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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 저자
소설 '공터에서'를 쓴 김훈 작가는 한국일보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후 시사저널, 한겨레 신문 등에서도 일했다. 신문사 퇴사 후 전업 소설가로 살아온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내 젊은 날의 숲', '남한산성', '흑산', '강산무진', '자전거 여행' 등을 쓰며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책을 읽은 이유
김훈 작가님의 책은 처음 독서를 시작했을 무렵 '자전거 여행'을 통해 알게 됐다. '자전거 여행'은 읽은 지도 꽤 오래 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작가님의 문체만큼은 정말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이후에 나온 책이라면 모두 구매했을 정도다. 이번에 나온 소설인 '공터에서' 역시 책의 내용보다는 김훈 작가님의 작품이기에 구매를 했고 역시나 예상보다 더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 줄거리
김훈 작가의 '공터에서'는 마 씨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마동수과 그의 아들 마장세, 마차세까지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모습을 담았다. 일제시대 만주 일대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마동수가 겪은 파란만장한 세월과 해방 이후 찾아온 혼란과 한국 전쟁, 군부 독재 시절의 폭압적인 분위기,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죽음, 언론통폐합, 급속한 근대화와 함께 찾아온 자본의 물결까지 한 시대의 다양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소설 '공터에서'를 쓴 김훈 작가의 아버지 역시 소설 속 마동수와 비슷한 시기에 살다가 사망했다. 이에 김훈 작가는 자신의 그동안 생각했던 이야기를 소설에 담은 듯 공감 가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마동수와 아버지가 떠난 후 남은 아들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과거 아버지, 어머니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 느낀 점
김훈 작가의 소설 '공터에서'를 읽다 보면 역시나 그의 문장력에 감탄이 나온다. 문장 하나 하나 놓칠 것이 없으며 그의 적나라하면서도 강렬한 표현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질 정도였다. 시대의 풍파를 몸소 겪었던 아버지 마동수의 삶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인 마장세가 머나먼 이국땅에 살며 한국에 잠시 오더라도 가족을 만나지 않은 이유,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직접 찾아가지 않고 동생 마차세에게 돈만 보내주는 모습은 한편으론 불쌍하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핵심 인물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차세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뒤늦게 찾아온 그리움들을 일상 속에서 하나둘 발견하고 생전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전쟁 통에서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아내 박상희를 만나면서 가정을 이루고 자기 또한 아버지가 되어 가는 모습에서 나 역시 아버지가 됐을 때에 어떠한 마음이 들게 될 지 곰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 '공터에서'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한편으론 강렬하게 다가온다. 최근 들어 국내 문학 쪽으로 책을 많이 읽지 않았었는데 김훈 작가님을 통해 국내 소설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어 한동안은 그의 책들을 자주 찾을 것 같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마동수가 죽던 해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박정희는 5, 6, 7, 8, 9대 대통령을 지냈다. 박정희는 심장에 총알을 맞고 쓰러져서, '괜찮다. 나는 괜찮아'라고 중얼거렸다. 마동수의 죽음과 박정희의 죽음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관련이 없다. 마동수의 생애에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 7
마지막 날숨이 빠져나갈 때 마동수의 다리가 오그라졌다. 마동수는 모로 누워서 꼬부리고 죽었다. 외출에서 돌아와서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마차세는 아버지의 꼬부라진 육신을 보고 죽음을 직감했다. 아버지의 사체는 태어처럼 보였다. 죽은 육신의 적막은 완강했다. 돌이킬 수 없고, 말을 걸 수 없었다 - 9
병자의 성기는 까맣게 퇴색해서 늘어졌고 흰 터럭 몇 올이 남아 있었다. 사타구니 언저리에는 검버섯이 돋아났고 고환 껍질에 습기가 차 있었다. 이 성기가 어머니와 섹스해서 나를 잉태시킨 그 성기인가. 그 두 남녀가 섹스를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섹스는 그저 생리 현상일 수도 있으므로, 그런 의문은 성립될 수 없을 터이지만 아버지의 사타구니에 내려앉은 검버섯을 보면서 마차세는 의문의 절벽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을까 - 28
박상희의 목소리는 늘 비음이 섞여 있었다. '휴가 나왔니?'라고 말할 때 '니?'가 코 속에서 울렸다. 코 속이 아니라, 몸속의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니?'는 말하는 사람의 몸속을 통과해 나온 물기로 젖어 있었다. 박상희의 '니?'를 그림으로 그리자면 물 위에 번지는 동심원이 되겠지. 그 동그란 파문이 전화선을 타고 와서 마차세의 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니?'는 동부전선 산악 고지와 서울 간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서 마차세를 '니?' 앞으로 몰아세웠다 - 34
