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너 자신을 디자인해라."
어쨌거나...

이 책은 진중권의 객관적인 메스를 이용한 한국인 해부이다. 그래서 불편하게 다가온다. 누가 좋아하겠나? 자기를 분해한다는데. 누군들 숨기고 싶은 것은 있기 마련이니깐.

얼마 전 UN에서 한국에게 권고문이 날라왔다. '단일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자기 동일성 때문이다. 이미 한국엔 외국인이 공식적인 집계로만 100만명이 넘는다. 그렇지만 5000년 역사를 수놓은 단일민족의 자기 정체성이 배타적인 자기 동일성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지나친 소외를 당하는 외국인 이민자들을 보다못한 UN이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만했다.

우리는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걸핏하면 고구려 역사를 대리만족 삼아 현실을 위로하고 그런 대중에 요구에 얼씨구하며 상업적 이용을 즐겨한다.

뿐만아니라 민족주의라는 것을 사랑한다.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당연시 생각한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를 욕하면서 그것이 가능케한 민족주의를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 말에 동의하는가?
한 사람이 잘되면 나라가 산다. 우리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너무 우스운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독재 사회인가?
대중의 존재는 한낱 패배자들의 어쩔 수 없는 계급의 바닥인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대기업이 나라를 먹여살리는 것이 맞다만 그 덕에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이면서 취업이 가장 힘든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엘리트와 패배자의 명확한 선이 있다.

한국엔 중기업이 없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대기업과 이주노동자가 기반이라는 소기업만이 있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대중은 엘리트가 아니므로 대중이다. 우리는 항상 대중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당연히 대중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즉,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교육을 받아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패배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이 이렇게 되면 요리하기는 정말 쉬워진다. 왜냐하면 같은 기회였는데 덜 열심히 했기에 엘리트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놀기만 했는가?

민주주의의 꽃은 대중이다. 하지만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대중은 그걸 망각한 채 그려려니하며 산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우리도 같은 기회였는데 내가 덜 열심히 했지. 다 내탓이지.
대중이 대중이 된다는 것이 왜 수치가 되어야하는가?
모두가 엘리트가 되면 그 엘리트도 대중이 된다.

엘리트가 옷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 옷에 몸을 구겨넣는다. 그 옷이 자신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다르더라도 맞춰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옷이 크다면 열심히 먹어서 맞추려 노력한다. 그 옷이 작다면 굶고 굶어 맞추려 한다. 그런 맞지도 않는 옷은 또 몇벌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더 노력한다. 그리고 거기서 낙오된 대중은 또 패배자가 된다.

맞지도 않은 옷을 만든 엘리트를 뭐라하지 못한다. 게다가 몇 벌 되지도 않은 옷을 만들어 놓고 최선을 다했다는 둥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네,네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기업에 맞춤식 공장이 되고 있는 대학교를 보라. 차라리 대학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공장이라고 하는게 낫겠다. 대중이 주인이 되지 않는 나라에 우리는 그런 민족주의에 사라잡혀 충성을 다할 것을 또 굳게 다짐한다.

진중권은 잔혹하다. 그 덕에 정확한 분석에 가까워 질 수 있다. 어떠한 사회든, 단체든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발전을 이루어 질 수 없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부흥을 이끈 한국교회의 최근 몰락은 그런 자기 반성이 배제되었기에 오게 되었다.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을 누군가가 걸었고 또 누군가가 걸었고 그렇게 계속되어 마침내 길이 된 것이다.

안다면 낯설어도 그곳을 가야한다. 그것이 선구자이고 사명자이다. 결국 모르기 때문에 기만된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리고 극복되어가며 발전해왔다. 지금도 그런 극복이 필요하다.
 
자신을 스스로 디자인하자.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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