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e시대의 절대사상 26
변광배.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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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는 페미니즘의 선구자이며 그녀의 저작 '제 2의 성'은 페미니즘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보부아르와 그의 저작이 이후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제 2의 성'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지 않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녀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서나 일반인들에게서나 거의 전무한 지경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 책을 읽기 전부터 부담을 안겨 주어 그런게 아닌가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e시대의 절대사상에서 나온 여성학 백과사전 '제 2의 성'은 학계에 몸 담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도 보부아르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도록 쉽고 체계적으로 쓰여졌다.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주장은 오늘 날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열등성은 결코 타고 났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사회,문화적 사실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여성이 겪는 열등성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경험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쩌다 열등한 존재, 제 2의 성이 되었을까. 이 물음의 답을 이해하려면 보부아르의 영원한 연인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변광배는 사르트르 전공자로 그의 이론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의하면 1. 인간의 행동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초월적 가치는 없다. 인간의 삶에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삶은 부조리한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이며 우리가 고뇌와 불안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이 세계에 속하는 모든 존재는 우연적이다. 필연적인 존재이유란 없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보하는 것, 자신의 출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3. 인간에게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구상한 신의 존재란 없기에 우선 사람이 먼저 있어 세상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 정의된다. 이런 인간은 실존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본질을 창조해나간다. 순간순간 자신을 선택하면서 선한자, 또는 악한 자가 된다.  

삶이란 자기 창조의 과정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해 가는 것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미래를 향해 내던지는 투기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을 미래를 향해 내던지면서 자기를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실존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신에게 어떤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자유롭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나와 타자  

   
 

서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각자의 본질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와 타자는 우연히 만난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객체화하려고 한다. 시선은 주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아 버리는 힘이다. 그러나 나는 한시라도 주체의 상태에서 벗어나 객체의 상태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내 실존에 대해 진정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와 나는 서로를 객체화하려는 '투쟁'의 관계이다. 하지만 나와 타자가 서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결국 이런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상태는 '도덕적 상태'로 규정한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보부아르의 주장  

   
  보부아르는 여성이 겪는 열등성의 원인을 여성의 본질이 아닌 실존에서 찾으려고 했다. 여성은 실존하는 주체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유'의 상태에서 매 순간 자신을 미래를 향해 투기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초월하는'식으로 살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상태에 안주하면서 자기 창조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살아왔다. 이렇게 남성들이 베푸는 혜택 속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여성들은 스스로를 '타자' 또는 '객체'의 상태로 영원히 머물고 말 것이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타자 또는 객체가 된 원인을 1. 생물학적인 견해 2. 정신분석학적 견해, 3. 사적 유물론적 견해를 통해 분석하고 비판하다. 그리고 여성이 억압당해온 역사, 신화에 등장한 여성, 그리고 문학작품에 등장한 여성의 모습을 고찰하면서 1권을 끝낸다. 2권은 여자의 형성, 여자들이 처한 상황, 여자들의 정당화, 그리고 여성해방의 가능성과 조건 등의 문제를 검토한다.  