마차세는 관 옆에서 붙어 서서 입관을 지켜보았다. 죽은 아버지의 얼굴은 말을 걸 수 없어 적막했고, 거기에 아무런 삶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은 자의 얼굴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자의 대책 없는 무책임 속에서 편안해 보였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죽어서 더 이상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고, 부대끼거나 쓸리지 않게 된 것에 안도했다. 그 안도감은 마차세가 어렸을 때, 술 취해 잠든 아버지를 보고 느낀 안도감과 같은 것이었다 - 44
이도순은 벽 쪽에서 돌아누워서 울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과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부딪치면서 울음이 뒤틀렸다. 입 밖으로 세어 나온 울음이 몸속에 쟁여진 울음을 끝어냈다. 몸 밖의 울음과 몸 안의 울음이 이어져서 울음은 굽이쳤고, 이음이 끊어질 때 울음은 막혀서 끽끽거렸다. 그 울음은 남편과 사별하는 울음이 아니라, 울음으로써 전 생애를 지워버리려는 울음이었으나 울음에 실려서 생애는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몸속에 저렇게 맹렬한 폭발성 에너지가 쌓여서 조용한 일상이 되어왔던 어머니의 생애를 마차세는 짐작할 수 없었다 - 46
마동수의 죽음은 조간신문에 1단 기사로 실렸다. 마동수의 동지들이 그의 죽음을 신문사에 알렸다. 기사는, 고인이 1930년대의 상해에서 반식민 반제국의 선전 활동에 종사했고 임정의 외곽 조직에서 공연 단체를 조직해서 민족자결의 문예운동을 전개했다고, 모호한 어휘를 엮어놓고 있었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죽음이 신문 기사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신문은 마동수의 영정 사진을 싣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날 낳았구나, 마차세는 신문에서 눈을 돌렸다 - 51
어머니 아버지, 그 소리는 자음이 없이 모음만으로 울리는 듯싶었다. 소리가 헤어날 수 없는 주술이 되어서 사람을 결박하는 힘을 마동수는 느꼈다. 그 주술의 힘은 아버지, 어머니의 'ㅓ' 모음과 'ㅣ' 모음 속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이 주술의 사슬은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모음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마동수는 알지 못했다 - 76
이 세상이 삭막하고 따분한 까닭은 이 뽕나무 밭에서 벌어지는 소유와 결핍,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시간 속에 축적되고 공간 속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라면서 하춘파는 인생하기지리호(인생은 왜 이리도 지리한가!)라고 일곱 글자를 써서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포르투갈 노인에게 팔았다 - 77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가 배에서 배로 이어지면서 바다 위로 흘러갔다. 아이고는 저마다의 몸 안에 갇혀 있던 폭발물처럼 터져 나왔다. 선단은 남항했고, 아이고는 해풍에 실려 북으로 흘렸다. 이도순은 남편이 배에 탔는지 알 수 없었다. 수송선 철문이 닫힐 때 문짝에 끼었다가 헌병의 곤봉에 맞아 물 위로 떨어진 사내가 남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남편은 아기를 업고 있었는데, 그 사내도 등에 무언가를 지고 있었다. 북청이는 의식이었는데, 첫 아이가 태어나서 피 냄새를 풍길 때 이도순은 그 습속에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도순의 신랑은 상고를 나왔고 금융조합 서기 보조원이었으므로 딸 가진 아낙들은 이도순의 혼인을 부러워했다. 배 안에서,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 100
이도순은 마동수의 수용소로 거처를 옮겼다. 이도순은 거처를 옮겨 간 경위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마장세와 마차세는 거기서 태어났다. 이년 터울이 났다. 가축우리에서 어떻게 두 아이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이도순은 잘 기억할 수 없었다. 땅 밑에서 풀이 돋고, 나무에 잎이 달리듯이 아이가 생긴 것이라고, 죽기 며칠 전에 이도순은 생각했다. 장남 마차세가 여자친구와 술 마시다가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가 섹스해서 날 낳았다는 걸 나는 믿을 수가 없어"라고 말했는데, 마차세가 자신이 점지될 때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부모의 신산스런 삶과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일의 어이없음을 말한 것을 봐서 마차세의 의구심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 - 125
아버지는 왜 집에 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아버지는 왜 집에 오는 것일까? 그 두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마차세는 그 어느 쪽도 알 수 없었는데, 그 두 개의 의문은 한 개의 이문인 듯싶었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헤집고 다니느 세상의 가장자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 저쪽으로 아주 건너갈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마차세는 짐작했다 - 131
