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오키상 수상작, 충격 데뷔작이라는 출판사의 선전 문구를 책갈피 삼아 떼어내고 나면 마치 30년 전의 낡은 문학 전집 표지를 연상케 하는 색깔과 디자인이 드러난다. 그것 때문에 책의 가격이 비싸진 것은 사실 이해하기 힘들고, 또한 본인의 기준에서 볼 때 지나치게 넓은 듯한 편집도 이해하긴 어렵지만, 얘기 자체가 2차대전 직후(즉, 일본 항복 이후)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잘 어울리는 겉 모양새라고는 할 수 있다.

의외로, 기담, 괴담 소설의 대가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본격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처럼, 뛰어난 지적 능력의 교고쿠도(본명 추젠지 아키히코)와 삼류 소설가인 '나'가 마치 홈즈와 왓슨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소설의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데, 양자역학과 심리적 맹점을 이용해 대뇌의 자의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이 소설 내의 막나가는 듯한 기이한 세계관을 설파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양자역학의 도입은 후반부까지 성실하게 그 개념을 파고드는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저 센세이셔널한 (=논란의 여지가 많은) 트릭을 유도하는 도구로만 쓰이기 때문에 아쉬운 점도 없지 않지만,

교고쿠도를 빌어 말하는 작가의 얘기 푸는 솜씨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유창하다. 한 1/3쯤 정신없이 읽다 보면 어느새 작중의 '나'처럼 분위기에 휘말려 멍청해진 나를 발견하니 참.... 일본 고유의 각종 괴담, 전설 등을 적재 적소에 넣고 때맞춰 하나씩 터뜨려 주니 지루할 새가 없었다. 딕슨 카의 [화형법정]을 연상케 하는 듯한 막나가는 세계가 탐정에 의해 하나씩 설명이 붙으면서 어느새 책 바깥의 실제 세계랑 합치되는 듯한 느낌이 아주 좋았다.

다만, 본격물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교환, 사체 은닉의 트릭이 접하는 순간 너무 눈에 보이거나, 혹은 납득할 수 없는데도 설명이 완전히 되지 않고 어이없이 넘어가 버려서 상당히 아쉬웠다. 적어도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구분 정도는 앞부분의 그 유창한 해설을 다시 동원해서 유도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소설의 핵심이 본격물식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라, '논리적인 괴담'임은 분명하지만.......

소수점으로 별을 매기는 게 만약 허용된다면, 4.7 stars 정도 줄 수 있는 소설. 교고쿠도 연작의 첫 타자라고 들었는데, 다른 시리즈도 번역되어 나와서 작가의 유창한 언변을 또 접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일본에선 애니 등 다른 매체로 제작된 적도 있는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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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긋 2004-05-23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형법정을 너무나 재밌게 읽어놔서 구미가 당기는걸요!!! `ㅁ`
마구마구 읽고 싶은 맘이 솟구치는데...
어떡하나...?

Fithele 2004-05-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설이지 마시고 보세요 ^^

decca 2004-05-24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평 좋고요~ 글놀림 경쾌하네요 ^^

로렌초의시종 2004-05-2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물흐르듯 유려하네요~ 책의 특징적인 부분에 대한 분석들도 예사롭지 않고 말이죠. 그러고보니 이주의 마이리뷰에 뽑히셨더군요. 알라딘 편집부님들도 같은 생각이셨던 모양입니다~^^

Fithele 2004-05-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초님의 코멘트를 보고서야 뽑힌 걸 알았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이래서 생기나 보군요...

물만두 2004-05-2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글 너무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비츠로 2004-07-1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추리물의 트릭 소재가 거의 사라져버린 현대의 추리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나 할까요..
결론에 가서 보니 정말 충격적이고 대단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