의 글을 읽고 그것을 평론하는 서평은 어느정도의 서론과 본론, 결론이라는 짜임새를 지니고 있지만 반드시 절대적으로 기, 승, 전,결이라는 글의 원칙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면에서 볼 때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타인의 글에 대한 서평을 전개하는 방식은 작가 고유의 표현이다. 결론에 이르러 하나의 질문을 던지거나 독자 스스로 답을 얻으라는 모호한 끝맺음을 할 수도 있다. 서평의 형식이 자유로움은 마지막 귀결점에 이르러서 조바심을 내며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서평집을 읽는다는 일은 확실히 책을 읽는 방식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장정일의 여섯번째 독서일기도 그의 독특한 책읽기 방식과 쓰기 방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서평집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의 여섯번째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나는 다섯권까지 읽는동안 엄청나게 산만한 문자로 활성화되어 왔던 에너지를 이전만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그가 변했나? 아니면 독설가 장정일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던 글 읽기가 변심했나? 한동안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도 이전의 독서일기와는 다른, 무언가가 삭제되고 일괄적인 변화의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이 변한 것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도 그는 여전히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꼿꼿하고 엉겅퀴처럼 독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섯번째의 독서일기가 이토록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일까.

우선, 이번의 독서일기에서 그는 책속의 예시문을 삽입하면서 책의 쪽수를 밝히지 않았다. 몇 페이지에 나왔다는 그런 구체적인 증거를 삽입하지 않았으며, 또한 사회과학분야의 책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었고 그리고 음악서적류가 꽤 자세하게 소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2002년도에는 중국에 관한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은것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삼국지 출간을 앞선 의도적인 중국공부가 아니었나 싶다. 중국관련 서적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집중적이고 치밀한 서평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삼국지 열 권을 썼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나라, 명나라의 정치, 역사, 문화를 읽으면서 저자는 중국의 역사와 더불어 그들만의 정서에까지 접근하는 시도를 충분히 노렸을 터, 그러므로 그가 집중적으로 습득한 중국의 불교관련 지식은 이번의 독서일기에서도 상당한 논리를 갖추고 등장한다. 그가 중국에 관한 전반적인 공부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대단한 책을 읽어 왔는가 일례로 불교학 공부를 하고 있는 지인에게 장정일이 읽었다는 <중국사와 불교-신서원, 1994>와 <피와 전율의 중국사-마니아 북스-1999><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에 관하여 물었더니 이런류의 책은 전문가도 여러 날 숙고의 뜻을 깊이 갖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전한다. 그는 삼국지 준비작업을 하면서 책으로나마 어느정도 중국을 섭렵하려 했던 것일까. 스스로도 경전보다는 '별 책'이라는 책 읽기를 더 즐긴다는 저자는 <만들어진 제 3의 性>이라는 부제가 붙은 미타무라 다이스케의<환관-나루,1992>까지 읽으며 명과 청나라의 환관제도와 정인갑의 <중국문화.com-다락원-2002>을 읽으며 "요 며칠 사이에 읽었던 책들은 <삼국지>를 쓰면서 중국에 대한 잡상식을 얻고 또 메마른 전문 서적과 자료를 읽는 사이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읽었던 책들로,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날학파적이라고 해야 할 이런 류의 역사서가 갖고 있는 '지식의 포켓북화'와 '지식의 시리즈화'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47쪽)라고 고백을 한다. 그의 삼국지가 이렇게 탄생되어짐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장정일은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주장을 한 컷의 카피화로 보여주는 대단한 컨셉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대목은 기존에 나왔던 독서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의 독서일기에서도 다시 맞닥뜨릴 수가 있는데, 그가 황간의 <주자행장>을 읽으며 지리함과 밋밋함에 괴로워하다가 몇 번이고 곱씹어 읽는다면 "한 개인의 인격에 백성의 행복과 생사마저 좌지우지되던 절대 왕정시대에, '예법'과 '학문'을 앞세워 황제를 타박하고 가르치려했던 주자의 삶은 '마차를 막으려는 사마귀'처럼 무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중략.......주자에게 그런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유학의 이념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무엇이었던 것인가에...."-(99쪽)라는 대목에서 '마차를 막으려는 사마귀'로 주자의 용감무쌍하고 무모하다 싶은 도전정신을 단 한문장으로 일갈하고 있다. 장정일다운 짧고 명징한 표현기법이다.

