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 (피아) 4집 - Waterfalls
피아 (Pia) 노래 / 예당엔터테인먼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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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피아 - "Waterfalls"(07)

피아의 변신은 성공적임을 알 수 있다. 감성의 랩 메탈 스타일을 버리고 멜로디 중심의 곡을 만들던 전작의 방향성은 이번 앨범 역시 이어진다. 그리고 변화의 시도에만 그친 전작과는 달리 이번 앨범은 설득력 있는 좋은 곡으로 앨범을 채워 넣었다.

첫 싱글 컷 된 ‘Black Fish Swim’은 하드록 적 색채가 짙어 보이면서도 신시사이저의 절묘한 하모니로 멜로디의 강점도 살려준다. 다채로운 소품을 늘어놓은 듯한 ‘Masquerade Parade’는 다양한 이펙트를 이용해 거칠면서도 유쾌한 곡으로 완성됐다. ‘Juicy Crasher’는 가장 속도감 있는 곡으로 공연 때 더욱 빛을 발할만한 곡이다. 명쾌한 멜로디와 리듬감을 자랑하는 ‘The New Axis’도 좋다.

그리고 이번 앨범의 특징 중 하나는 건반을 대폭 수용했다는 부분이다. 앨범을 구성하면서 프린스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건반의 활용으로 드러난다. ‘Golden Flower’와 ‘Leaving Wonderland’에서의 건반 플레이는 참 매력적이다. 만약 이 곡들에 건반이 없었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곡이 되었겠는가. ‘Galaxy’ 역시 건반과 멜로디의 하모니가 귀를 끌어당긴다. 자신의 팬들에게 선사하는 듯한 ‘The Oracle’도 피아가 얼마나 멜로디적인 밴드가 되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피아의 변신에 많은 팬들이 의아해하고 실망스러워 했지만(그들이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버렸기에) 이번 앨범을 통해 피아의 변화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된다.

추천강도: ★★★☆(3.8점)
추천트랙: Black Fish Swim, Masquerade Parade, Juicy Crasher

07.10.15 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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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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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활/ 톨스토이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말년에 쓰여 진 책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작품은 18 세기 후반(1898-1899년)에 발표 된 작품인데 21세기에 살고 있는 내게도 크게 와 닿았다. 그래서 고전, 대작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그러한 기독교적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기독교와 내가 지금 이 사회에서 접하고 있는 기독교는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

기독교의 사상은 사랑과 평등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며 누구도 위, 아래가 없이 서로 평등하다고 했다. 또한 그러므로 같은 형제, 자매로서 서로 사랑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이 곧 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활"의 주인공인 네플류도프는 그런 기독교 사상을 잘 대변해보인다. 그는 권력의 한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는 젊은 날의 과오로 인해 한 여자를 타락시킨다. 그리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영혼은 부활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 과정에서 권력층의 부패와 사회 구조적 문제를 꿰뚫어 보고 비판한다. 물론 그 비판의 잣대는 기독교적인 사상 즉, 성경에서 비롯된다. 현 한국교회에서 상실해버린 부분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초대교회를 본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대교회의 물질관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시스템은 사회주의의 것과 비슷하다. 물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의 개념이 더 크다. 초대교회의 시스템의 본질은 공동체이다. 조건적 공동체는 유기적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보자. 우리는 지금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시장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평등이 그 근본 원칙이다. 하지만 그 앞에 왜 자유가 붙었는가? 그건 자본시장과 관련이 있다. 즉, 모두가 자유롭게 시장의 원리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그럴 사하고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우리의 시스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자본가는 돈을 더 벌고 노동자는 결국 거기서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점점 규제가 없어지며 자유롭게 시장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건 결국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벌어주기 위한 시스템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한 예로 한 노동자가 아주 열심히 돈을 벌어 1억 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고 하자. 원래 부자였던 한 자본가가 노동자와 같은 회사의 주식을 100억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본가가 심심해서 100억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다. 그러면 그 회사 주식은 폭락하고 노동자의 1억 원은 사라진다. 대신 심심해서 옮긴 그 100억을 받은 회사는 주식이 폭등한다. 곧 쉽게 자본가는 돈을 더 불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예는 아주 극단적인 것이지만 이 극단적인 예를 우리는 쉽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즉, 이 시장경쟁 시스템은 결코 평등한 것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그렇다. 기득권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고 이용한다. 그곳에 양심이 자리할 데는 없다. 그냥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당화 할 뿐이다.

