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소니픽쳐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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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신작 <<로아나>>를 통해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로아나>>의 작중 화자는 그를 기억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필사적으로 가기를 꺼려했던 고향집도 서슴없이 갈 수 있었다. 화자의 부인은 그와의 잠자리를 유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잘 수는 없지요.”라고. 기억을 소실한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었다. 영화 <본아이덴티티>의 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실체는 분명 지금에 있지만 기억이 없기에 불안해한다. 기억이 없는 그는 스스로도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하고 묻는다. 이 영화는 사람이 죽은 뒤 영원한 시간의 공간으로 가기 전에 머물게 되는 ‘림보’에서의 1주일을 담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죽은 자는 최선의 기억을 선택하게 된다. 그 외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기에 쉽게 정하지 못하지만 대부분은 기일에 맞춰 선택을 한다. 어릴 적 오빠에게 받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췄던 순간을 선택한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딸의 결혼식을 선택한 할아버지도 있고 태어 난지 5개월 되었을 때 받은 햇살의 기억을 선택한 남자도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한다.

 반면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하며 끝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림보에서 일을 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그렇게 선택을 하지 않고 머물게 된 자들이었다. 그 중 모치즈키는 우연히 그의 약혼녀 남편을 만나게 되고 약혼녀가 선택한 행복의 순간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의 기억에 존재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영원한 시간의 공간으로 떠나려 한다. 그를 사랑하고 있던 시오리는 이제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리지만 그는 림보에 머물던 시간을 선택하면서 이곳에서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고 설득하며 떠나게 된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어쨌든 그 순간을 제외한 모든 기억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새롭게 림보의 일꾼이 된 젊은 청년의 선택하지 않음으로 책임지는 삶.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였으며 나라는 존재가 소멸되지 않게 하려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책임이었다.

 행복한 순간이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불행하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있어야 가능하다. 행복한 순간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일 수 없다.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처럼 행복은 그것을 조명해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각도는 순간의 기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모치즈키는 과거의 여인에 의해 자신의 행복이 좌우되었다. 약혼녀가 그 순간을 선택했듯이 그도 그 순간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리라. 그의 행복은 그녀의 선택의 결과에서 나온 인정받음에 있었다. 약혼녀의 행복의 기억 속에 존재한 그는 스스로의 자신은 아니었던 셈이다. 모치즈키는 타인의 행복 속에 있었다는 안도감에 자신이 실제 머물러 있는 림보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랬기에 시오리를 남겨둔 채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애에 기억할 만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신이 그 사람의 행복의 대상자가 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의 정체성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기억이든 고립되고 말 것이다. <<로아나>>의 화자가 찾는 것은 기억이지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찾는 행위이다. <본아이덴티티>의 본도 마찬가지다. 본의 불안은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아무리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더라도 그 행복의 순간만이 기억이 난다면 불안해 질 수 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은 순간의 기억에서 완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행복의 순간을 떠올려 촬영을 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영원의 세계로 갔지만 그들은 곧 불안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행복의 기억에 ‘나’(의 정체성)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참고자료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최상희(필름2.0)
<당신이 느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리뷰걸(무비스트)
<원더풀라이프>,cineart (http://cineart.tistory.com/)

추천강도 ★★★☆

08.10.09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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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重慶森林) [HD 텔레시네] (dts)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임청하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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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1994)

- 사랑이 앞으로 가야할 길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현대인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현대에 사랑이 소비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는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현재를 보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 보여준다. 