그런 그가 이번 독서일기에서는 음악서적을 여러 권 소개하면서 여섯번째의 독서일기가 기존의 독서일기와는 차별화 되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장정일이 째즈와 클랙식 음반의 열혈팬이라는 것은 세간에 유명한 일이다. 그가 예전의 독서일기에서 밝힌 음악에 대한 집착은 병적일만큼 이번의 독서일기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향수>를 읽으면서 "록, 재즈, 오페라의 토막난 부분을 음악의 더러운 물"이라고 두번이나 쿤데라가 분노하는 모습에 '더러운 물'이라는 부분을 "오페라의 전곡을 마구 난도질하여 편집,방송하는 라디오를 비난했다고 믿는다."-(127쪽)"대구에서 듣는 KBS-FM은 한 10여 년 전과 비교해, 완전히 <더러운 물>이 되었다."고 손바닥에 벌겋게 핏발이 설 정도로 강도 쎈 맞장구를 친다. 내가 장정일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이러한 직설화법과 지나치게 솔직하다 싶은 강렬한 정직함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일에 우회적인 은유법이나 간접 표현으로 한 꺼풀 덮어서 얄미운 위장수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정일은 촌철살인의 한 컷의 명문 카핏을 주류로 삼았던가 하는 의구심은 버리자. 책 말미에 쓴 2003년도에 읽었다는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 지도자-성균관 대학교 출판부, 2002>-장장 열 장의 분량으로 쓰여진 한 편의 논문과 같은 긴 서평을 읽노라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온다. 장정일의 서평 한 가지로 마치 서중석의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하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와 박정희에 대하여 서중석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니, 상처로 얼룩진 이 나라의 근, 현대사에 아껴둔 말이 많았던 것이리라. 이번의 독서일기에서 많이 등장한 사회과학서적의 서평이 이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장정일이이라는 작가가 인간적으로 귀여웠던 부분,
윤광준의 <소리의 황홀,효형출판-2001>을 읽고는 최고의 오디오를 소장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으로 인하여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다시 읽었던 날 밤, 나는 내가 커다란 JBL 스피커 속에 잠들어 있는 꿈을 꾸었다."-(222쪽)

부기)지난 해 아영엄마님이 주신 장정일 독서일기 6권을 읽고 늦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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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7권에서는 겹치는 책이 많았으면!
장정일의 독서일기 6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6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장정일이 쓴, 여섯 번째의 독서일기를 읽었다. 장정일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그런 것 치고는 희한하게, 난 그의 작품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시야 원래 읽지 않으니 그렇다쳐도,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말고는 그의 소설을 한편도 읽지 않았다니 신기하지 않는가. 참고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3분의 1쯤 읽다가 말았다. 새디스틱한 행동이 나오면서부터는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글에 대한,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장정일의 철학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생각>도 그렇고, <독서일기> 또한 장정일의 원칙과 철학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독서일기>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할 만하다. 내가 철이 없을 무렵, “책 리뷰 쓴 거 모아서 책이나 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그게 한심한 생각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책이 바로 <독서일기>다. ‘아, 내공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면 독서일기를 쓸 수 없구나’ 하는 걸 알려준 이외에도 독서일기는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내가 지금 쓰는 서평-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은 다 장정일한테 배운 거다. 특정인을 사숙하다보면 문체까지 따라하기 마련, 내 서평에 장정일의 말투가 반복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붕어빵은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필자는...”이란 구절은 내가 쓴 <기생충 제국> 리뷰의 “기생충이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저자는..”의 시조격이며, 내 서평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이 소설은..인간 세상을 이렇게 설명한다”는 식의 말투도 사실은 독서일기에서 빌려온 거다. 따라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나지만, 그 대상이 장정일이라면 오히려 즐거울 수 있다. 내가 달리 ‘빠’인가.


나름대로 신간을 열심히 찾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장정일이 선택하는 책은 왜 이리도 다른가 싶다. 그가 기술한 책들이 내가 읽은 것들보다 훨씬 멋져보이는 건 오버라 해도, 다음에 나올 <독서일기 7>에서는 겹치는 책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색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독서일기에 나온 책을 나중에 읽고 “그때 장정일은 어떻게 생각했었지?”가 궁금해 독서일기 전체를 뒤질 때가 여러 번이었다. 딱 한번, 색인을 만든 적이 있긴 한데, 그 다음부터는 다시 없어졌다.


