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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ㅣ 저학년 명작 도서관 2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메리 램.이광웅 엮음, 베른하르트 오버딕 그림 / 예림당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템페스트 - 셰익스피어>
* 과제를 목적으로 한 글쓰기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리뷰상품에는 어린이용 템페스트로 되어있지만 실제로 읽은 템페스트는 완역본임을 밝힌다.
세계의 고전, 세계의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어보라고 한다. 그래야지 언젠가는 우리도 그러한 문학 수준에 도달하여 세계 문학의 반열에 들 수 있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한다. 소위 말하는 세계문학의 대표작품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질적 수준에 도달해있다. 톨스토이의 "부활"과 김진명의 "코리아 닷컴"은 분명 질적 수준의 차이를 드러낸다. 고전은 인간 본연의 본질적 사유를 통찰해냈기에 시대를 극복하고 지금에도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양적인 부분에 대해서이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세계문학은 사실 서구문학이라고 말해도 큰 어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세계문학은 터무니없이 한정적인 시야에서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해 본다면 마치 축구에서 공격수만 11명을 뽑고는 세계 올스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공격수만 11명을 뽑아서 시합을 한다면 결코 강팀이 될 수 없다. 축구는 공격수 뿐 만 아니라 미들필드와 수비수 그리고 골키퍼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지 진짜 축구팀이 된다. 그들이 세계 최고라도 공격수만으로는 제대로 된 축구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두루 포함해야만 한다. 그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문학의 선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는 분명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따지고 본다면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허점을 드러낸다. 세계문학의 양적 선정에 있어서 서구 중심주의가 물려 있다면 질적인 부분 또한 그렇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고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템페스트"에서 그는 시야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오리엔탈리즘을 고려하여 읽었기에 그렇겠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인식을 전혀 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는 몇 몇 친구들이 이 작품이 왜 오리엔탈리즘 적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처음엔 너무 의아스러웠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을 때 계속 오리엔탈리즘을 염두 하면서 읽었다. 또한 오리엔탈리즘,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배웠다. 그랬기에 그러한 시각에서 읽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나도 그러한 공부와 인식 없이 읽었다면 친구들처럼 단순히 화해의 주제만을 포착하여 희극적 결말에 이른 작품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작품의 큰 그림은 화해이다. 동생의 배신으로 공작 지위를 빼앗긴 프로스페로는 다시 금 그 지위를 회복하고 자신을 배신했었던 동생이지만 용서하여 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나폴리의 왕의 아들과 맺으면서 왕과의 갈등도 해소시킨다. 심지어는 그의 정령이던 에이리엘까지 해방시켜준다. 그런데 잠깐, 그의 정령이라니. 에이리엘은 그의 정령이 아니었다. 원래 정령의 주인은 캘리밴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화해에서 배제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추악하게 생긴 야만인이라는 캘리밴의 인물 설명은 끝까지 유효하게 간다.
프로스페로가 동생의 배신으로 공국에서 쫓겨나 딸과 함께 겨우 당도한 곳이 어떠한 무인도이다. 하지만 그 섬은 프로스페로가 생각할 때 무인도이지 사실 무인도가 아니었다.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가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서구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드러난다.
과거 내가 중학생일 때(고등학생 때는 세계사를 배우지 않았다) 항상 의아했던 부분이 아메리카의 신대륙 발견과 그 개발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그곳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배움이었다). 내가 배워서 이미지화한 아메리카의 개척은 이러하였다. 유럽에서 넘어온 인간과 아메리카에서 살고 있던 아주 극소수 부족들(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고 느껴지도록 배웠다)과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가르침과 문명의 발전이었다. 게다가 이런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게기가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과 개척에 관한 어떠한 책(만화였음)을 학원에서 읽었었는데 거기서는 아메리카 부족들이 모두 식인종으로 나왔다. 그래서 인질로 잡힌 유럽인을 구출하고 싸움에서 유럽인들이(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유럽인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나와 같은 편으로만 생각되어진 것이다) 승리함으로 나 역시 같은 승리감에 도취되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또 하나 황당한 것은 학원에 비치되었던 책이라는 것이다. 그 책은 함께 그 학원을 다녔던 많은 학우들이 함께 읽었다. 아마도 그 친구들도 대부분은 나와 같이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 선생님은 그 책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라도 그런 교육적인 만화를 보라고 권하였다.
이 작품에서 보여 지는 오리엔탈리즘의 중심에는 캘리밴이 있다. 여기서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는 동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그 섬은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나라 혹은 국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작품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데 캘리밴과 그의 어머니는 요정을 다루고 마술을 부렸다. 이것은 당시 서구가 생각했던 동양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당도했던 섬 역시 서구의 눈에만 신대륙이다. 캘리밴에게 그 섬은 낯설 수가 없는 땅이다.
프로스페로는 이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신비로움을 빼앗아 이용했기에 결국 화해의 지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은인과도 같은 캘리밴과 그의 관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으로 보여준다. 사실 캘리밴은 그 섬의 임금이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그가 임금이라는 것은 마치 부산역의 노숙자가 사실은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듯이 표현해 놓고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화해는 단지 서구 나라들 안에서의 갈등과 화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서구의 어떠한 나라가 갈등에 의해서(혹은 뒤쳐져버려서) 동양의 다른 국가를 침범하여 그 갈등을 극복해내는 것으로 보였다. 즉, 식민지 사업을 통해서 다시 회복해내는 것이다. 캘리밴은 그 섬의 임금이었지만 프로스페로에 의해서 종이 되고 그 섬의 자원과 기술들은 모조리 빼앗겨 프로스페로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프로스페로는 다시 지위를 회복해낸다.
여기서 재미난 것이 또 하나있다. 우리는 근대화를 이룩하면서 서구의 것들을 무분별하게 예찬하고 받아들여 왔다(그렇지 않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미미하였다). 그래서 서구가 만들어놓은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 또한 그렇게 당연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스페로가 그의 지위를 되찾게 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캘리밴의 마술이었고 정령이었다. 그것은 결코 서구의 것이 아니다. 동양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기술이 있고, 장점들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것들이 최고라는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장점들을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서구 중심적인 마인드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 사실 말로 하자면 간단하다. 서구의 것이 전적으로 좋고 우수하고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깨부수면 된다. 그래서 서구의 좋은 것만을 배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좋은 것들을 계승하면 된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서구중심의 생각을 깨부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러한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이 당연하게 그것도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말았을까? 우리가 자라오면서 직접 바라본 서구의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하지만 우리는 이 역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매체에 의해서 재구성된 이미지를 본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요인은 교육에 있다고 본다. 앞에서 학원 이야기를 했었지만 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교육은 명백히 서구 중심적인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그것에 대한 진실 된 언급을 해준 선생님 역시 한명도 없었다. 그 교육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진리라고 믿었던 교육에 대한 의심은 꼭 필요하다. 돌아보면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의 최전방에 역사와 교육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극복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과제가 남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서구의 좋은 것이며 무엇이 서구의 나쁜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란 의문이 생긴다. 이것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보아왔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미리 예상하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즉, 연구하고 논의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와 논의는 당연시되어 온 것들에 대한 의심과 다르게 생각하기가 함께 이행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금까지 지배해온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템페스트"를 통해서 서구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문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 유익하였다.
07.10.18 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