이 작품의 네흘류도프는 그러한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놀라움을 준다. 그는 그의 특권을 포기한다. 그 힘은 신앙에 있고 기독교적 양심에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중세 시대의 시스템과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중세 시대의 계급과 계층을 보며 참 한심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는 참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류 계급이 아니야 라며 스스로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있는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보면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본 아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자본은 권력층의 손에 쥐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육 이데올로기의 힘과 옛날보다 발달한 문명 속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기평가에 불과하다.

한국은 곧 대선을 치른다. 개인적으로 주목한 후보가 있는데 그가 이명박 후보이다. 그는 항상 자신은 대통령 후보이기 전에 교회 장로라고 한다. 또한 그는 사업가이기 전에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교회 장로이기 전에 정치인이고 기독교 신앙인이기 전에 사업가이다. 그의 대선 공약은 평등과 다분히 거리가 있다. 그가 대변하는 공약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보수적 경향의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사업과의 교묘한 교착 점의 모습이다. 장로인데 성경을 안 본 것인가? 돈으로 장로가 되었나? 그것 참 신기하다. 성경을 모르는 장로라니.

교회가 성경 본질을 빗겨 나간 채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영 방식에 물들다 보니 양들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 교회가 건물로만 성장하고 영적인 고갈 상태는 돈으로 메워 간다. 대형교회가 둘로 쪼개어지고 소형교회를 흡수하고 성도들의 평행적 이동이 일상적인 것이 되고 십자가는 점점 커지는데 예수는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다. 영적 상태가 아닌 양적 팽창이 부흥의 잣대가 되는 지금의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의 비위에 맞추는 말씀만 전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쓴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의 부활은 결국 진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톨스토이는 양심의 소리가 곧 신의 소리라고 했다 - 말씀을 통해) 실천함으로(그 실천이 물질을 비롯한 많은 손해와 어려움을 주었지만 - 참회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수 있게 했다.) 부활에 이를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 시대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자신의 것을 놓음에 있다. 쥐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손을 외면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 권력이나 돈,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보자.

추천강도 ★★★★☆(4.8점)

07.10.31 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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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저학년 명작 도서관 2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메리 램.이광웅 엮음, 베른하르트 오버딕 그림 / 예림당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템페스트 - 셰익스피어>


* 과제를 목적으로 한 글쓰기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리뷰상품에는 어린이용 템페스트로 되어있지만 실제로 읽은 템페스트는 완역본임을 밝힌다.




 세계의 고전, 세계의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어보라고 한다. 그래야지 언젠가는 우리도 그러한 문학 수준에 도달하여 세계 문학의 반열에 들 수 있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한다. 소위 말하는 세계문학의 대표작품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질적 수준에 도달해있다. 톨스토이의 "부활"과 김진명의 "코리아 닷컴"은 분명 질적 수준의 차이를 드러낸다. 고전은 인간 본연의 본질적 사유를 통찰해냈기에 시대를 극복하고 지금에도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양적인 부분에 대해서이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세계문학은 사실 서구문학이라고 말해도 큰 어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세계문학은 터무니없이 한정적인 시야에서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해 본다면 마치 축구에서 공격수만 11명을 뽑고는 세계 올스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공격수만 11명을 뽑아서 시합을 한다면 결코 강팀이 될 수 없다. 축구는 공격수 뿐 만 아니라 미들필드와 수비수 그리고 골키퍼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지 진짜 축구팀이 된다. 그들이 세계 최고라도 공격수만으로는 제대로 된 축구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두루 포함해야만 한다. 그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문학의 선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는 분명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따지고 본다면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허점을 드러낸다. 세계문학의 양적 선정에 있어서 서구 중심주의가 물려 있다면 질적인 부분 또한 그렇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고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템페스트"에서 그는 시야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오리엔탈리즘을 고려하여 읽었기에 그렇겠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인식을 전혀 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는 몇 몇 친구들이 이 작품이 왜 오리엔탈리즘 적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처음엔 너무 의아스러웠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을 때 계속 오리엔탈리즘을 염두 하면서 읽었다. 또한 오리엔탈리즘,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배웠다. 그랬기에 그러한 시각에서 읽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나도 그러한 공부와 인식 없이 읽었다면 친구들처럼 단순히 화해의 주제만을 포착하여 희극적 결말에 이른 작품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작품의 큰 그림은 화해이다. 동생의 배신으로 공작 지위를 빼앗긴 프로스페로는 다시 금 그 지위를 회복하고 자신을 배신했었던 동생이지만 용서하여 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나폴리의 왕의 아들과 맺으면서 왕과의 갈등도 해소시킨다. 심지어는 그의 정령이던 에이리엘까지 해방시켜준다. 그런데 잠깐, 그의 정령이라니. 에이리엘은 그의 정령이 아니었다. 원래 정령의 주인은 캘리밴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화해에서 배제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추악하게 생긴 야만인이라는 캘리밴의 인물 설명은 끝까지 유효하게 간다.