<상식 혹은 희망, 장정일>을 읽다가 마음아픈 적이 있었다. 가방끈이 짧은 장정일은 대학을 나온 다른 작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나야 불러주는 곳이 없겠지만, 당신들은 어디 문창과 교수라도 되지 않겠냐”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자신이 알뜰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었던가?-글쓰기에 대한 원칙이 어느 누구보다 확고한 장정일이 단지 가방끈 때문에 교수가 못된다는 현실이 마음 아팠다 (장정일이 교수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장정일은 KBS <책을 말한다>의 사회자로 나온다. 아직 그 프로를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사회자로 등용해준 KBS에게 장정일의 팬으로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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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사막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선
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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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막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선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라고 말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다. 시련을 이겨내는 정신들에게는 마땅히 불모의 땅이 필요하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위대한 영혼들은 사막으로 갔다.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이라고 청마(靑馬) 유치환은 그의 <생명의 서>에서 노래했다. 위대한 영혼들이라고 해서 사막의 예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 그들에게 사막은 오히려 잔혹했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고 했던가. 사막은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킨다. 낮의 강렬한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면 사막은 초극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예수가 광야를 40일 동안 떠돈 것도 고통과 유혹을 초극할 힘과의 대면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 인간됨의 깊이와 폭이 그를 무력화시키려는 불과 모래의 시련과 맞닥뜨려 웅대한 인간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곳이 사막이다. 오래도록 사막은 초극을 갈구했던 성자들의 땅이지 않았던가.

    사막을 성소(聖所)로 삼고 평생 사막을 탐험하며, 사막의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고, 돌을 채집했던 테오도르 모노, 그에게 사막은 연구의 공간이기도 했고, 고행과 자기 성찰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사막, 그곳엔 일체의 장식과 군더더기가 없다. 지극히 무심하고 단조로운 곳이 사막이다. 모노는 『사막의 순례자』(현암사)에서 “사막에서는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라고 썼다. 대추야자 몇 알과 낙타의 젖, 일상의 모든 잔가지를 쳐버리고 사막은 최소한의 것으로만 한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외형적인 치레는 배제된다. 사막은 아주 적은 것을 갖고 살 수 있게 하고, 또 잘 견딜 수 있게 한다고 모노는 말한다. 간디는 ’100년전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고 일갈하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소유는 지나치게 많다.

    사막에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다. 모노는 사막과 함께 하면 영원 즉 시간의 무한함을 매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라비아 불모의 사막을 거주지로 하고 있는 베두인들처럼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을 빈틈없이 계획할 까닭도 없다. 개구착(開口錯), 입을 뻥긋거려 봐야 인간의 빈틈을 노리는 모래에게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 묵묵히 한 발 한 발의 정진(精進)이 있을 뿐이다.

    불모의 땅에도 침묵만은 차고 넘친다. 소음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침묵은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 욕망으로 부글거리고 고통으로 삐걱거리는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며 우주는 천지운행을 침묵 속에 거듭한다. 소리는 공간에 어떤 육체적 질감을 갖게 하지만 침묵은 공간을 순수한 것으로 남겨두어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곳으로 존재를 확장시킨다. 그 느슨한 탈아의 체험! 저 우주의 영역 너머, 저 물질의 영역 너머, 신의 영역에까지 닿고 싶은 구도자적 욕망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사막을 찾게 한 것은 아닐까. 사막 그곳은 신과 더욱 가까운 곳이다.

    사막은 무엇보다 고독의 땅이다. 고독은 밖으로 열린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성(內省)의 눈을 갖게 한다. 고독은 무엇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일이다. 대체 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성취할 가치가 있는가, 고통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자유는 대체 무엇이며 의지는 또 무엇인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의 싸움은 충분히 치열한가, 사막의 고독은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한다.

    사막, 그곳에서는 내 살의 무게, 내 뼈의 무게만이 모래를 딛고 서있다. 고통에 민감한 육체, 그러나 어떤 끝을 보고 말겠다는 분투의 정신, 이것이 다다. 용기는 나의 사소함을 고백하는 자기 긍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카뮈는 누구보다 사막을 사랑했다. 『작가수첩』(책세상)의 많은 구절은 사막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라고 말할 때, 카뮈가 그리워하고 있는 곳은 사막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장식도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호텔방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사막에 텐트를 치고 몇 일 동안 머물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담백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 밖에서는 구원이란 없다, 라고 말할 때의 카뮈는 무신론자요, 현세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지 않았다. 까뮈는『작가수첩』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낱말 열 개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세계, 고뇌,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가난의 고통, 여름, 바다”라고. 고독과 쾌활, 우울과 발랄이 하나로 뒤엉킨 모순의 인간, 부조리의 인간이었다. 그는 ‘정신의 사람’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누구보다 현세의 행복을 갈구했던 ‘육체의 사람’이었다.

