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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창작의 두마리 토끼인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몇 안되는 작가이다. 이 작품 또한 그 경계선을 아슬아슬 건너고 있다. 사실 그런 그가 난 좋다.

한없이 타락해가는 지구, 매번 최악을 경신하는 인류. 그리고 마지막 해결책, 탈출.

이 책은 SF소설이라 할 수 있다. 환상소설이고 공상소설이다. 그런데 지극히 현실적이고 성찰적이다.

`사회적인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친화 경향을 보여주는 두가지 대표적인 예죠. 개미들의 연대와 쥐들의 이기주의. 인간들은 딱 중간이예요. 협력의 법칙이냐, 약육강식의 법칙이냐. 개미들의 법칙이냐 쥐들의 법칙이냐.`

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그 생각이 들었다. 이상적 막스주의의 연대사회와 자유경제 논리의 시장사회.

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 시장 시스템이 가장 완벽한 인간사회 구조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오랜 시간 인류를 지배한 틀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탈출을 모색하는가?

우리는 당연히 생각한다. 개미의 바른 연대의 모습을.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살아간다. 쥐의 약육강식으로.

그런게 인간인 건지, 시스템이 인간을 그렇게 내모는 건지.

`이브는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사과를 하나 주워서 깨물어 먹다가 벌레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다시 뱉고 말았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약간 불쾌하기도 한 자연의 본성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주는 과일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방사선을 쬐고 살충제와 제초제로 뒤범벅이 된 과일만 먹다보니 벌레가 없고, 썩지 않는다고 믿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 사실은 자연은 우리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그런 자연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연은 이제 없다. 자연은 우리 아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 자연 위에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못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가 순수하게 창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자연으로 부터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을 뭉개는건 자신의 어머니의 피를 빨아먹는 것과 같다.

그래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런 자식을 기대한다. 사랑한다. 우리는 언제 철이 들까?

`우리는 최악의 시대에 태어났어. 지금처럼 질병과 폭력이 난무하고 환경오염이 심각했던 적은 없었지.

-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걸? 페스트, 콜레라, 세계 대전, 노예 제도가 있었던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최악의 시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모든 세대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고 다음 세대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어쩌면 결국 상황은 언제나 똑같을지도 몰라. 단지 우리 시대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끔찍하게 생각되는 거지. 그러니까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

그렇다. 우리는 인류역사의 한 순간에 불구하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좁은 시선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우리가 현재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암이라는 병. 예전에는 암은 희귀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암이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이는 병이되어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스스로 죽을병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백신을 발견할쯤 그 병을 대신한 또다른 죽을병을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끝없는 전쟁이 이어가는 것이다. 인류의 끝없는 살육의 전쟁처럼.

*

베르나르는 책을 재미있게 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진지한 이야기를 묻어둔다. 그래서 재밌게 보이는 동시에 생각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와닿을 것들이다. 그래서 난 베르나르를 좋아한다.

이번 작품에 대해 비평가들은 많은 비평을 내놓았다.
종교를 비판하는 신성모독적인 작품이다.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좌파소설이다.
인류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폭로소설이다.
그런 비평에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을했다.
저는 무엇보다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

사실 그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번 작품에 실망한 부분들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극적 상황의 나열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했나?'라는 생각이 문득문득들었다.

어쨌든 그런 소소한 실망감을 주긴 했지만 베르나르의 이번 신작은 그의 명성에 충분히 걸맞는 좋은 작품이고 최근에 주목받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빛날 작품이다.

그는 자연을 안다. 곤충을 사랑한다.

자연은 빈곤한 고갈상태를 얘기하지 않는다. 곤충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상상력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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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한산성/ 김훈> 
 

실현할 수 없는 대의인가?
실현할 수 있는 굴욕인가?
영광스러운 죽음인가?
치욕스러운 삶의 연명인가?

역사 교과서가 먼저 떠오르는 시대적 배경이지만 남한산성 안에서의 말들은 이 시대에도 부딪혀 떠오른다.

상황은 여간해서 좋지 않고 딱히 어쩌지 못하는 궁핍하고 부득이한 대안만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실패의 연속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패배자로 인생을 마감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억하는 승자는 심히 소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망각한 채 성공의 위치에 서 있을거라 확신한다. 그러다 좌절하고 행복을 사치라 여겨간다.

그것이 사실은 보편적인 우리의 삶인데

치욕스러운 역사의 한자락이고 후세의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분개하고 그 당시의 어리석은 왕과 신하들, 사대부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속에 우리는 없다. 과연 우리는 명예로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시대에 따라 역사의 정의는 다르게 변하고 그것은 언제나 다른것이 되고마는 지금이라는 시간 때문이다. 

그때의 치욕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상황의 어쩔 수 없음이 우리의 지금과 맞닿아있음을 가슴으로 느낀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고구려의 강대함만이 아니다. 우리역사를 지배해온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지혜는 결핍에서 오고 영웅은 극한의 상황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역사의 한자락을 쓰고 있는 세대이다.