 프로스페로가 동생의 배신으로 공국에서 쫓겨나 딸과 함께 겨우 당도한 곳이 어떠한 무인도이다. 하지만 그 섬은 프로스페로가 생각할 때 무인도이지 사실 무인도가 아니었다.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가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서구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드러난다.

 과거 내가 중학생일 때(고등학생 때는 세계사를 배우지 않았다) 항상 의아했던 부분이 아메리카의 신대륙 발견과 그 개발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그곳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배움이었다). 내가 배워서 이미지화한 아메리카의 개척은 이러하였다. 유럽에서 넘어온 인간과 아메리카에서 살고 있던 아주 극소수 부족들(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고 느껴지도록 배웠다)과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가르침과 문명의 발전이었다. 게다가 이런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게기가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과 개척에 관한 어떠한 책(만화였음)을 학원에서 읽었었는데 거기서는 아메리카 부족들이 모두 식인종으로 나왔다. 그래서 인질로 잡힌 유럽인을 구출하고 싸움에서 유럽인들이(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유럽인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나와 같은 편으로만 생각되어진 것이다) 승리함으로 나 역시 같은 승리감에 도취되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또 하나 황당한 것은 학원에 비치되었던 책이라는 것이다. 그 책은 함께 그 학원을 다녔던 많은 학우들이 함께 읽었다. 아마도 그 친구들도 대부분은 나와 같이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 선생님은 그 책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라도 그런 교육적인 만화를 보라고 권하였다.  




 이 작품에서 보여 지는 오리엔탈리즘의 중심에는 캘리밴이 있다. 여기서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는 동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그 섬은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나라 혹은 국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작품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데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는 요정을 다루고 마술을 부렸다. 이것은 당시 서구가 생각했던 동양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당도했던 섬 역시 서구의 눈에만 신대륙이다. 캘리밴에게 그 섬은 낯설 수가 없는 땅이다.

 프로스페로는 이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신비로움을 빼앗아 이용했기에 결국 화해의 지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은인과도 같은 캘리밴과 그의 관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으로 보여준다. 사실 캘리밴은 그 섬의 임금이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그가 임금이라는 것은 마치 부산역의 노숙자가 사실은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듯이 표현해 놓고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화해는 단지 서구 나라들 안에서의 갈등과 화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서구의 어떠한 나라가 갈등에 의해서(혹은 뒤쳐져버려서) 동양의 다른 국가를 침범하여 그 갈등을 극복해내는 것으로 보였다. 즉, 식민지 사업을 통해서 다시 회복해내는 것이다. 캘리밴은 그 섬의 임금이었지만 프로스페로에 의해서 종이 되고 그 섬의 자원과 기술들은 모조리 빼앗겨 프로스페로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프로스페로는 다시 지위를 회복해낸다.

 여기서 재미난 것이 또 하나있다. 우리는 근대화를 이룩하면서 서구의 것들을 무분별하게 예찬하고 받아들여 왔다(그렇지 않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미미하였다). 그래서 서구가 만들어놓은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 또한 그렇게 당연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스페로가 그의 지위를 되찾게 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캘리밴의 마술이었고 정령이었다. 그것은 결코 서구의 것이 아니다. 동양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기술이 있고, 장점들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것들이 최고라는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장점들을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서구 중심적인 마인드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 사실 말로 하자면 간단하다. 서구의 것이 전적으로 좋고 우수하고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깨부수면 된다. 그래서 서구의 좋은 것만을 배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좋은 것들을 계승하면 된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서구중심의 생각을 깨부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러한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이 당연하게 그것도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말았을까? 우리가 자라오면서 직접 바라본 서구의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하지만 우리는 이 역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매체에 의해서 재구성된 이미지를 본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요인은 교육에 있다고 본다. 앞에서 학원 이야기를 했었지만 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교육은 명백히 서구 중심적인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그것에 대한 진실 된 언급을 해준 선생님 역시 한명도 없었다. 그 교육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진리라고 믿었던 교육에 대한 의심은 꼭 필요하다. 돌아보면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의 최전방에 역사와 교육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극복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과제가 남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서구의 좋은 것이며 무엇이 서구의 나쁜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란 의문이 생긴다. 이것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보아왔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미리 예상하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즉, 연구하고 논의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와 논의는 당연시되어 온 것들에 대한 의심과 다르게 생각하기가 함께 이행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금까지 지배해온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템페스트"를 통해서 서구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문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 유익하였다.

