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10 (반양장)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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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코쿠 시대, 격랑의 전장을 누비던 세 명의 영걸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담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중국의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12권 분량의 대하 역사 소설이다.
화려한 지략과 병법,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평정했던 두 걸출한 인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이에야스는 항상 뒷전에 밀려 그들의 영광을 지켜보는 이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낙담하지 않았다. 볼모로 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은 '인내'라는 굳건한 토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겐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하고 기꺼이 고개 숙여 순종했지만, 그 이면에는 예측불허의 속내가 존재했다. 폭주하듯 맹렬한 속도로 타오르는 두 영웅을 숭배하기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에야스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개중엔 조롱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침묵과 인내로 수양을 거듭했던 그는 깨닫는다. 지금은 묵묵히 내실을 쌓으며 인종(忍從)이란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 때라는 걸. 조급한 야망보다 인내에 근간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매 순간 인내와 끈기로 쌓아 올렸던 탑은 결국 하늘의 뜻과 맞닿았고, 마침내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가 됐다. 260년에 이르는 평화의 시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과업을 성취한 인물이였기에 젊은 시절 내 독서는 자연 이에야스의 인생 철학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막부의 개창자라는 위업을 이룬 이에야스의 묵직한 여정에 사로잡혀 역사의 뒷켠으로 쓸쓸히 사라진 인물에게 시선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대망>을 완독한 사람들은 누구나 꿈꿀 것이다. 연이은 좌절과 굴욕 속에서도 특유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에야스를.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불굴의 투지로 승부하는 이에야스의 삶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 뿐, 우리의 삶은 대부분 상실과 회한으로 채워진다.

그런 삶의 이치를 깨달을 무렵 나는 중년이 됐고, 자연스레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불세출의 영웅 이에야스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로. 나름 특출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에 갇혀버린 히데요리. 센코쿠 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누렸던 그의 삶은 여느 부잣집 도련님과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갖춰진 오사카성, 그가 손에 넣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날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진 수난을 겪으며 정치적 감각을 익혔던 이에야스는 직감한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히데요리는 결코 난세를 평정할 기량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특유의 분방한 기질로 내전을 휘저었던 생모 요도기미. 그녀는 히데요리의 보호막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자기연민과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녀. 히데요리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여인들에 둘러싸여 안방에서만 자란 히데요리에게, 난세에서 자라온 난폭한 영주들을 제압할 힘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p.143

히데요리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았다.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에게서 더 깊은 공명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강철같은 의지나 묵직한 내공도 갖추지 못한 채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내 삶은 놀랍도록 그와 닮아 있었다. 역사라는 모체를 공유하며 서로를 마주 보는 쌍둥이처럼.

세상의 거친 민낯을 몰랐기에 어른이 될 수 없던 히데요리.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표면적인 예의만 갖춘 채 서서히 거리를 두던 가신들 틈에서. 화려한 오사카성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됐으며, 결국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섬뜩하게 벼려진 역사의 칼끝에 흥건한 핏물만을 남긴 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벼랑에 내몰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상처를 덜어주는 쪽이기를, 그리고 잊혀진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나이기를 바란다.
히데요리의 짧은 생이 나에게 남긴 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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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비오 신부
존 A. 슈그 엮음, 송열섭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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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는 내게 항상 불편한 성사였다. 정확히는, 고해소 특유의 숨 막히는 공기가 버거웠다. 세상과 차단된 밀실에 갇혀, 그간 저지른 죄악과 오류를 낱낱이 고백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짓눌렀다. 가톨릭 신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고해소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례 받은지 이십 년이나 흘렀음에도 좀체 지워지지 않은 기억 때문일까. 반 평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더듬더듬 말문을 여는 내게 신부님들은 항상 자상하셨고, 보속도 대부분 가벼웠다.
그러나 때론 버럭 역정을 내며 혼을 내는 분들도 더러 계셨다. 눈물이 쏙 나올만큼.
살면서 항상 따뜻한 위로만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저 서럽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 갇혀 관성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참회와 성찰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나에게, 그 독설은 오래도록 사무치는 상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떠올리면 나도 모를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그날 내가 흘렸던 눈물은, 돌이켜보면 은총의 또 다른 빛이었으니까.

