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쓴 프롤로그에도 나온 글이지만 '사과'하면 떠오르는 연관어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브', '애플', '뉴턴'을 떠올렸다. 이 책의 저자도 그랬던 것 같다. '이브', '파리스', '빌헬름 텔', '뉴턴', '백설 공주', '폴 세잔', '앨런 튜링', '애플' 이렇게 8가지 사과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 듯하다.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과는 그렇게 역사적 사건들의 동기가 되어주었다. 다만 여덟 가지 각각의 사과들은 동일한 의미의 사과가 아니다.
수다한 종교적 전통에서 언급되지만, 이브가 먹은 사과는 특별히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시선에서 죄의 시작이자, 인간에게 신과의 단절,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 '악한 과일'의 대명사다. 하지만 이 사건이 기술된 어떤 성격에도 '이브의 사과'라 불릴 만한 단도직입적인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로부터 이브가 직접 금지 명령을 듣는 장면도, 심지어 '사과'라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브의 사과'가 금단의 열매를 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규정된 결과 역사는 어디로 흘렀을까?(17쪽)
신화일지라도 수 세기에 걸쳐 입으로 전해지고, 기록으로 남고, 문화로 이어오면서 '역사'로 새겨진다. 영원의 세계에서 인간의 역사로 들어오는 순간에도 사과는 등장한다. '파리스의 사과'는 영원에서 지상으로 다시 영원으로 이어지면서, 멸망이 사라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남은 자들에 의해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는 생명의 순환을 품고 있다.(53쪽)
알프스산맥의 자연 풍광만큼 인간의 자유를 아름답게 여긴 스위스의 탄생 역사 또한 사과를 선택했다. 이 서사에서 사과가 등장하는 장면은 매우 짧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역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네덜란드, 프랑스를 거쳐 독일 및 스위스까지 유럽을 관통하며, 10~20세기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천 년의 시간을 따라 장구하게 펼쳐져 있다.(93쪽)
뉴턴 이후의 시대는 수학 및 과학 이론으로 '인간의 세계'를 밝혔다. 과학은 근대성 의미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서양 문화를 구별해 주는 중추로 성장했다. 더구나 과학적, 기술적 권능은 제국의 팽창과 다른 민족의 정복을 돕고 합리화한 이론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뉴턴의 사과는 인간 세상을 신으로부터 독립시킨 또 다른 선악과였다.(133쪽)
지난날의 시대적 요구가 아이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읽힌다면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떤 꿈이 자라날까?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생채기를 낼까? 여전히 예쁘디예쁜 공주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왕자가 되어야만 하는 삶이어야 할까? 그보다 각자 좋아하는 분야를 맡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남녀를 떠나 사람으로서 함께하는 그런 마음이 담긴 '사과'를 <백설 공주>에서 읽는다.(171쪽)
그가 살았던 시대, 아니 그가 살아냈던 시대. 태어난 지 몇 년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이어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그를 냉전과 인류 공멸의 위협은 마지막까지 옥죄였다. 세상의 외진 곳에서 그는 시대적 문제를 해결했고, 전쟁의 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의 천재적인 능력과 재능은 인간의 역사를 인공지능의 시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곁에는 비밀을 알고 있는 '튜링의 사과'가 놓여 있었다.(255쪽)
애플의 사과는 현재까지 인류 역사가 선택한 마지막 사과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애플은 산업사회에서 잊힌 '사람'과 실용에 묻힌 '아름다움의 가치'를 새롭게 살리려 시도했다. 그리고 이성에 감성을, 시각에 촉각을, 절대에 상대를, 남성상에 여성상을 더하고 통합하려는 시각을 제시했다. 애플이 제시한 비전이 실제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