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교사가 아이를 변화시킨다

                                                            이영미 ( 대구 경상여중 교사 )  
                                                             E-mail: rhea84@hanmail.net

    얼마 전 모 방송의 인터뷰에서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할 때 가장 중심에 두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믿음과 칭찬’이라고 했더니 “너무 교과서적인 것이 아니냐”는 아나운서의 반문을 받았다. 나는 참으로 작은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남다른, 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교육철학은 없다. 다만 그 아나운서의 말처럼 너무나 교과서적인, 그러나 정말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그 아이들을 ‘칭찬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한다.


   믿음은 그렇다 치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여유’라니?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칭찬이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칭찬 받을 거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학생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시선과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여유로움’이 아닐까 한다. 그 여유로움의 저변에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많은 아이들이 내게 그런 여유와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지만 그 중 다영이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몇 해 전 아이들의 저축을 거두어 관리하는 일을 하는 회계을 했었던 다영이.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스스로 입후보하게 하고, 선거를 통해 학급 간부를 뽑는데, 다영이는 회계에 지원했고 아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회계 일을 맡게 되었다. 다영이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연설 대신 인기 가수의 흉내를 냈고 아이들 대부분은 그 노래와 춤에 매혹되어 다영이에게 표를 준 것이리라.


   “그 아이에게 절대 돈은 맡기지 마세요.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요. 아마 좋아라 하고 그 돈 들고 가출해 버릴 걸요. 1학년 때 가출에 싸움에 사고를 몇 번이나 쳤는지 몰라요.” 다영이가 저축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말에 많은 선생님들이 걱정해 주시며 하신 말씀이다.


   “돈을 선생님께 맡길 필요 없어. 그 일은 전적으로 다영이의 일이야. 선생님의 일을 네가 대신 해주는 것도, 조금 도와주는 것도 아니야. 저축을 거두고 대장을 정리하고 그 돈을 몇 시간 보관하고 있다가 수납하는 일까지 모두 너의 일이야. 다른 반처럼 돈을 선생님 서랍에 보관해 준다던가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 않길 바래. 왜냐하면 그 일은 네 일이니까.” “그러다 잃어버리면요? 적은 돈이 아니에요. 칠십만 원이 넘어요.”


   “네가 책임져야지.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잖아. 그리고 회계 일은 네가 한다고 했고 아이들은 너를 믿었기 때문에 너를 선택한 거고.” “믿기는요. 다른 애들하고 다르게 춤추고 노래하고 하니까 재미 삼아 뽑아 준 거죠. 저 자신 없어요. 잃어버릴지 모르잖아요.”


   “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만 해? 잘해낼 수도 있잖아. 다영이는 나중에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 거라며? 지금부터 돈 관리하는 거 배워 두면 좋잖아. 넌 아마 정말 돈을 잘 버는 사업가가 될 거야. 선거 때 선생님은 알아 봤지. 남이 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 모두 사업가로서의 자질이지.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꼭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 바로 책임감과 믿음이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거든. 다영이는 그 두 가지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선생님이 눈으로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장담은 못하겠구나. 친구들의 저축을 관리하면서 그것들을 보여준다면 좋겠어. 네게 맡겨진 일은 끝까지 네가 책임지는 거. 그러면서 네 꿈인 사업가로서의 능력도 키워가고 말이야.”


   나는 겁이 난다며 내미는 돈이 든 가방을 다영이 손에 쥐어 교실로 돌려보냈고, 정말 다영이는 1년 동안 내 입에서 ‘저축’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게 회계로서의 일을 잘해 냈다. 정보고등학교를 나와 올해 사회 초년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다영이가 보내 온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의 널 믿어, 라는 말. 정말 무섭던데요. 한 번도 그렇게 철저하게 저를 믿어 준 사람은 없었거든요. 가끔 그 돈 들고 나가 펑펑 쓰고 싶다는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 믿음 깨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참을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저 보고 사업가가 될 자질이 보인다고 칭찬해 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장래 희망 적는 곳에 사업가라고 적고 칭찬 받은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지금은 비록 옷가게 점원이지만 언젠가는 내 가게를 가진, 진짜 사업가가 될 거예요. 사업가가 되기 위해 공부 잘해야 사업가가 된다고, 인문계 고등학교 가고 대학 가야 한다고, 성적 올리라고 혼내지 않으셔서 고마웠습니다. 대신 성격이 시원해서 꼭 사업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칭찬에 너무 기뻐서 울 뻔했던 거 아직도 생생해요. 손님들도 저보고 시원시원해서 장사하면 잘하겠다는 말 자주 한답니다.”



   ‘저축 관리를 잘한 다영이는 그 후 학교 생활도 잘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적도 오르고…….’이런 글은 쓰지 못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영이는 그 후 성적이 별로 오르지도 않았고 가끔 학생과에 불려 가는 일도 있었고 내가 다영이에게 기대한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다만 그 일로 다영이가 얻은 ‘세상에 대한 믿음’,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나를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줄 수 있는 교사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다영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교육개발원 발행(2003월 10월 3주)
  
                                   주간교육정책포럼의 글중에서 옮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