상처로 남은 고해성사

존 A.슈그의 <오상의 비오 신부>는 생전의 비오 신부님을 만났던 성직자와 신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그분이 남기신 놀라운 행적들을 기록한 책이다.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빌로케이션을 비롯해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치유의 기적들,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심오한 영적 깊이. 사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단한 업적을 쌓았지만, 비오 신부님은 마냥 친절한 사제는 아니었다. 다소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는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고해 성사 중 그분의 무뚝뚝한 말투에 상처를 받았다는 수녀님의 증언을 읽어보면, 신부님은 틀에 박힌 친절한 위로보다는 철저한 회개와 정직한 고백을 원하셨던 듯하다.

상처로 남았던 고해성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신부님의 본심을 헤아린 수녀님은 다시 그분께 돌아와 또 한 번 고해를 청하셨다. 구체적인 해결책 대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신부님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느님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내 인생에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계속 나를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p.288

비오 신부님을 흠모해 '비아'라는 수도명을 택했던 수녀님. 그녀는 깨달았다. 거룩함이란 항상 부드러움이나 고요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때론 서늘하고 예리한 영성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단초라는 걸. 오래전 고해소에서 내가 흘렸던 눈물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티모2, 4장 7절-

인간적인 온기를 초월해,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한 비오 신부님. 그는 죄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았기에, 그들을 무작정 감싸지 않으셨다. 때론 비수 같은 말로 영혼 깊은 곳을 자극하며, 진정한 회심을 촉구하셨던 신부님. 오상을 지닌 육체로 매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겼고, 고해소라는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그분의 삶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는 맹렬히 싸워냈다. 불처럼 타오르되, 얼음처럼 정제된 영성. 그 거룩한 온도의 신비를 더듬으며, 조심스레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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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로널드 롤하이저 지음, 이선정 옮김, 허찬욱 감수 / 생활성서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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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일반 병동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낸 아빠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는데 독한 진통제에 의존하던 아빠는 선망 증세까지 보이며 혼수상태에 빠져들던 시간이 많아졌다. 더는 해줄 것이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던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지만 현실을 수용하는 것밖엔 다른 도리는 없었다. 넋을 잃고 배회하듯 병동을 떠돌다가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참담해졌다. 아빠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자비의 희년' 기도문을 만지작거리다 체념하듯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는 속삭였다.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요? 왜 이런 순간에 침묵하고 계신 건가요?'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랜 냉담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내 마음 한편에 세워진 불신의 벽은 쉽사리 허물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장막으로 겹겹이 쌓인 세상 속에 나 혼자 고립된 느낌. 가까운 친척들과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시간들,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세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시기와도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 로널드 롤하이저의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은 신앙의 어두운 밤과 인간의 한계를 다루며 즉각적인 응답을 바라는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신뢰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강조한다. 성 테레사, 성 요한 등이 경험한 신앙의 침묵과 갈망, 그들이 간직한 영적인 신비와 깊이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통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 듯 암흑 속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참신앙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중략) 신앙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이나 마음속의 확신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넘어 영혼에 찍힌 낙인처럼 존재한다는 걸, 하느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56

십자가 수난을 앞둔 밤,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 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피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랐던 군중들은 비난과 야유를 서슴지 않았으며 제자들은 스승을 부인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거부 속에서 홀로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가슴에 새겨진 하느님의 침묵이 사랑으로 드러나고 모든 굴욕의 순간마다 흘렸던 핏방울과 눈물들이 숨겨진 은총으로 가슴을 두드릴 때 고통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때 내가 바쳤던 기도와 전혀 다른 응답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결핍 앞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그럴수록 상처는 깊어져갔다. 바닥조차 가늠되지 않는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하느님을 불렀던 나의 외침은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달라 떼쓰는 '구조' 요청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하느님은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핵심적인 계시입니다. p.95

신앙을 가지면 항상 위로받고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많다. 십자가는 삶의 고통을 면제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이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어,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p.194

구원이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오류와 죄악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드는 하느님, 세상을 정화하는 그분의 침묵을 사랑으로 깨닫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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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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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방 침대 위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차마 듣기 힘든 욕설로 언성을 높이던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자 여자는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떤다. 어쩌면 다음 순서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엄마...아빠 잠들었어?"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와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고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괴롭히던 아빠, 겁에 질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식의 존재 따윈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주사를 부리며 바닥을 드러내던 아빠는 평소의 자상한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전형적인 폭군에 지나지 않았다. 극단적인 양면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아빠는 가끔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며 가족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곤 했는데, 가장 사랑받는 딸이였던 나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변화무쌍한 감정기복의 소유자였던 아빠에게 나는 늘 주눅들어 있었고, 어쩌다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하루종일 침울한 얼굴로 방 안에 틀어박혀 혼자 우는 날이 많았기에 표정은 어두웠고 자연히 학교에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내 삶을 지배했고, 특히 인간관계에서 항상 반복됐던 악순환은 고립과 단절로 이어져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항상 내겐 버겁게 여겨졌다. 카인의 표식처럼 영혼에 새겨진 상처,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W.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 시절>은 내재과거아(Inner Child)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언급하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와 밀접하게 연결된 내재과거아는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반복적인 부정적인 패턴을 보이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성격 장애의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 안에 숨겨진 어린아이, 내재과거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것