그날 아버지는 마차세를 데리고 이발소에 갔다. 동네 국민학교의 구내 이발소였다. 마차세는 아버지와 나란히 이발 의자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두 얼굴이 똑같아서 마차세는 흠칫 놀랐다. 어디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그늘까지도 두 얼굴은 닮아 있었다. 마차세는 헤어날 수 없는 사슬에 옥죄이는 느낌이었다. 방과 후의 학교 운동장은 비어 있었고 운동장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내리는 빈 운동장이 이발소 거울에 비쳤고, 그 위로 닮은 얼굴 두 개가 떠 있었다. 거울 위쪽 벽에 - 132
이발사가 가죽띠에 면도칼을 문지르고 아버지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버지의 턱 밑이 거울에 비쳤다. 후골은 잔주름에 덮여 늘어졌고 수염은 끄트머리가 바스라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턱 밑이 벌컥거렸다. 그때도 아버지의 턱 밑은 뭍으로 올려져서 벌컥거리는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숨이 가르릉거렸다. 뒤로 젖혀진 아버지의 머리 너머로, 빈 운동장에 어둠이 내렸고 저무는 마을에 불이 켜졌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릴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 조바심에는 사슬을 끊으려는 충동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그때 마차세는 알지 못했다 - 133
아버지는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삻음 피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마장세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딪히거나 피하거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피를 흘리는 듯했지만, 그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삶의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생활의 외곽을 겉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노새나 말, 낙타처럼 먼 길을 가는 짐승 한 마리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얼씬거리다가 그 너머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이 세상이 다시는 지분덕거릴 수 없는 자리로 건너갔다는 것은 어쨌든 아버지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막상 죽음의 소식을 받고 보니 아버지가 건너간 자리는 아주 가까워서 아버지는 가지 않고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땅 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겉돌고 헤매이게 되는 생애의 고통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소멸할 것이고 그 고통이 아무리 크고 깊다 한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못할 것이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이 휴- 하고 긴 한숨을 한 번 내쉼으로써 정리할 수 있을 만한 가벼운 것이기도 했지만, 그 한숨 한 번 내쉬기까지가 어째서 그토록 힘든 일이었을까를 마장세는 생각했는데 생각이 되어지지가 않았다 - 140
나는 왜 인연 없는 섬의 원주민 사내와 내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아버지와 시누크의 아버지는 바닷물이 건너편 연안에 닿듯이, 철새가 대륙을 건너다니듯이 보이지 않는 인연의 사슬로 엮어져 있는 것인가. 마장세는 거푸 맥주를 마셨다. 바다는 어두워졌고, 긴 해안단애에 파도가 부딪혀서 인광이 절벽 위로 솟구쳤다가 흘러내렸다 - 152
초콜릿을 처음 먹었을 때 마장세는 정신이 아득했다. 미군 병장은 구두 닦은 값으로 동전 세 개를 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병장은 주머니를 뒤져서 먹다 남은 초콜릿 반 토막을 땅바닥에 던졌다. 마장세는 초콜릿을 집어서 포장지를 벗겼다. 앞니로 잘라 먹은 자국이 나 있었다. 마장세는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혓바닥으로 빨다가 보채는 이빨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씹어서 삼켰다. 아,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그날, 새롭고 놀라운 맛의 세계가 마장세의 몸속에서 문득 열렸다. 햇빛이 강렬한 날이었다. 바다와 하늘에 빛이 가득했고, 미군 병장의 구두에서도 빛은 번쩍였는데 그렇게 힘센 맛이 마장세의 몸 안에 가득 찼다. 미군 군화의 번쩍임과 초콜릿 맛이 강렬함은 마장세의 마음속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맛이 목구멍의 끝 쪽으로 사라지면 맛의 기억은 더 강렬해졌다. 지나간 맛은 모두 헛것이었지만 헛것은 입안에 든 먹이보다 더 선명하고 구체적이어서, 지나간 맛과 아직 오지 않은 맛이 빈창자 속에서 뒤섞였다. 배가 고플 때는 햇빛이 더 강렬해 보였고 햇빛을 받는 해운대 모래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고, 먼바다 쪽에서 초콜릿 냄새가 밀려왔다 - 158
난 아버지를 묻을 때 슬펐지만 좋았어. 한 세상이 이제 겨우 갔구나 싶었지. 이런 사람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흙을 쾅쾅 밞았어. 형은 그 힘들게 지나간 자취가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거지.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난 여기서 살 거야. 나도 결혼했으니까 아버지가 되겠지 - 184
마차세는 흐린 등을 켰다. 어둠에 파도 소리가 스몄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고 깨질 때 푸른 인광이 일었다. 파도가 들어올 때, 소리는 어둠을 뒤덮으면서 밀려왔고, 파도가 물러설 때 소리는 어둠 너머로 밀려 나갔다. 들어오는 소리가 가득 찼고, 나가는 소리는 비어 있었는데, 발생 이전의 소리처럼 음정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 186
