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소니픽쳐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 생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신작 <<로아나>>를 통해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로아나>>의 작중 화자는 그를 기억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필사적으로 가기를 꺼려했던 고향집도 서슴없이 갈 수 있었다. 화자의 부인은 그와의 잠자리를 유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잘 수는 없지요.”라고. 기억을 소실한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었다. 영화 <본아이덴티티>의 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실체는 분명 지금에 있지만 기억이 없기에 불안해한다. 기억이 없는 그는 스스로도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하고 묻는다. 이 영화는 사람이 죽은 뒤 영원한 시간의 공간으로 가기 전에 머물게 되는 ‘림보’에서의 1주일을 담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죽은 자는 최선의 기억을 선택하게 된다. 그 외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기에 쉽게 정하지 못하지만 대부분은 기일에 맞춰 선택을 한다. 어릴 적 오빠에게 받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췄던 순간을 선택한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딸의 결혼식을 선택한 할아버지도 있고 태어 난지 5개월 되었을 때 받은 햇살의 기억을 선택한 남자도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한다.

 반면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하며 끝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림보에서 일을 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그렇게 선택을 하지 않고 머물게 된 자들이었다. 그 중 모치즈키는 우연히 그의 약혼녀 남편을 만나게 되고 약혼녀가 선택한 행복의 순간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의 기억에 존재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영원한 시간의 공간으로 떠나려 한다. 그를 사랑하고 있던 시오리는 이제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리지만 그는 림보에 머물던 시간을 선택하면서 이곳에서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고 설득하며 떠나게 된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어쨌든 그 순간을 제외한 모든 기억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새롭게 림보의 일꾼이 된 젊은 청년의 선택하지 않음으로 책임지는 삶.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였으며 나라는 존재가 소멸되지 않게 하려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책임이었다.

 행복한 순간이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불행하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있어야 가능하다. 행복한 순간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일 수 없다.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달처럼 행복은 그것을 조명해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각도는 순간의 기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모치즈키는 과거의 여인에 의해 자신의 행복이 좌우되었다. 약혼녀가 그 순간을 선택했듯이 그도 그 순간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리라. 그의 행복은 그녀의 선택의 결과에서 나온 인정받음에 있었다. 약혼녀의 행복의 기억 속에 존재한 그는 스스로의 자신은 아니었던 셈이다. 모치즈키는 타인의 행복 속에 있었다는 안도감에 자신이 실제 머물러 있는 림보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랬기에 시오리를 남겨둔 채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애에 기억할 만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신이 그 사람의 행복의 대상자가 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의 정체성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기억이든 고립되고 말 것이다. <<로아나>>의 화자가 찾는 것은 기억이지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찾는 행위이다. <본아이덴티티>의 본도 마찬가지다. 본의 불안은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아무리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더라도 그 행복의 순간만이 기억이 난다면 불안해 질 수 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은 순간의 기억에서 완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행복의 순간을 떠올려 촬영을 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영원의 세계로 갔지만 그들은 곧 불안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행복의 기억에 ‘나’(의 정체성)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참고자료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최상희(필름2.0)
<당신이 느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리뷰걸(무비스트)
<원더풀라이프>,cineart (http://cineart.tistory.com/)

추천강도 ★★★☆

08.10.09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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