 100일 빵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한 쌍의 연인이 100일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주위의 친구들이 축하해주면서 각자 100원짜리 동전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100일 동안 이 연인이 깨지지 않고 버틴 것에 대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념일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22땡, 33땡, 심지어는 럭키세븐 땡도 있다. 럭키세븐 땡은 진도의 완성이라고 하는 섹스에 이르는 시기(1주)로 보는데 이후 계속 갈지 그만 둘지를 고민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처럼 현대인의 사랑은 점점 빠르고 짧게 소비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연애 대상자의 연령이 낮을수록 더욱 그렇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빠르게 소비되는 현대인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젊은 경찰관인 233호는 실연을 당한다.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은 그녀를 대신할 수 있을 만한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가 다니던 패스트푸드 점의 메이라는 여종업원도 그가 빠르게 낚지 못했기에 놓치고 말았다. 이후 옛 애인이 좋아하던 파인애플 캔을 1달 간 사먹으며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그를 살펴보면 그는 그다지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저 맛있게 먹어치운다. 서른 번째 파인애플 캔을 구입한 5월1일 옛 애인에게 자신은 파인애플 캔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벼운 간식거리인 파인애플이 그들의 사랑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조깅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조깅은 5월1일이 되어서야 한다. 단지 소비된 사랑에 대한 자기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마약밀매 중계인으로 나오는 노란 가발 연인에 대한 그의 사랑도 지극히 소비적이다. 그가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는 이 술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연인을 사랑하겠다는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이 말은 그녀가 누구였든지 상관없이 사랑을 소비해 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녀가 쉬러가자고 했을 때 그는 그녀가 진짜 쉬자는 의미였는지 몰랐다고 고백한다. 없으면 허전해서 구입하게 되는 물건처럼 사랑도 그렇게 현물 취급되는 현대인의 사랑을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전한다.



 지난 주말 절친한 친구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그는 <<꿈꾸는 다락방>>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이 책에 따르면 자신의 소망을 간절히 꿈꾸면 그것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글로 써서 구체화하면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어느 작가가 그렇게 하여 늙은 나이에 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상형과 똑같은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고 책에 적혀있다고 했다. 그는 그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줄거리를 아주 상세하고 디테일하게 말해주었다. 그의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에 불과한데 실제처럼 믿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오늘의 현실 속 여자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곁에서 지금도 맴돌고 있는 그 여자를 그는 도무지 보질 못한다.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을 살지 못하는(의식적으로) 남녀가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경찰 633은 실연을 한다. 그 후 그는 옛 애인에 대한 그리움 속에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가상의 미래 속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가 오늘을 사는 방법은 오늘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사랑하는 소녀인 아비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여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옛 애인의 흔적을 지워간다. 하지만 그는 오늘이 아닌 과거와 미래 속에 살기에 오늘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아비 역시 오늘이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비는 미래 속에 산다. 그래서 그는 오늘을 직시하지 못한 채 몽유인처럼 사는 것이다. 이는 633이 현실로 돌아와 아비의 존재를 깨닫고 아비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오히려 아비가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정하고 떠나면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후 영화는 1년 뒤 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영화의 마지막은 또다시 헤어져야 함을 암시하지만 만약 이들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게 됐다면 그 헤어짐은 슬픈 것이 아닐 것이다. 없는 미래가 오늘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는 문법상으로만 존재 할 뿐 이라고 한다. 그는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라고 하며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라고 하였다. 633과 아비와의 위태롭고 애처로운 사랑의 빗나감은 이러한 착각하는 시간 개념 속에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 친구 주위를 맴돌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 여자를 그가 보기 까지는 얼마나 걸릴지를 생각해 보았다. 영화 속에서처럼 1년이 필요할 수도 있겠고 더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현대의 속도감에 치여 그 여자는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경삼림>>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해 두 번 꼬집는다. 첫째는 현대의 빠른 속도감 속에 사람의 사랑도 현물이 되어버림을 보여준 것이고 둘째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치르는 오늘을 보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20세기 후반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21세기가 된지도 오래다. 문명의 속도는 더욱 빨라져 연애 역시 그런 속도감 속에서 현물로 소비되고 있고 그 정도는 더 심화되었으며 현실을 망각하는 도시의 몽유인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은 우선 현물이 되어버린 사랑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랑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만큼은 느리게 가질 때 가능하다. 또한 과거와 미래 속에서 살아 이미 없거나 아직 없는 것에 묻혀버릴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직시하고 그 주변을 살펴 서로를 쳐다볼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중경상림>>의 꼬집음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추천강도 ★★★☆


08.10.01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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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기타 (DVD)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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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군인의 행복은 도피에 있다.


