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5일 토요일
제목 : 마네킹
지하철 문이 열리고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선다. 토요일이라 평일에 비해선 사람들이 적다. 의자는 다 차고 몇 명은 서 있을 정도로 한산하다.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선다.
안경을 벗어 통에다 안전하게 넣어둔다. 양쪽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양 발은 11자 모양이 되게 잡는다. 양 발 안쪽에 힘을 싣고 허리를 곧추 세운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안정적인 자세가 된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바닥 바깥쪽에 힘들 싣고 걷는다. 신발 밑창의 양쪽 끝이 심하게 닳아 없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런데다 난 8자로 걷기 까지 한다. 이런 모습을 고쳐보려고 친구에게 전수받은 비법이다. 조금 과장됐군. 비법이라기엔 무리가 있는 듯 하군.
발바닥 안쪽에만 힘을 주면서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균형을 잡는다. 벌리고 있는 폭이 좁아서 자칫 잘못하면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넘어진 적은 없군. 운동 신경이 좋으니... 자화자찬.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하얀 블라우스를 입혀 놓은 마네킹 처럼 보인다. 안경을 벗으면 사물의 형체가 뚜렷하지 않다.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처럼 외곽선이 번진듯 희미할 뿐이다.
마네킹이라...... 여러가지 단상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난 마네킹처럼 수동적이지. 내 의식은 온통 독립된, 능동적인 인간이기를 간절히 바라오나, 세상은 나에게 수동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구나.
세상으로부터...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구나. 자꾸만 지금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나를 옭아메는 것은 세상의 시선 따위가 아니라 바로 나 라는 것을 알기에........ 알고 있었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나 라는 상에 맞지 않으니 자책하고 힘들어 했던 것이지. 인정하는 공부를 하자. 일단은 인정하는 것 부터 공부하자. 그러면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겠지.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