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상드르 자르뎅의 <아내처럼 멋진 드라마는 없다> (까치, 1994)를 읽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대부분의 소설, 영화, 연극은 미지의 대상(소년, 소녀, 유부남, 유부녀)에 대한 눈멀음을 내용으로 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모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정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상상도 하지 못할 튀는 행동을 자주 벌인 탓에 얼룩말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 소설의 주인공 가스파르 소바주는 아직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험난하기 그지 없는 사랑을 하기로 한다. " ... 그러나 결혼생활 15년 만에 자신의 아내를 재정복한다는 것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유혹의 천재라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얼룩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스탕달, 그리고 그 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재정복이라는 주제에 접근하기를 꺼렸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은행의 소파에 앉아 가끔씩 들춰보는 여성지식으로 말하자면, 권태기 극복 정도나 될 얼룩말의 아내 재정복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처럼 활기차고 우습다. 각 방 쓰기에서부터 익명인을 가장한 편지 쓰기, 가짜로 바람피우기, 자살소동 등등. 아내의 관심을 끌고 연애 시절의 정열을 복원하기 위한 남편의 노고는 그러나 카미유의 넌더리를 사고 끝내는 아내로부터 별거를 당하고 만다. 까닭은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취미가 다름 아닌 "19세기 연애소설"을 읽는 일. 다시 말해 아내에게 사랑은 육체의 것이라기보다 영혼의 소유였던 것이다. 2년에 걸친 별거 끝에 얼룩말은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게 되고, 사랑이 영혼의 문제였던 만큼 아내는 육체가 쇠진해가는 남편에게로 돌아온다.
아내를 재정복하기 위해 얼룩말에겐 죽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은 비극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겐 후일담이 없지만, 못 말리는 얼룩말은 "나는 나의 과부를 유혹"할 거라며 사후의 책략을 짠다. 즉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얘기. 소설의 말미에 작가는 아마추어 발명가이기도 했던 얼룩말의 아내 재정복이 어떤 종류의 보상심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 얼룩말은 운명의 큰 줄기가 그려지고, 완성되거나 끊어지는 마흔다섯 살에 참혹한 실패감을 느꼈다. 그 나이에 "자신은 셰익스피어나, 베토벤이나, 간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재주가 없는 것을 인정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서로 괴롭히기보다는 사랑을 가꾸어가는, 부부생활을 자신의 걸작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부부가 이루어내는 화음, 영원한 교향곡, 로맨틱한 나날들. 모나리자를 그려 인류를 즐겁게 하는 대신에, 아내의 마음에 드는 인생에 근접하는 무형의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얼룩말은 살아생전 예술가로서의 자기성취를 완벽히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끝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준다: "... 까미유는 그들 부부의 모험을 글로 써볼 결심을 했다. 그녀는 이렇게 가스파르의 무형의 작품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