 군복무 2년 동안 핵심적으로 배우는 두 가지는 사람을 잘 죽이는 방법과 평화를 위한 군복무라는 이데올로기적 정신교육이다. 군인으로서 탁월하다는 것은 적군을 잘 무찌른다는 뜻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의지나 삶과는 무관하게 국가가 적으로 간주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그 미덕으로 삼는다는 말이 된다. 나는 군복무를 하면서 평화유지를 위함이라는 변명적인 사명을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훈련을 했고 의심과 회의를 방지하기 위한 철저한 정신교육 속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리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군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군 전역을 하고 2년이 흐른 뒤 영화 <지중해>를 보며 그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지중해>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이탈리아가 전투 거점 확보를 위해 에게해의 미기스티라는 작은 섬을 점령하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한다. 이 작은 그리스 영토에 몬티니 중위와 로루소 상사, 그리고 6명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작은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이미 이곳의 군인들이 독일인에 의해 끌려가 무방비 상태였기에 힘들이지 않고 섬을 점령하게 된다. 그 와중 이곳에 이르게 한 함선이 침몰되고 무전기 또한 고장이 나는 바람에 이들은 섬에 고립된다. 본부와의 연락조차 두절된 상태에서 이들은 섬에 융화되어 간다. 터키인이 왔을 때도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투표를 통해 섬에 계속 남기로 한다. 이후 3년을 지내고 우연히 불시착한 병사에 의해 전쟁의 종료를 알게 되고 그제야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된다.


 <지중해> 속에 나오는 군인들은 행복해한다. 물론 부인에 대한 그리움에 섬을 떠난 병사도 있었지만 대게는 섬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터키인이 왔을 때도 그들은 그대로 섬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곳에는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서로를 죽이는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명령이 없었다. 국가나 혹은 권력에 의한 강압적 힘이 작용할 수 없었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고 삶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나와 그 사람과의 이해관계가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에 처절하고 비참하며 절망적이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모든 도피자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라고 했다. 영화 속 군인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흔히 링컨이 근대 국가를 정의했다고 평가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와 국민으로서의 국가가 그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은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임에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을 작동시키는 건 국가이고 그 수법은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 만들기이다. 이런 일에 계속 동의하게 된다면 결코 군인의 행복은 오지 않게 된다. 군인의 행복은 도피에 있다. 모든 군인이 이 도피에 참여할 때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고 인류의 평화가 올 것이다.



추천강도 ★★★★

08.09.26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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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퀀시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데니스 퀘이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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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퀀시>>

-프리퀀시는 허상이다.



 비슷한 내용을 우려먹는데도 잘 팔리는 책이 자기 계발서이다. 자기 계발서가 잘 팔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든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런 욕구에 자기 계발서는 특별한 비법을 알려주는 듯 접근해온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는 일종의 희망고문서이다. 그 이유는 그 서술이 철저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꿈꾼다(<<꿈꾸는 다락방>>)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계발서는 수 없이 많은 실패 사례는 배제한 채 특수한 성공담만을 모아 보편적인 양 사기를 친다.