07.10.18 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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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 3집 나무로 만든 노래
이적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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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 나무로 만든 노래 (07)>

 

개인적으로 이적을 너무 좋아했기에 이번 앨범에 대한 기대 역시 크게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앨범이 발매되었고 그와 함께 난 그의 음악을 오디오에 오디오는 내게 울려주었다.

 

아쉽다.

자신이 원했기에 이러한 앨범을 만들었겠지만 아쉽다. 곡은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물론 각 트랙을 쪼개어 본다면 상당히 양질의 곡들이긴 하지만 훅이 없다. 단지 지나친 조숙함에 따른 따분함을 느낀다. 이적이 이적답고 이적의 힘을 실어주었던 훅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나?

 

패닉 4집의 이런 경향의 곡들, 그러니깐 정류장, 추방, 로시난테, 눈 녹듯, 길을 내 와 비교해 보아도 이번 앨범의 곡들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번 앨범 단지 지금까지 그의 앨범에 이런저런 많은 퓨전적 곡들로 인해 앨범 자체적 획일성을 뚜렷이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해결한 정도에 불구하다. 그런데 그 역시도 그다지 와 닿지가 않는다. 짜임새가 좋다고 그 앨범이 좋은 앨범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결국 앨범을 살려주는 건 그 안에 들어있는 곡들이니깐.

 

내가 기대했던 실험적인 곡이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보컬만 빼버리면 이적 앨범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평범해진 음악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 앨범 과연 그의 전작에 비해 성장한 것이 있다면 그건 뭘까?

 

 

추천트랙: 다행이다, 어떻게, 비밀, 내가 말한 적 없나요

추천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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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in Park - Minutes To Midnight [Digipack]
린킨 파크 (Linkin Park) 노래 / Warner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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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in Park  - Minutes to Midnight (07)

 

이 앨범 드디어 라는 말을 해도 될 것이다. 린킨파크가 4년 만에 3번째 정규 앨범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실 이 앨범을 꽤 오래 들었다. 그러나 손쉽게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이 앨범엔 린킨파크가 없어보였다.

물론 처음에 들었을 땐 말이다. 그만큼 황당한 앨범이었다.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극단적인 변화라고 말해도 될듯하다. 기존의 냄새가 나는 곡은 이번 앨범에선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차원의 하이브리드라고 해야할까?

 

인트로 곡인 'Wake'를 지나면 필자가 이번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 'Given Up'이 나온다. 'No More Sorrow'와 함께 본 작에서 가장 헤비한 곡이다. 사실 이 두 곡 이외에는 헤비한 곡이 없다.

발라드 풍의 'Leave Out All The Rest', 'Shadow Of The Day', 'Valentine's Day'의 곡들이 이들의 변화를 확연히 보여준다.

파티 풍의 곡이지만 가사는 상당히 살벌한 'Bleed It Out' 첫 싱글 컷되어 모덕락 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What I've Done' 그리고 시노다의 랩이 가장 두드러진 곡 'Hands Held High'이 이어진다. 후반부 트랙에선 시노다가 전면적인 보컬로 등장하는 'In Between'이 나오고 린킨파크 초유의(?) 기타솔로가 담겨있는 'In Pieces' 마지막으로 가장 극적 구성을 취하고 있는 'The Little Things Give You Away'를 끝으로 앨범이 끝이난다.

 

이번 앨범 괜찮다고 평하고 싶다. 멜로디의 충실함이 곡들의 매력을 살려준다. 기존의 헤비한 사운드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못지않은 부분들을 새롭게 채워 넣었다. 체스터가 이번 앨범에 대해 "펑크와 클래식 락, 힙합비트가 뒤섞인 앨범"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들을 린킨파크의 하이브리드로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헤비한 사운드를 중심으로 이런 변화를 모색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지만 이들의 괜찮은 변화를 환영한다.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해도 될 듯하다.

 

추천강도: ★★★☆

추천트랙: Given Up, What I've Done, No More Sorrow, In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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