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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 성탄을 기다리며 읽는 대림 시기 묵상
한재호 지음 / 생활성서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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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성당 언저리를 한참 맴돈다. 미사가 끝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고개를 떨군다. 손가락에 끼워진 묵주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성물방에서 반지를 사서 신부님께 축복 받았던 날을 떠올리며 여자는 힘없이 웃는다. 그러다 어느새 문 앞에 서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텅 빈 회중석 위로 일렁이는 붉고 푸른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신앙을 저버렸던 지난 세월이 뇌리를 스친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고 손대는 일마다 모래성처럼 무너지던 날들. 세상 어디에도 여자의 자리는 없었다. 성당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안에서 신앙은 점차 퇴색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마음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성경을 읽고 필사를 하며 기도를 했다. 철옹성처럼 굳게 닫힌 마음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새 너머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희미한 온기를 머금은 빛을 따라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초록과 빨강, 성탄을 상징하는 두 가지 색깔의 표지가 인상적인,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이란 책이다. 평소 좋아했던 한재호 신부님의 글인데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림 시기를 위한 묵상집이라 더욱 마음이 갔다. 무엇보다 대림 첫 주의 묵상에서 마주친 익숙한 이름이 반가웠다. 회개한 죄인의 상징으로 알려진 나의 수호성인, 마리아 막달레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그녀였지만 이 책에서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뭇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둘도 아니고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한 여인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의 절규는 얼마나 컸을까요. (중략) 하지만 주님께서는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한 영혼의 아우성 너머에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한 영혼의 갈망을 헤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소리만 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소리가 품고 있던 아픔을 들으신 것입니다. (p.34)

20대 시절, 매일 백화점에 들러 비싼 옷과 구두, 화장품을 사들이는 나를 보고 가까운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넌 지금 귀신에 홀려 있거나 정신적으로 많이 아프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그저 비아냥이라 여겼던 그 말이 새삼 정곡을 찌르는 이유는 뭘까. 마음의 허기를 채우려 분수에 맞지도 않는 소비를 하고, 결이 맞지도 않는 친구들을 사귀며 외로움을 잊으려 했던 나날들. 지인의 말대로 그때의 나는 정말 귀신에 홀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곱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막달레나처럼.

사람들은 어쩌면 그의 이름보다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여자'라는 고통의 흔적으로 그를 먼저 기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언제나 '마리아'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자신을 고통의 이력으로 규정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 받아 주셨던 사랑의 기억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p.35)

지인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 시절 나는 많이 아팠고, 결핍을 채우려 수시로 타인에게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멀어졌고, 어느새 나는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아픈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아픈 사람'으로 불리지 않았다. 수녀님과 신자들은 늘 다정하게 "막달레나, 잘 지냈어요?" 하고 말을 건네왔다. 처음엔 반가웠다. 그저 순수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러나 선뜻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이 따뜻한 순간 역시 찰나에 불과할 거란 체념이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 이름을 외면한 채 흘려보낸 십 년에 대한 회한도 함께 밀려왔다. 그래서 늘 어색한 미소만 남긴 채 서둘러 돌아섰다. 그들이 건넨 짧은 인사가 나를 부르는 그분의 음성이라는 것도 모른 채.

부활 아침, 무덤가에서 울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분을 알아보았다. 사람들이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여자'로 기억하던 그녀를, 예수님은 그 고통 너머의 갈망과 결핍까지 끌어안으셨다. 영혼 깊이 새겨진 낙인마저 단박에 지워버릴만큼 강렬한 사랑. 그 사랑에 막달레나는 기꺼이 응답한다.

대림을 앞둔 지금, 미사가 끝난 성당은 고요하다. 오래전 문 앞에서 서성이던 여자는 이제 회중석에 앉아 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지나온 빛이 손등을 물들인다. 가을 단풍처럼 고운 빛깔 속에서 묵주 반지가 반짝거린다. 익숙한 인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막달레나, 잘 지냈어요?

이번에는 서둘러 돌아서지 않는다. 예전과 다른 평온한 미소를 띤 채 여자는 천천히 돌아선다. 부르심에 응답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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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착해, 너무 바보 같아
델핀 뤼쟁뷜.오렐리 페넬 지음, 조연희 옮김 / 일므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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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이 단정하며 말씨가 곱고 심성이 착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힌 글이다.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정민이는 착해.'