사실 방대한 저술의 끝에 제시된 대안은 부족함이 많다. 일단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해방되기 위해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들이 남성 못지 않게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려면 일단 노동의 역할을 충실히 해 경제 자립을 해야한다. '성적 사명'이나 '모성', '남성 위주의 세계'라는 장애가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그곳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기 창조와 자기 초월을 멈춰서는 안된다. 보부아르의 시대에는 밖에서 노동하는 여성이 적었고 참정권조차 여성에게 허용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정도의 대안이 제시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다. 스스로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이런 태도를 지속하는 한 여성은 영원히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남성의 시선에 갇혀 객체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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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 데이트, 쇼핑, 놀이에서 전쟁과 부자 되기까지 숨기고 싶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것
앨런 S. 밀러.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박완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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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는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 구조로 인해 발생한 본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 인간의 본성이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해 진화하고 겉으로 드러난다고 말해야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종족번식을 목적으로 혹은 본성으로 갖는데 이 본성에 충실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화한다. 남자는 일생동안 몇 백명?천명?만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천명의 아이를 퍼뜨린 왕이 있었단다. 반면 여자는 일생동안 최고 서른 번 정도의 출산이 가능하다. 기네스북에 오른 다산자는 69명?을 낳았다고 한다. (두쌍둥이 세쌍둥이가 많다) 아무튼 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가 적고 아이를 낳기 위해 일 년 동안 뱃 속에 품어야 하기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강한 반면 남자는 번식의 기회가 많고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에 자식에 대한 애착이 적은 편이란다. 또 남자의 입장에서 종족 번식을 하기 위해 여자보다 경쟁해야할 일이 많은 것도 남자가 여자보다 자손을 남길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남자는 골격이 커지고 힘이 세진 반면 여자는 그럴 필요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고 몸이 작게 진화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짝짖기로 설명가능하다. 허리가 잘록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등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다 이런 본성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본성이냐하면 당연히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자 하는 거다. - 이 외에도 저자는 여러 예를 들면서 우리의 행위를 짝짖기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환경적 요인은 없는 건가. 정말 종족 번식이라는 무의식에 의해 우리의 행동이 지배되는가.  저자는 서문에서 이러한 반론을 예상했는지(어쨌는지) 이것이 모든 것을 해명할 수는 없다고 못을 박는다. 사실 미적 기준도 시대를 달리하면서 변해왔다. 아무리 (달라진 미적기준들이 다) 종족번식을 위한 것이라해도 인간의 모든 행위를 생물학적 본성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주어진 본성을 거스르려고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기도 하고 애인에게 배신당해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내일 먹으려고 음식을 아껴먹고, 살을 빼려고 굶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명예나 인정받으려는 욕망에서 생긴 행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들은 명백하게 동물적인 종족번식의 본성과는 달리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욕망이다.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서 의심가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에는 딸이 태어나고 돈이 많은 집에는 아들이 태어난다고 했는데 돈이 많으면 그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 자식을 많이 낳을 확률이 높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들은 기껏해야 몇 명이라 그 집에서는 딸이 태어난다고 한다. 도대체 어느나라의 누구를 조사한건지 의심스럽다. 돈 많은 집에서 아들 낳으려고 딸을 낙태시켰을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리고 사고력이 뛰어난 부모는 아들을 낳고 감정이 풍부한 부모는 딸을 낳는다는데 이도 마찬가지다. 태아의 성별이 정해지는 게 태어날 부모의 집이 가난한지 부자인지 그들이 공간지각력이 뛰어난지 예술가인지가 도대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 안간다.   

또 한가지 더, 지난 몇 만년 동안 인간의 사회는 급격하게 발전했지만 인간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단다. 그래서 현재 인간의 심리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서 멈춰있다. TV를  보면서 TV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이 마치 겪은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심리가 발달하면 TV는 재미가 없어진다냐. 

이 책에서 유익한 점을 뽑자면 인간의 모든 행위 동기를 관통하는 이론을 냈다는 것이 아니라 퍼즐의 한 부분을 꺼내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인간이 지난 만 년동안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동물이라는 것, 동물과 다름없는 본성에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내 생각) 이타적인 행위, 희생하는 정신 등 사회가 만들어낸 이념도 물론 우리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적자생존(이건 또 다른 이야기 일 수 있지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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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 2011-08-13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읽었습니다^^ 가난한집에선 딸이태어나고 부잣집에서는 아들이태어난다..
이부분은 어느정도 일리있는 말입니다. 단순히 가난하고,부유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컸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부유할수록 여러모로 육체.정신적 여유가크고
영양공급도 원활했을터, (남성의 골격과 체격이 크다는걸 고려했을때) 당연히 부유한집안
에서 아들이 태어날 확률이 당연히 클것이다라는 예측이 가능하며(정확히는 아들을낳는것이 이익이고, 반대로여유가없으면 자식을포기하거나, 딸을낳아 잘기르는것이 이익) 실제로 객관적인 증거도있는걸로 압니다.(전쟁전/후 아들이 태어나는 비율이 현격히 차이난다는 논문등) 문제는 우리몸이 의도적으로 성별을 결정하도록하는 기제가 있느냐,하는것이겠죠
그 판단은 순수하게 `영양분공급` 이 원활한가,아닌가에 초점을 두고 있기때문에..