    『작가수첩』에서 그의 현세주의는 도처에 나타난다. 그의 문장은 관념의 의상이 아니라 투명한 사물의 의상을 입고 있다. “ 저녁, 침묵, 까마귀들, 마치 루르마랭의 새들과 암코양이, 나의 눈물, 음악처럼.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배의 허리에 차는 물의 움직임을 따른다. 바다의 자유로운 삶과 이 몇 일의 행복.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지고 모든 것이 다 다시 만들어진다. 지칠 줄 모르는 빛 속에, 꽃무리와 기둥들로 뒤덮인 섬들 사이로 물 위를 날아다니며 보낸 이 황홀한 날들, 나는 그 맛을 입 안에, 가슴 속에 간직한다. 제 2의 계시, 제2의 탄생……”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념과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짜의 행복학이 아니라, 일체를 무효화시키는 사막, 그 정신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신생의 행복학.


    코감기에 걸려 본 사람은 안다. 대체 내 몸의 어디에 그렇게 많은 슬픔의 물기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오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안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한수영의『공허의 1/4』(민음사)의 주인공 여자는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다. 주사기로 그녀는 무릎 관절에서 물을 빼낸다. 그녀는 여지없이 고로쇠나무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고통은 갑절이 된다.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기를 말려야 한다. 그녀는 삶이 버겁다. 무겁고 쓰리고 아프다. 관절염 약의 부작용으로 피둥피둥 그녀의 육체는 볼품 없이 부풀어오른다. 그녀는 제 안의 모든 나쁜 피를 뽑아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제 몸 안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고 싶다. 그녀는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을 꿈꾼다. 룹알할리, ‘공허의 사분의 일’이란 뜻을 가진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막.

    그녀는 아파트 관리소 여직원이다. 도무지 부가가치가 없는 지리멸렬한 생활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바로 룹알할리. 그곳에 가면 모든 슬픔의 물기를 증발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그녀는 적금을 붓는다. 엘리어트는 노래했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나의 불모는 보다 나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녀 또한 불모의 저 너머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늘 희망을 배신한다. 배신과 환멸이 몸 안에 키우는 물기, 그녀는 삶이 아프다. 아픈 눈으로 세상을 보니 이웃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허의 1/4』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이야기며 동시에 세상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달다.

    조금은 퇴폐적이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그녀의 문장들을 <슬픔의 에로티즘>이라고 명명해본다. 그녀의 문장들은 슬픔을 잘 즐길 수 있게 한다. 슬픔이 지나치다 싶어 이게 아닌데 싶은데 아래와 같은 문장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다. 그래, 아름다움엔 슬픔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관리실에 혼자 있게 되면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목구멍 깊이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식도의 물큰하고 따뜻한 이물감, 그 느낌이 낯설어 나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더 밀어 넣었다. 왈칵, 거꾸로 쏠린 내장들이 입으로 한꺼번에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속엣것들을 모두 토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늘 내장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래도 견딜 수 없으면 나는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질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물큰하고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한 것, 내 몸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어둡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그 구멍을 영원히 메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질 속에 질정을 밀어 넣었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몇 개를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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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열하 > 룹알할리(Rub'al-Khali) 의 뜻은 "공허의 1/4" 이다.
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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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룹알할리(Rub'al-Khali) 의 뜻은 "공허의 1/4" 이다.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공허의 1/4. 꽤나 외롭거나 허무한 느낌이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권태롭게 쓸쓸하다. 류머치스성 관절염을 지닌 여자와 낙타를 끌며 청소하러 다는 사내, 어깨에 토끼를 올려놓고 다니는 소년. 이들이 흐느적 거리며 걸어다니는 아파트, 배밭을 품고 있는 바위산, 모두 권태로운 세계의 한 삽화이다.

여자와 바보같은 사내, 자폐증 소년은 모두 안드로메다라는 별에서 온 미지의 존재인지 알길이 없지만 서로는 서로를 외면한다. 현실에서 안드로메다는 220만광년 떨어진 머나먼 별이며 지구에는 별로 알려진 것도 알려질 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끌리는 같은 종족들은 무언의 메세지를 서로에게 전하며 견고한 아파트단지의 성에서 안드로메다까지의 비행을 꿈꾼다.

