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퀀시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데니스 퀘이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프리퀀시>>

-프리퀀시는 허상이다.



 비슷한 내용을 우려먹는데도 잘 팔리는 책이 자기 계발서이다. 자기 계발서가 잘 팔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든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런 욕구에 자기 계발서는 특별한 비법을 알려주는 듯 접근해온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는 일종의 희망고문서이다. 그 이유는 그 서술이 철저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꿈꾼다(<<꿈꾸는 다락방>>)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계발서는 수 없이 많은 실패 사례는 배제한 채 특수한 성공담만을 모아 보편적인 양 사기를 친다.


 영화 <<프리퀀시>>도 이런 희망고문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현재의 ‘나’가 30년 전 과거의 아버지와 교신을 하게 됨으로 아버지의 운명과 나아가 현재의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영화이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며 드라마틱하다. 우선 사고로 죽었어야 하는 아버지를 살리게 된다. 이로 인해 미래는 바뀌게 되고 또 다른 위기가 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나이팅 게일 사건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다. 그것을 다시 막기 위해 어머니를 살리려는 노력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팅 게일 사건의 피해자가 더 많아지게 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일들을 벌이면서 여러 위기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결국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과거의 아버지는 현재의 나를 실제로 만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에 몰입하면서 관객은 해피엔딩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나아가 그것을 포함한 가족애에서 비롯되는 일이고 악의 상징인 나이팅 게일 사건에 대한 승리를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물리는 수많은 위기도 그 간절함에 한 몫 더하게 된다. 영화는 관객들의 바람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주인공은 영화의 처음과는 확연히 처지가 다른 만족스러운 엔딩을 갖게 된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이야기지만 영화 밖 현실에 살고 있는 관객의 처지에선 그렇지 못하다. 이런 식의 시공간을 초월한 방법론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고 그것을 바꿔보려 한들 과거는 바뀌어주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당한 수준의 시나리오를 가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SF오락영화이다. 그렇기에 나의 이런 비평은 다소 우스운 일 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쓴 건 간절한 해피엔딩 이후 현실 속 나에게로 돌아오는 일종의 배신감 때문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노력이 가상하고 감동적이어서 열심히 응원했다. 또한 그 속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함께 투영되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절대벽’으로의 환상으로 대리만족의 희망고문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자기 계발서가 잘 팔린다. 그 속에는 (허상의) 꿈과 희망을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그 문제의 실체를 직면하고 대안적 논의를 하는 인문사회 서적은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실을 직면한 영화는 외면당하고 그저 대리만족의 희망고문이 허상으로 대중을 위로한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 과거로의 회귀에 ‘프리퀀시(자주 일어남, 빈번)’라고 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실체를 빈번(frequency)히 흐리는 대상을 제대로 쳐다봐야 지금의 ‘나’의 삶이 바뀔 것이다.



추천강도 ★★★☆

2008.09.29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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