Ray 2011-08-13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상황에서는 경제적여유와 성별간의 개연성은 크지않다는걸 반증하게되는 셈이죠..
(요즘시대에, 적어도 우리주변에는 밥을굶는사람은 없으니까요^^;) 여하튼,일리있는말은
맞습니다. 인간의진화속도보다 사회가 너무빠르게 급변했기에.. 아마글쓴이는 과거,어려운
시절을 예로든 것 같습니다.

또한가지.. 부모의 사고력과 감수성에관해.. 이것도 객관적 증거가 충분히있다고합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공간지각능력이 여성에비해 높으며 이것은 남성호르몬의 영향이 매우 큰것으로 밝혀졌고, 임신중인 산모중에서도 여성임에도, 남성호르몬이 비교적 높은수치 분비되는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이러한 산모는 당연히 남성호르몬의 영향으로인해 공간지각능력/논리,사고력 및 다소 남성적성향이 강할것이며 당연히 태아는 남자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을것이다 라는 역추론이 가능하겠지요 (혹은 여아가 태어날지라도, 남성적성향이 강한
여아가 필연적으로 태어날것을 예측할수있을겁니다) 미심쩍은 부분이 해결되셨길 바랍니다.
진화심리학은 최근 발전하기 시작한 학문이지만 충분히 학문적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이런 리뷰까지 작성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반가운맘에 글남겨봅니다..

Cleaner 2011-08-2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긴 댓글은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산모에게 남성 호르몬이 많으면 남자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지는 건가요? 그럼 임신 가능기 때 남성호르몬을 주입하려는 산모들이 많아지겠군요.
 
로빙화 카르페디엠 2
중자오정 지음, 김은신 옮김 / 양철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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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같은 그림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그리도 똑같이 표현할 수 있는지, 그린 이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오밀조밀 현실의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한 그림들이 거의 없다. 가끔은 도대체 왜 이 그림들이 그리도 칭찬받고 거액에 거래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다. 그림은 사진이 아니라고.   

요즘은 모방능력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에 더 가치를 둔다. 그래서 임지홍보다는 아명이의 그림이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명이의  그림 중 '벌레 세상'을 보면 곽선생의 말대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차밭에 나타난 벌레들이 아명이 형제의 옷과 밥풀 그리고 찻잎을 뜯어 먹고있다. 벌레 때문에 차 농사를 망치게 되면 아명이네 가족은 옷도 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벌레를 싫어하고 차밭을 걱정하는 아명이의 감정이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그림은 표현이다. 누군가의 그림을 모방하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든,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하여 그리든 그림은 그린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림을 통해 그린 이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다. 이때 그 사람의 의도 혹은 생각이 더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 그런 그림이 표현력이 뛰어난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임지홍보다 아명이의 그림이 더 뛰어나고 미술관에는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런 그림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해설을 해줘야지만 이해가 된다면 혹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한다면, 그 소수가 가진 권위에 의해 그림이 인정받아도 되는 걸까. 어떤 미적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예술은 예술일까. 왜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는 지홍이의 그림은 미술계에서 예술이 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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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과 부드러움을 넘어 그녀는 홀로 경쾌히 걷는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고독한 노래를 부르니 

노랫소리 바람 속에 휘파람으로 맴돈다.  