 하지만 아파트단지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를 모른다.  관리소장과 김선생은 관절염의 여자를 사환과 말수 적은 조력자로 생각하고 청소아줌마들은 낙타 사내를 덜떨어진 바보 사내로, 소년의 가족은 소년을 충격으로 인한 자폐아 정도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유폐시킨 것이다.

 이 책은 세상에서 유배된 존재들의 도시의 어느 구석에서 삶의 살아가는지, 그들을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권태로운지 보여준다. 그러한 묘사를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부적응자인 그들을 유배시킨 이 세상은 충분히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들을 추방하고 재미있게 살 것 같은 현대인들 또한 그 도시에서 공허한 일상만을 반복한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리라.

공허를 치유할 수 있는 공허의 1/4, 룹알할리(Rub'al-Khali) 사막은 어디에 있을까? 사이버세계에 그런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이 단 평이라도 있다면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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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엷은 락스 냄새가 풍겨오는 듯...
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확실히 나는 뭔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는 편인가.
관리사무소 앞 차량에서 영광굴비인지 꽃게인지를 딱 30분 동안 정가의 절반에 싸게 판다는
방송으로 처음 내 귀에 잡힌 우리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 청년의 목소리.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심하게 상기되어 떨리어 나온다.
며칠 전 아파트 주민 무료진료를 알리는 방송에 귀기울이던 나는
순전히 그 청년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하자보수 신청서를 가지고 관리사무소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슬며시 했다.

간결하고 매력적인 제목에 끌려 이 책을 골랐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공동 수상작인 한수영의 장편소설 <공허의 1/4>은 
작은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그녀는 엄청 비대해져
걷는 것도 힘겨울 정도다.
늙어도 사나움이 조금도 가시지 않은 어머니는 휴지뭉텅이를 얻어오는 재미에
약장수 패거리 주위를 얼씬거리다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옥매트를 몰래 사들고 온 날,
난생 처음으로 상냥하고 비굴한 모습을 딸에게 보여준다.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월급의 3분의 1을 축내는 먼 도시의 요양소에 있는  언니 등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이란 건 한마디로 갑갑함 그 자체이다.

주변 인물은 어떤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초로의 관리소장과,
청소와 쓰레기 정리서껀 하루종일 아파트를 돌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잡역부 김씨,
좀 머리가 모자란 그에게 술을 먹이고 지분거리는 청소부 아줌마들의 골방,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엄마가 있다는 먼 행성 안드로메다로 떠날 것을 꿈꾸느라
수업을 밥먹듯 빠지는 어린 소년.

어찌 보면 좀 작위적인 설정 같기도 한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바로 내 주변에
한 명씩은 꼭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어쩌면 내가 그들 중의 한 명일 수도.......
유사시 음독을 하기 위한 독약을 몸에 지닌 기분으로 항시 사무실 책상서랍 속에
소주 한 병을 숨겨두는 그녀.

--몇 년 동안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있었다.
(...) 해마다 1월 1일이면 나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을 옆에 놓고
목삼겹살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불판 위의 목삼겹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정말이지 삼겹살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비계와 살코기가 기가 막히게 어울려 있는 조직.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목삼겹만큼만 쓰고 싶었다.
불판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관절염까지 찾아들었다. 볼펜을 오래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천년을 몇 달 앞에 두고 나 혼자 절필을 선언했다.(53쪽)

나는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본 적도 없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본 적도 없지만
락스 냄새가 희미하게 떠도는 어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더러는 마이크를 들고 방송도 하고
온갖 잡무를 처리하고 다니느라 절룩대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내가 꼭 그녀인 듯한
쓸쓸하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공허의 4분의 1'은 류머티즘 관절염에 최고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쨍쨍한  햇볕, 거기서도
룹알할리라는 사막  이름이다.
그곳에 가서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채 평생을 살면서 몸속의 습기를 모두 말리고
어긋난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나도 빨래처럼 바위에 널어  바싹 말려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세상이 너무 완벽해 보여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 것이 젊은 날의 고민이었다면,
끼어들고 싶은 곳이 더이상 없는 중년의 날들도 공허의 4분의 1은 차지하지 않을까.
함께 실린 '개와 늑대의 시간'과 ' '십일월' 두 단편도  빨려들어가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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