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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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의미를 찾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렸을 적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의도라든지, 소설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홍길동 전’을 읽으면서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홍길동의 무술에 매료되지 누가 조선시대 사회문제를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소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따져 묻고 캐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만 소설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고,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텍스트를 보는 눈이 더 높아진다는 말을 믿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야했어요.’라든가, ‘죄와 벌’을 읽고 ‘스릴이 넘쳤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 찾는다기보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더 가깝다.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나 절대 저자의 의도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의도가 크게 의미가 없기도 하다. 만약 던져진 텍스트를 독자의 몫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저자의 의도를 생각지 않고 의미를 찾는다고 본다면 그곳에는 정답은 없고,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동의 혹은 동감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야 텍스트를 보는 좋은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어쨌든 ‘윌리를 찾아서’처럼 숨어있는 열 명의 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능력껏 많은 윌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모든 윌리가 똑같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것이 윌리라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만 받으면 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서론으로 [파리대왕](민음사, 2010)의 서평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책의 다른 서평들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어서다. 그건 책 소개와 해설집에 나오는 두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원시성, 즉 인간을 근본적으로 악으로 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둘째는 상징이다. 랠프가 문명을, 안경을 쓴 돼지가 지성을, 잭이 폭력을, 사이먼이 순교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 상징들은 현 사회의 정치적 구도와 유사하다. 마지막은 성장소설로서의 ‘파리대왕’이다. 점점 야만인이 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던 아이들이 그들을 구조하러 나타난 어른을 보고 동시에 눈물을 터뜨린다. 아이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그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순진함에서 벗어나야하고 그 과정은 그토록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다.

이 중에서 정작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건 저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그리고 있다는 첫 번째 해석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 몇 명의 아이들은 게 중 키가 크고 잘 생긴 랠프를 지도자로 선출한다. 랠프는 봉화를 올려 구조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다. 잭이 사냥으로 멧돼지를 잡아와도, 그에게는 봉화가 우선이다. 잭이 고기를 이용해 그의 권위를 빼앗고, 그를 공격해도 랠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랠프는 친구, 소라, 권위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쫓고 쫓기는 전쟁은 그들을 구조하러 온 장교에 의해 중단된다. 런던이라는 문명세계에서 온 소년들이라 해도 섬이라는 한정된 곳에서 규율은 무너지고 점차 폭력과 무질서가 그들을 지배해 결국 문명의 아들들은 야만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아이들을 야만으로 몰고 간 것일까. 그것은 바로 ‘파리대왕’이다. 한 아이가 ‘짐승’을 보았다고 말함으로써 이 무리에 작은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이 두려움은 그 짐승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도 조금씩 퍼져 모든 아이들이 공포에 떨게 된다. 짐승의 정체가 죽은 사람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이먼은 이 사실을 알리려 다가오지만 아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사이먼을 죽이고 만다. ‘난 이미 너희들의 일부야.’라는 파리대왕의 말을 미루어봤을 때 두려움은 밖에 실재하는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이 두려움이 살인까지도 가능하게 만든 근본 원인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잭 일당은 이 공포감을 떨치기 위해 ‘짐승’에게 굴복했다. 그리고 얼굴에 색을 칠해 표정을 알 수 없게 되자 일당은 더욱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런던에 살고 있는 문명인들은 두려움이 없는가. 문명인을 문명인이게끔 해주는 건 무엇인가. 지식인을 상징하는 돼지의 안경과 규칙을 상징하는 랠프의 소라를 문명의 잔재물로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안경과 소라는 두려움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여전히 안경과 소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왜?

나는 여기서 저자의 의도를 하나 추측한다. 아이들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피난 가던 중 추락해 섬에 떨어진다. 시대 배경이 전쟁 중이다. 전쟁은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었다. 너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안경과 소라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은 적이라는 실재하는 존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면 지금껏 쌓아왔던 문명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우리는 모두 야만인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조심하라고.

결국 저자는 무인도라는 자연 상태를 가정해 인간의 근본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를 얼마나 잔인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수많은 윌리 중 하나 일뿐이다.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짐승의 실체가 죽은 인간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이먼은 이 진실을 전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이를 두고 사이먼을 순교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진실을 보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무지한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순교자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화를 구원으로, 무인도를 에덴동산으로 보기도 한다. 혹자는 이러한 해석이 작위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과연 이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당혹스러웠으니까. 청소년 권장도서인 ‘파리대왕’은 유난히 해석이 분분하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즐기지 못하고 해석에 매달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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