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활/ 톨스토이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말년에 쓰여 진 책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작품은 18 세기 후반(1898-1899년)에 발표 된 작품인데 21세기에 살고 있는 내게도 크게 와 닿았다. 그래서 고전, 대작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그러한 기독교적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기독교와 내가 지금 이 사회에서 접하고 있는 기독교는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
기독교의 사상은 사랑과 평등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며 누구도 위, 아래가 없이 서로 평등하다고 했다. 또한 그러므로 같은 형제, 자매로서 서로 사랑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이 곧 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활"의 주인공인 네플류도프는 그런 기독교 사상을 잘 대변해보인다. 그는 권력의 한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는 젊은 날의 과오로 인해 한 여자를 타락시킨다. 그리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영혼은 부활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 과정에서 권력층의 부패와 사회 구조적 문제를 꿰뚫어 보고 비판한다. 물론 그 비판의 잣대는 기독교적인 사상 즉, 성경에서 비롯된다. 현 한국교회에서 상실해버린 부분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초대교회를 본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대교회의 물질관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시스템은 사회주의의 것과 비슷하다. 물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의 개념이 더 크다. 초대교회의 시스템의 본질은 공동체이다. 조건적 공동체는 유기적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보자. 우리는 지금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시장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평등이 그 근본 원칙이다. 하지만 그 앞에 왜 자유가 붙었는가? 그건 자본시장과 관련이 있다. 즉, 모두가 자유롭게 시장의 원리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그럴 사하고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우리의 시스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자본가는 돈을 더 벌고 노동자는 결국 거기서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점점 규제가 없어지며 자유롭게 시장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건 결국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벌어주기 위한 시스템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한 예로 한 노동자가 아주 열심히 돈을 벌어 1억 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고 하자. 원래 부자였던 한 자본가가 노동자와 같은 회사의 주식을 100억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본가가 심심해서 100억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다. 그러면 그 회사 주식은 폭락하고 노동자의 1억 원은 사라진다. 대신 심심해서 옮긴 그 100억을 받은 회사는 주식이 폭등한다. 곧 쉽게 자본가는 돈을 더 불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예는 아주 극단적인 것이지만 이 극단적인 예를 우리는 쉽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즉, 이 시장경쟁 시스템은 결코 평등한 것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그렇다. 기득권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고 이용한다. 그곳에 양심이 자리할 데는 없다. 그냥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당화 할 뿐이다.
이 작품의 네흘류도프는 그러한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놀라움을 준다. 그는 그의 특권을 포기한다. 그 힘은 신앙에 있고 기독교적 양심에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중세 시대의 시스템과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중세 시대의 계급과 계층을 보며 참 한심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는 참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류 계급이 아니야 라며 스스로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있는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보면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본 아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자본은 권력층의 손에 쥐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육 이데올로기의 힘과 옛날보다 발달한 문명 속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기평가에 불과하다.
한국은 곧 대선을 치른다. 개인적으로 주목한 후보가 있는데 그가 이명박 후보이다. 그는 항상 자신은 대통령 후보이기 전에 교회 장로라고 한다. 또한 그는 사업가이기 전에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교회 장로이기 전에 정치인이고 기독교 신앙인이기 전에 사업가이다. 그의 대선 공약은 평등과 다분히 거리가 있다. 그가 대변하는 공약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보수적 경향의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사업과의 교묘한 교착 점의 모습이다. 장로인데 성경을 안 본 것인가? 돈으로 장로가 되었나? 그것 참 신기하다. 성경을 모르는 장로라니.
교회가 성경 본질을 빗겨 나간 채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영 방식에 물들다 보니 양들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 교회가 건물로만 성장하고 영적인 고갈 상태는 돈으로 메워 간다. 대형교회가 둘로 쪼개어지고 소형교회를 흡수하고 성도들의 평행적 이동이 일상적인 것이 되고 십자가는 점점 커지는데 예수는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다. 영적 상태가 아닌 양적 팽창이 부흥의 잣대가 되는 지금의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의 비위에 맞추는 말씀만 전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쓴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의 부활은 결국 진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톨스토이는 양심의 소리가 곧 신의 소리라고 했다 - 말씀을 통해) 실천함으로(그 실천이 물질을 비롯한 많은 손해와 어려움을 주었지만 - 참회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수 있게 했다.) 부활에 이를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 시대의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자신의 것을 놓음에 있다. 쥐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손을 외면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 권력이나 돈,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보자.
추천강도 ★★★★☆(4.8점)
07.10.31 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