*

김훈은 궁핍한 한국문단에서 축복같은 존재이다. 그 궁핍이란 대중과 문단 사이의 거리감에서 비롯된 것을 말한다. 문학의 붕괴. 책을 읽지 않는 대중들. 하지만 사실 읽히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그 읽히는 책이란 어딘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책들이다.

김훈의 책은 쉽사리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김훈 특유의 문체와 시적인 묘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생소한 단어가 많은 것도 한몫했다. 사실 생소한 단어 때문에 가장 힘이들었다. 시대적 배경에 맞는 리얼리즘을 일구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젊은 우리세대 즉, 좀 현대적인 작품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마음이지만 김훈을 좋아하는 어린 독자로서 가져보는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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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너 자신을 디자인해라."
어쨌거나...

이 책은 진중권의 객관적인 메스를 이용한 한국인 해부이다. 그래서 불편하게 다가온다. 누가 좋아하겠나? 자기를 분해한다는데. 누군들 숨기고 싶은 것은 있기 마련이니깐.

얼마 전 UN에서 한국에게 권고문이 날라왔다. '단일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자기 동일성 때문이다. 이미 한국엔 외국인이 공식적인 집계로만 100만명이 넘는다. 그렇지만 5000년 역사를 수놓은 단일민족의 자기 정체성이 배타적인 자기 동일성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지나친 소외를 당하는 외국인 이민자들을 보다못한 UN이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만했다.

우리는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걸핏하면 고구려 역사를 대리만족 삼아 현실을 위로하고 그런 대중에 요구에 얼씨구하며 상업적 이용을 즐겨한다.

뿐만아니라 민족주의라는 것을 사랑한다.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당연시 생각한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를 욕하면서 그것이 가능케한 민족주의를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 말에 동의하는가?
한 사람이 잘되면 나라가 산다. 우리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너무 우스운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독재 사회인가?
대중의 존재는 한낱 패배자들의 어쩔 수 없는 계급의 바닥인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대기업이 나라를 먹여살리는 것이 맞다만 그 덕에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이면서 취업이 가장 힘든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엘리트와 패배자의 명확한 선이 있다.

한국엔 중기업이 없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대기업과 이주노동자가 기반이라는 소기업만이 있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대중은 엘리트가 아니므로 대중이다. 우리는 항상 대중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당연히 대중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즉,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교육을 받아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패배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이 이렇게 되면 요리하기는 정말 쉬워진다. 왜냐하면 같은 기회였는데 덜 열심히 했기에 엘리트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놀기만 했는가?

민주주의의 꽃은 대중이다. 하지만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대중은 그걸 망각한 채 그려려니하며 산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우리도 같은 기회였는데 내가 덜 열심히 했지. 다 내탓이지.
대중이 대중이 된다는 것이 왜 수치가 되어야하는가?
모두가 엘리트가 되면 그 엘리트도 대중이 된다.

엘리트가 옷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 옷에 몸을 구겨넣는다. 그 옷이 자신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다르더라도 맞춰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옷이 크다면 열심히 먹어서 맞추려 노력한다. 그 옷이 작다면 굶고 굶어 맞추려 한다. 그런 맞지도 않는 옷은 또 몇벌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더 노력한다. 그리고 거기서 낙오된 대중은 또 패배자가 된다.

맞지도 않은 옷을 만든 엘리트를 뭐라하지 못한다. 게다가 몇 벌 되지도 않은 옷을 만들어 놓고 최선을 다했다는 둥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네,네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기업에 맞춤식 공장이 되고 있는 대학교를 보라. 차라리 대학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공장이라고 하는게 낫겠다. 대중이 주인이 되지 않는 나라에 우리는 그런 민족주의에 사라잡혀 충성을 다할 것을 또 굳게 다짐한다.

진중권은 잔혹하다. 그 덕에 정확한 분석에 가까워 질 수 있다. 어떠한 사회든, 단체든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발전을 이루어 질 수 없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부흥을 이끈 한국교회의 최근 몰락은 그런 자기 반성이 배제되었기에 오게 되었다.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을 누군가가 걸었고 또 누군가가 걸었고 그렇게 계속되어 마침내 길이 된 것이다.

안다면 낯설어도 그곳을 가야한다. 그것이 선구자이고 사명자이다. 결국 모르기 때문에 기만된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리고 극복되어가며 발전해왔다. 지금도 그런 극복이 필요하다.
 
자신을 스스로 디자인하자.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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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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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우리는 잊고 있다. 망각하고 있다. 세대간의 소통이 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해지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있고 북으로는 주적이라는 북한이 서있고 그래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의 쪼개진 땅에서 그냥 그래 산다.