당신의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지속된다.
p.11

가끔 어린 시절의 꿈을 꿀 때가 있다.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고막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가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던 아빠,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있던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이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도 악몽은 계속되고 꿈 속에서 여전히 나는 무기력한 아이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유년기 시절 내가 경험했던 폭력은 내재과거아라는 이름으로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평생 지켜보고 다독여야할 존재라는 인식이 차즘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공간에 웅크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연약한 아이, 내 상처의 기원이 되어 끊임없이 존재감을 알리던 내재과거.
휴 미실다인은 우리가 내재 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부드럽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할 수 있으며 삶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부모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일 뿐

어쨌든 이제 우리는 성장했으며, 어렸을 때처럼 부모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중략)부모를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사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p.55

한때 나는 아빠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사회적 성취와 상관없이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가 부끄러웠고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반발심을 드러내며 대든 적도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역정을 내며 가족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싫어 일부러 아빠의 연락을 피하면서 차갑게 대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나와 같은 내재과거를 간직한 인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에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정서적 거리를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학교를 다니며 동급생들의 구타와 따돌림을 겪어야 했고, 부모의 천대까지 감수해야 했던 유년기 시절 아빠에 대한 이해가 나에겐 없었다. 아빠 역시 나처럼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받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통찰이 없었기에 뒤늦은 깨달음은 늘 아프기만 하다. 부모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재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대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내재과거는 과거의 습관으로 축척된 기억이며 영혼에 새겨진 표식과도 같기에 그 흔적을 지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내재과거의 현명한 보호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현재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며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에 갇혀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을 버리고 내재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우리를 지배했던 폭력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갈피를 잃고 방황할 때마다 내 안에 새겨진 표식, 내재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분별없는 욕망과 쾌락에 눈이 멀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때로는 부드럽게 타이르고 달래며 그동안 숱하게 반복했던 오류를 바로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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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 -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전기
카미유 뷰르동클 지음, 연숙진 옮김 / 생활성서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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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수난을 감수하셨던 그리스도, 끝없는 성심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그분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간직했던 한 성직자가 있다. 남다른 총명함과 깊은 영성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탄탄대로 인생을 보장받았으나 세속의 안락함 대신 조선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선택한 브뤼기에르 주교.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은 예수 성심으로 타올랐던 그의 삶과 신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양 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천주교를 박해했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던 주교의 삶은 다소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김새는 물론 언어와 풍습, 가치관까지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조선이란 낯선 나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 예수 성심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신심과 덕행으로 비범한 자질을 드러냈던 주교는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사랑했던 고향과 가족을 떠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던 주교.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나자렛을 떠나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이별의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끊임없이 영혼을 정화하며 하느님께 나아갔던 거룩한 예수 성심. 삶의 동력이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조선 선교의 길로 주교를 인도했던 예수 성심. 식사와 수면, 의복조차 제대로 정비할 수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인내했던 주교의 삶은 <이름 없는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타인의 모욕과 손가락질, 목숨조차 연명할 수 없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바쳤던 순례자의 여정은 예수 성심으로 불타올랐던 주교의 삶과 중첩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됐지만 기쁨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주교의 체력도 문제였지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경비와 주변의 만류는 조선 선교를 향한 주교의 꿈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혹독한 내핍의 생활을 감내하며 오직 하느님께 의탁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뜻을 관철하며 주교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느 사람이라면, 담금질이 덜된 영혼이었다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는 그러한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략)그는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의 도우심을 고대했다. 그분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204
현실적 한계와 체력의 고갈, 악화된 건강으로 주교는 조선 땅을 밟기 직전, 만리장성 근처 마가자에서 선종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순종했던 충직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 고국을 떠나 아시아를 가로질러 조선으로 향했던 그의 여정은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매 순간 뜨겁게 타올랐던 예수 성심은 신앙의 불꽃이 되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비록 조선 선교의 열망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숭고한 삶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분의 지시와 그분의 허락이 없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 은총의 도움으로 그분의 계획에 순명하는 것이 곧 저의 의무입니다.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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