 

 

워즈워드의 '루시 그레이, 또는 고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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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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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의미를 찾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렸을 적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의도라든지, 소설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홍길동 전’을 읽으면서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홍길동의 무술에 매료되지 누가 조선시대 사회문제를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소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따져 묻고 캐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만 소설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고,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텍스트를 보는 눈이 더 높아진다는 말을 믿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야했어요.’라든가, ‘죄와 벌’을 읽고 ‘스릴이 넘쳤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 찾는다기보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더 가깝다.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나 절대 저자의 의도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의도가 크게 의미가 없기도 하다. 만약 던져진 텍스트를 독자의 몫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저자의 의도를 생각지 않고 의미를 찾는다고 본다면 그곳에는 정답은 없고,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동의 혹은 동감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야 텍스트를 보는 좋은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어쨌든 ‘윌리를 찾아서’처럼 숨어있는 열 명의 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능력껏 많은 윌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모든 윌리가 똑같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것이 윌리라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만 받으면 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서론으로 [파리대왕](민음사, 2010)의 서평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책의 다른 서평들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어서다. 그건 책 소개와 해설집에 나오는 두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원시성, 즉 인간을 근본적으로 악으로 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둘째는 상징이다. 랠프가 문명을, 안경을 쓴 돼지가 지성을, 잭이 폭력을, 사이먼이 순교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 상징들은 현 사회의 정치적 구도와 유사하다. 마지막은 성장소설로서의 ‘파리대왕’이다. 점점 야만인이 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던 아이들이 그들을 구조하러 나타난 어른을 보고 동시에 눈물을 터뜨린다. 아이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그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순진함에서 벗어나야하고 그 과정은 그토록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다.

이 중에서 정작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건 저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그리고 있다는 첫 번째 해석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 몇 명의 아이들은 게 중 키가 크고 잘 생긴 랠프를 지도자로 선출한다. 랠프는 봉화를 올려 구조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다. 잭이 사냥으로 멧돼지를 잡아와도, 그에게는 봉화가 우선이다. 잭이 고기를 이용해 그의 권위를 빼앗고, 그를 공격해도 랠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랠프는 친구, 소라, 권위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쫓고 쫓기는 전쟁은 그들을 구조하러 온 장교에 의해 중단된다. 런던이라는 문명세계에서 온 소년들이라 해도 섬이라는 한정된 곳에서 규율은 무너지고 점차 폭력과 무질서가 그들을 지배해 결국 문명의 아들들은 야만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아이들을 야만으로 몰고 간 것일까. 그것은 바로 ‘파리대왕’이다. 한 아이가 ‘짐승’을 보았다고 말함으로써 이 무리에 작은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이 두려움은 그 짐승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도 조금씩 퍼져 모든 아이들이 공포에 떨게 된다. 짐승의 정체가 죽은 사람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이먼은 이 사실을 알리려 다가오지만 아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사이먼을 죽이고 만다. ‘난 이미 너희들의 일부야.’라는 파리대왕의 말을 미루어봤을 때 두려움은 밖에 실재하는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이 두려움이 살인까지도 가능하게 만든 근본 원인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잭 일당은 이 공포감을 떨치기 위해 ‘짐승’에게 굴복했다. 그리고 얼굴에 색을 칠해 표정을 알 수 없게 되자 일당은 더욱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런던에 살고 있는 문명인들은 두려움이 없는가. 문명인을 문명인이게끔 해주는 건 무엇인가. 지식인을 상징하는 돼지의 안경과 규칙을 상징하는 랠프의 소라를 문명의 잔재물로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안경과 소라는 두려움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여전히 안경과 소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왜?

나는 여기서 저자의 의도를 하나 추측한다. 아이들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피난 가던 중 추락해 섬에 떨어진다. 시대 배경이 전쟁 중이다. 전쟁은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었다. 너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안경과 소라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은 적이라는 실재하는 존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면 지금껏 쌓아왔던 문명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우리는 모두 야만인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조심하라고.

결국 저자는 무인도라는 자연 상태를 가정해 인간의 근본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를 얼마나 잔인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수많은 윌리 중 하나 일뿐이다.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짐승의 실체가 죽은 인간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이먼은 이 진실을 전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이를 두고 사이먼을 순교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진실을 보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무지한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순교자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화를 구원으로, 무인도를 에덴동산으로 보기도 한다. 혹자는 이러한 해석이 작위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과연 이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당혹스러웠으니까. 청소년 권장도서인 ‘파리대왕’은 유난히 해석이 분분하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즐기지 못하고 해석에 매달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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