 영화 <<프리퀀시>>도 이런 희망고문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현재의 ‘나’가 30년 전 과거의 아버지와 교신을 하게 됨으로 아버지의 운명과 나아가 현재의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영화이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며 드라마틱하다. 우선 사고로 죽었어야 하는 아버지를 살리게 된다. 이로 인해 미래는 바뀌게 되고 또 다른 위기가 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나이팅 게일 사건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다. 그것을 다시 막기 위해 어머니를 살리려는 노력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팅 게일 사건의 피해자가 더 많아지게 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일들을 벌이면서 여러 위기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결국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과거의 아버지는 현재의 나를 실제로 만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에 몰입하면서 관객은 해피엔딩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나아가 그것을 포함한 가족애에서 비롯되는 일이고 악의 상징인 나이팅 게일 사건에 대한 승리를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물리는 수많은 위기도 그 간절함에 한 몫 더하게 된다. 영화는 관객들의 바람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주인공은 영화의 처음과는 확연히 처지가 다른 만족스러운 엔딩을 갖게 된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이야기지만 영화 밖 현실에 살고 있는 관객의 처지에선 그렇지 못하다. 이런 식의 시공간을 초월한 방법론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고 그것을 바꿔보려 한들 과거는 바뀌어주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당한 수준의 시나리오를 가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SF오락영화이다. 그렇기에 나의 이런 비평은 다소 우스운 일 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쓴 건 간절한 해피엔딩 이후 현실 속 나에게로 돌아오는 일종의 배신감 때문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노력이 가상하고 감동적이어서 열심히 응원했다. 또한 그 속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함께 투영되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절대벽’으로의 환상으로 대리만족의 희망고문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자기 계발서가 잘 팔린다. 그 속에는 (허상의) 꿈과 희망을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그 문제의 실체를 직면하고 대안적 논의를 하는 인문사회 서적은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실을 직면한 영화는 외면당하고 그저 대리만족의 희망고문이 허상으로 대중을 위로한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 과거로의 회귀에 ‘프리퀀시(자주 일어남, 빈번)’라고 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실체를 빈번(frequency)히 흐리는 대상을 제대로 쳐다봐야 지금의 ‘나’의 삶이 바뀔 것이다.



추천강도 ★★★☆

2008.09.29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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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세계사 사계절 1318 교양문고 5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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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주경철의 <<문화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세계사의 진실을 향한 문화로 읽기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추모식이 아니다. 과거가 없는데 현재가 있다는 것은 오류다. 역사는 오늘의 ‘왜’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가능케 한다.

 인류는 숨 가쁘게 오늘에 온 것 같지만 실은 천천히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와 지금에 왔다. 지금껏 우리가 접한 세계의 역사는 숨 가쁠 수밖에 없었다. 암기 속 세계사는 그렇게 압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압축은 철저히 선택과 배제의 원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암기가 아니라 시대의 이해이고 그 이해의 바탕은 왕조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절대 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그 속 개인의 삶이다.

 

 이 책은 세계사를 문화사적으로 접근했다. 그랬기에 시대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다소간 떨어져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화는 도리어 낯설게 하기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의 교육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특별한 매력은 역시 재미이다. 이 재미가 가능한 이유는 이해로의 접근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해적 접근은 문화의 구체적 조명 덕분이다. 이 책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선사한다. 또한 이러한 구체적 사료는 낯설게 하기에 대한 설득력을 더하여주며 새로운 진실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피상적으로 익혀왔던 세계사를 구체적 조명을 통해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는 그 낯설음이 재미가 되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을 뒤트는 것, 그리고 단순히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조명하여 그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요소들이다. 이 책이 수 없이 많은 세계사 관련 책 중 단연 돋보이는 이유는 진짜에 대한 갈망과 그 접근의 현실적인 노력 덕분이다.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해 쓰여 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친절하며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책의 피상적 모습이지 그 내용의 수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난 척 으스대는 어른들에게 더 신선한 낯설음을 선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움에 나이의 정도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세계사적 사전 지식이 미비한 나의 빈약한 지식 때문 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과와 문과 그 사이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공부를 못한 탓에 제도권 속 지식의 미비함이 아쉽게 다가왔다. 아마 그런 총체적 세계사 그림을 그린 상태에서 봤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세계사라고 하면 골머리를 섞이는 학생들이나 세계사에 나름 자신이 있으신 분들 모두 읽어보면 좋을 만한 책이다. 세계사는 문명의 계보와 왕조의 계보가 다가 아니다. 그 사회를 지배한 문화가 오히려 역사의 진실에 근접할 가능성을 가져다준다. 문화는 그 사회의 거울이 되고 사람들의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추천강도 ★★★☆
독서 난이도 ★★☆

08.08.25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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