이 책은 북한의 현주소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지금도 북한은 굶어죽어가고 있고 얼마 전 홍수로 또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북한을 우리민족이라 생각하지 않고 북한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을 좌파라 말한다. 그리고 북한이 어서 망해주기를 기다린다. 다들 죽어버리기를 바란다. 여전히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지배 속에 머물고 있다.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북한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 한마디 우리의 주적이다. 그 뿐이다. 그 속에 인간, 북한인은 없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것만이 치욕인가? 서구의 자본주의 아래 지배되어진 어쩔 수없는 이라는 이름의 자의적인 복종이 더 치욕인 것 아닌가? 우리의 부모 세대는 그 굴욕을 되물려주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 덕에 우린 그런 굴욕은 모르게 된다. 왜 이주 노동자를 때리는가? 과거에 우리도 그렇게 맞았었기에? 우리보다 돈 많은 자는 우리보다 잘 사는 자인가? 잘 산다는 게 왜 돈 많다는 의미가 되는가? 오호라 자신의 자의적 행동이라 믿는 그 타의적 배경을 알지 못하니 왜 이렇게 살아야는지 도통 알쏭달쏭해진다.

분명 그 말을 들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기의 노력 여하에 인생의 성공이 달렸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밟고 설 수 밖에 없다. 성공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믿고 있으니깐.

-생존의 의미

마지 못해 사는 사람들과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생존의 이유 따위를 생각하기 보단 습관으로 형성된 삶의 연속이 자신을 이끌어가고
한국은 어느새 하루에 33.5명이 자살을 하는 세계 최고의 자살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잘 산다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최적화된 미의 형상에 맞추어 칼질을 하고
웃으며 뒤를 케내는 지혜를 발휘하여 몸 값을 불려가고
그러면서 외롭다고 자살하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가장은 한다고 하지만 결국 술을 먹고 와서 마누라를 패고
마누라는 그런 그를 한 때 사랑했던 자신마저 미워하고
자식들은 그런 가정을 명량하게 학교에 보고하고
그러면서 외롭다고 자살하고

-예수

자신의 빰을 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 빰도 내어주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기억하는 신자는 없고
우수한 종족의 우수한 종교가 되어버린 그들은 예수를 그럴듯하게 이용하고
지금껏 자신이 해온 것은 잊은채 참다 폭발한 그들을 향해 자신은 피해자인척하며 밟아주고 
그렇게 괴상한 재판은 결국 괴상한 원인과 결과를 낳고
그리고 아멘.

-세계 경영과 자본주의

우리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소수의 지도자가 있고 다수의 대중이 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결국 대중이 힘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대중이 존재하지 않으면 지도자는 의미가 없다. 잘못 세워 놓은 건물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가 만든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지도자를 뭐라고 해야하지 않나? 왜 우리는 그런 것은 잊고 오로지 그 잘못된 건물에 스스로를 맞춰가는가? 그 건물이 적으면 우리는 서로를 밟고 발버둥을 치고. 그러니 대중은 기만 당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주 노동자를 괴롭히는가? 그들이 사악한 사람들이라서? 멍청해서? 그들의 처절한 삶이 전염될까봐? 가뜩이나 일자리가 없는데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가서?

그들은 3D업종에 종사한다. 우리는 그일을 안한다. 누구보다 나는 잘난 사람이니깐. 그리고 그래야하는거니깐.

우주에서 본 지구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외계인들은 지구를 방문한다. 그러나 정작 착륙은 하지 않는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를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난도질하며 별 이유없이 서로를 죽인다. 그리고 살아남는 자가 착한 사람이 된다. 착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화해

지긋지긋하다. 그만해도 될텐데. 결코 싸움엔 끝이란건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끝을 얘기해줄 뿐이다. 그런데 그 싸움은 도대체가 누가 하는거냐? 누가 시키는 거냐? 너는 지금도 싸우고 있지만 왜 싸우는지 알고나 싸우는 거냐?

행복이란 건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싸움의 승리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닌건데
우리는 홀린듯 죽을 때까지 싸운다.

*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참 마음에 든다. 황석영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젊은이들에게도 읽히고 또 많이 팔리고 있다. 향단에선 그런 황석영을 비판한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책을 내놓고는 팔리는 것으로 인정받는다고.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예술이란 항상 작품성과 오락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락성이 높아졌다고 즉, 팔린다고 작품성은 낮아졌다고 치부하는 건 억지다. 그러면 오락성이 없는 작품이 가장 작품성이 높은 작품이란 말인가? 그것은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가장 힘든건 그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다. 이 작품은 결코 작품성이 낮지 않다. 짜임새 있는 구성이 작품의 계기성과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시대성과 본질성 또한 공존한다. 물론 이전의 작품에 비해 쉬운 작품이다. 하지만 쉽게 읽힌다고 그것이 가벼운 작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솔직해지지 않으려는걸까? 단순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나?
실은 진리는 단순하기 마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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