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선
Ⅰ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라고 말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다. 시련을 이겨내는 정신들에게는 마땅히 불모의 땅이 필요하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위대한 영혼들은 사막으로 갔다.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이라고 청마(靑馬) 유치환은 그의 <생명의 서>에서 노래했다. 위대한 영혼들이라고 해서 사막의 예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 그들에게 사막은 오히려 잔혹했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고 했던가. 사막은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킨다. 낮의 강렬한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면 사막은 초극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예수가 광야를 40일 동안 떠돈 것도 고통과 유혹을 초극할 힘과의 대면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 인간됨의 깊이와 폭이 그를 무력화시키려는 불과 모래의 시련과 맞닥뜨려 웅대한 인간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곳이 사막이다. 오래도록 사막은 초극을 갈구했던 성자들의 땅이지 않았던가.
사막을 성소(聖所)로 삼고 평생 사막을 탐험하며, 사막의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고, 돌을 채집했던 테오도르 모노, 그에게 사막은 연구의 공간이기도 했고, 고행과 자기 성찰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사막, 그곳엔 일체의 장식과 군더더기가 없다. 지극히 무심하고 단조로운 곳이 사막이다. 모노는 『사막의 순례자』(현암사)에서 “사막에서는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라고 썼다. 대추야자 몇 알과 낙타의 젖, 일상의 모든 잔가지를 쳐버리고 사막은 최소한의 것으로만 한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외형적인 치레는 배제된다. 사막은 아주 적은 것을 갖고 살 수 있게 하고, 또 잘 견딜 수 있게 한다고 모노는 말한다. 간디는 ’100년전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고 일갈하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소유는 지나치게 많다.
사막에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다. 모노는 사막과 함께 하면 영원 즉 시간의 무한함을 매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라비아 불모의 사막을 거주지로 하고 있는 베두인들처럼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을 빈틈없이 계획할 까닭도 없다. 개구착(開口錯), 입을 뻥긋거려 봐야 인간의 빈틈을 노리는 모래에게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 묵묵히 한 발 한 발의 정진(精進)이 있을 뿐이다.
불모의 땅에도 침묵만은 차고 넘친다. 소음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침묵은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 욕망으로 부글거리고 고통으로 삐걱거리는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며 우주는 천지운행을 침묵 속에 거듭한다. 소리는 공간에 어떤 육체적 질감을 갖게 하지만 침묵은 공간을 순수한 것으로 남겨두어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곳으로 존재를 확장시킨다. 그 느슨한 탈아의 체험! 저 우주의 영역 너머, 저 물질의 영역 너머, 신의 영역에까지 닿고 싶은 구도자적 욕망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사막을 찾게 한 것은 아닐까. 사막 그곳은 신과 더욱 가까운 곳이다.
사막은 무엇보다 고독의 땅이다. 고독은 밖으로 열린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성(內省)의 눈을 갖게 한다. 고독은 무엇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일이다. 대체 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성취할 가치가 있는가, 고통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자유는 대체 무엇이며 의지는 또 무엇인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의 싸움은 충분히 치열한가, 사막의 고독은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한다.
사막, 그곳에서는 내 살의 무게, 내 뼈의 무게만이 모래를 딛고 서있다. 고통에 민감한 육체, 그러나 어떤 끝을 보고 말겠다는 분투의 정신, 이것이 다다. 용기는 나의 사소함을 고백하는 자기 긍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Ⅱ 카뮈는 누구보다 사막을 사랑했다. 『작가수첩』(책세상)의 많은 구절은 사막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라고 말할 때, 카뮈가 그리워하고 있는 곳은 사막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장식도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호텔방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사막에 텐트를 치고 몇 일 동안 머물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담백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 밖에서는 구원이란 없다, 라고 말할 때의 카뮈는 무신론자요, 현세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지 않았다. 까뮈는『작가수첩』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낱말 열 개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세계, 고뇌,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가난의 고통, 여름, 바다”라고. 고독과 쾌활, 우울과 발랄이 하나로 뒤엉킨 모순의 인간, 부조리의 인간이었다. 그는 ‘정신의 사람’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누구보다 현세의 행복을 갈구했던 ‘육체의 사람’이었다.
『작가수첩』에서 그의 현세주의는 도처에 나타난다. 그의 문장은 관념의 의상이 아니라 투명한 사물의 의상을 입고 있다. “ 저녁, 침묵, 까마귀들, 마치 루르마랭의 새들과 암코양이, 나의 눈물, 음악처럼.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배의 허리에 차는 물의 움직임을 따른다. 바다의 자유로운 삶과 이 몇 일의 행복.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지고 모든 것이 다 다시 만들어진다. 지칠 줄 모르는 빛 속에, 꽃무리와 기둥들로 뒤덮인 섬들 사이로 물 위를 날아다니며 보낸 이 황홀한 날들, 나는 그 맛을 입 안에, 가슴 속에 간직한다. 제 2의 계시, 제2의 탄생……”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념과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짜의 행복학이 아니라, 일체를 무효화시키는 사막, 그 정신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신생의 행복학.
Ⅲ 코감기에 걸려 본 사람은 안다. 대체 내 몸의 어디에 그렇게 많은 슬픔의 물기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오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안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한수영의『공허의 1/4』(민음사)의 주인공 여자는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다. 주사기로 그녀는 무릎 관절에서 물을 빼낸다. 그녀는 여지없이 고로쇠나무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고통은 갑절이 된다.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기를 말려야 한다. 그녀는 삶이 버겁다. 무겁고 쓰리고 아프다. 관절염 약의 부작용으로 피둥피둥 그녀의 육체는 볼품 없이 부풀어오른다. 그녀는 제 안의 모든 나쁜 피를 뽑아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제 몸 안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고 싶다. 그녀는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을 꿈꾼다. 룹알할리, ‘공허의 사분의 일’이란 뜻을 가진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막.
그녀는 아파트 관리소 여직원이다. 도무지 부가가치가 없는 지리멸렬한 생활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바로 룹알할리. 그곳에 가면 모든 슬픔의 물기를 증발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그녀는 적금을 붓는다. 엘리어트는 노래했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나의 불모는 보다 나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녀 또한 불모의 저 너머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늘 희망을 배신한다. 배신과 환멸이 몸 안에 키우는 물기, 그녀는 삶이 아프다. 아픈 눈으로 세상을 보니 이웃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허의 1/4』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이야기며 동시에 세상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달다.
조금은 퇴폐적이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그녀의 문장들을 <슬픔의 에로티즘>이라고 명명해본다. 그녀의 문장들은 슬픔을 잘 즐길 수 있게 한다. 슬픔이 지나치다 싶어 이게 아닌데 싶은데 아래와 같은 문장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다. 그래, 아름다움엔 슬픔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관리실에 혼자 있게 되면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목구멍 깊이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식도의 물큰하고 따뜻한 이물감, 그 느낌이 낯설어 나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더 밀어 넣었다. 왈칵, 거꾸로 쏠린 내장들이 입으로 한꺼번에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속엣것들을 모두 토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늘 내장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래도 견딜 수 없으면 나는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질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물큰하고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한 것, 내 몸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어둡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그 구멍을 영원히 메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질 속에 질정을 밀어 넣었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몇 개를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