기호가 실물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마차세는 긍정하기 어려웠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 허방이 있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이 거듭되는 억 단위의 숫자를 읽을 때 마차세는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기호가 실물인 것을 잊어버리고 거기에 부딪히면 죽거나 다칠 것이었는데, 기호는 실물과 사소한 관련도 없이 또 돌다가 사라지는 부표와 같았다. 해고되던 날 저녁에 사물함을 정리해서 조용히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그렇게 떠돌다가 사라지는 기호처럼 보였다 - 191
아버지가 죽어서 없어지고 난 후의 세상은 더욱 막막했다. 마차세는 그런 막막함에 쫓기듯이 결혼을 서둘렀고, 박상희는 마차세의 조바심을 짐작하고 있었다. 박상희는 마차세의 그 막막함과 서두름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세상을 멀리 빙 돌아서 다가오는 사람의 우원한 회로를 마차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 마차세는 결혼이 그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랐다. 마차세가 아버지와 어미머니와 형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 박상희는 마차세의 목을 안고 마차세의 입안으로 입김을 불어넣어서 자신의 숨결과 몸 냄새를 마차세의 몸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저녁에는 밥상머리의 이야기가 길어져서 찌개가 식었다 - 199
밥 익는 냄새와 고등어를 굽는 냄새 속에서 죽은 아버지가 떠오르는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연상 작용은 어쩔 수 없었다. 마차세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이해시켰고, 그 연상을 내버려두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활착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찾아 헤매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왜소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무방할 것이고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었는데, 그 초라한 것들을 세상에서 이루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을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일상의 밥 먹기나 겨울의 추위나 음식 냄새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났다 - 211
핸들이 자주 흔들려서 오토바이 백미러 속의 세상은 불안정했다. 세상은 영상이 되어 그 볼록거울에 비쳤는데, 영상은 깨져서 흩어졌고 또 나타났다. 8차선 도로 전체가 자동차의 엔진음과 에어브레이크의 비명에 덮여 있을 때도, 백머리 볼록거울 속의 세상은 적막했다. 소음에 찬 거리의 이면은 아무런 소리도 발생하지 않았거나, 발생한 소리가 귓속으로 건너오지 않는 무인지경의 적막이었다. 8차선 교차로 신호 대기선에서 백미러를 들여다보면서, 마차세는 중화기와 진지들이 눈에 덮이는 동부 산악 고지의 적막을 생각했고, 직장이 통폐합되어서 강제 실직당하고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가던 날 저녁의 적막을 생각했다. 여러 적막이 백미러 안에 겹쳐 있었고, 신호가 바뀌면 마차세는 다시 엑셀을 당겨서 튀어 나갔다 - 231
임신의 기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움트는 이물감이나 어지럼증 같았다. 기별은 멀고 희미했는데, 점차 다가와서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낯선 것이 다가오고 또 자라서 몸 안에 가득 퍼져가는 과정을 박상희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놀러 갔던 동해의 아침 바다는 어둠이 물러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수평선 쪽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퍼졌고, 새로운 시간은 살아 있는 살까지 서로 부비듯이 다가왔다. 박상희는 스며서 가득 차는 빛들을 떠올렸다.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가끔씩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몸속에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의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는 소리였다 - 270
단전 아래쪽에 희미한 진동이 느껴질 때, 박상희는 태어날 아기가 제 아버지를 닮았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마장세와 사진에서 본 시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왔다. 그세 모습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한 줄에 묶여 있었다. 줄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박상희는 몸속에 들여온 그 인연의 줄을 느꼈다. 박상희는 줄에 묶여서 괴로워하는 것들을 자신의 몸으로 덮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몸은 몸속에 들어온 것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침에 마차세가 출근하면, 박상희는 공원에서 산책했고, 오후에서는 서너시간쯤 디자인 일을 했다. 박상희는 자주 눕고, 조금씩 자주 먹었다. 박상희는 생오이, 찐 감자, 찐 옥수수, 양파, 자두, 살구를 먹었다. 몸속에서 먼 몸이 자라고 있었다 -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