다른 친구들의 생활기록부에는 '용모가 수려하고 다재다능하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매사 진취적이다' 같은 평가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부럽지는 않았다. 그때는 '착하다'는 말도 그에 못지않은 칭찬이라 믿었으니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착하게 살고 싶었다. 다만 착하게 사는 데도 기술과 맷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박미옥, 『형사 박미옥』

나 역시 그 기술을 알지 못했다. 많이 베풀수록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고, 거절하거나 경계를 세우는 일은 타인과 담을 쌓는 일이라 여겼다.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고, 불편한 말을 들어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자기 좋을 대로 약속 장소를 정하는 친구, 만날 때마다 외모를 지적하며 상처를 주는 친척들,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지인들 앞에서도 나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혼자 남겨지기 싫어서.

그런 내게 사람들은 말했다.

'정민이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요즘 세상에 너 같은 앤 바보나 다름없어.'

그때부터였다. '착하다'는 말이 더 이상 칭찬이 아니라 악담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은.

<너무 착해, 너무 바보 같아/델핀 뤼쟁뷜, 오렐리 페넬 著>는 자신의 기준과 감정을 외면한 채 타인에게 맞추기만 하는 태도를 문제로 지적한다.

친절은 훌륭한 자질이지만 적절한 곳에 커서를 두지 않는다면 약점이 될 수 있다. p.19

친절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 베풀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스스로 정하지 못할 때 생긴다. 친절과 단호함을 물과 기름의 관계로 이해해선 안된다. 자신의 경계를 지키면서도 타인을 배려할 수 있고, 때로는 단호한 거절이 나를 지키는 동시에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중심을 잡아준다.

과한 친절은 타인의 경계를 반복해서 시험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선을 넘는 언행으로 상처를 주다가도 가끔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 달콤한 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어디까지가 호의이고 침해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올바른 호의는 제대로 된 질서 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혹시라도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피하자. 상황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믿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p.110

수시로 나를 깎아내리고 관계에서 늘 우위를 점하려던 지인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공격적인 말투로 약점을 건드리는 그 애가 싫었지만, 쉽사리 관계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그 애의 무례보다 내 판단을 먼저 의심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이 정도 일로 사람을 끊어내는 게 맞는 걸까. 그래도 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그래서 참았다. 언젠가는 내 진심이 통할 거라 믿으며.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기어이 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상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내 진심만으로 타인의 태도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친절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과 상대가 저지른 잘못까지 떠안는 것은 다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언제나 선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표현하지 못한 불만이 쌓이면 친절은 의무로 굳어지고, 결국엔 감정적 부채가 되어 관계를 무너뜨린다.

친절이란 항상 좋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싫다는 대답도 현명하게 할 줄 아는 것이다. p.126

생활기록부에 적힌 몇 줄의 글 앞에서 해맑게 웃는, 열일곱 살의 나를 떠올려 본다. 눈에 띌 만한 외모도, 특별한 재주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신 미소를 띠고 있는 어린 나에게 가만히 속삭여본다.

"그 종이에 적힌 글이 너를 슬프게 할 때가 올 거야.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혼자 우는 날들도 늘어날 거야. 착하다는 말이 더는 너를 웃게 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온전히 너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싫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친절과 단호함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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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 출판사 - 프랑스 선교사 훈민정음 인쇄 출판 이야기
가톨릭출판사 역사 연구회 지음, 조광 감수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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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어느 사랑방.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을 두고 선비들이 토론을 벌인다. 누군가는 서양의 천문과 지리에 관심을 보이고, 누군가는 천주라는 낯선 존재를 두고 의견을 내놓고, 또 누군가는 반박한다.

서로 다른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문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펼쳐진 책을 노랗게 물들인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에도 같은 빛깔이 번진다. 빛은 어느새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겨자씨처럼 환한 빛깔로.

그들은 알지 못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한 권의 책이 훗날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닿게 될지를. 소수의 지식인 손에 머물던 서학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한글로 필사되고, 인쇄되어 퍼져 나가게 될 줄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 싹튼 신앙은 훈민정음으로 뿌리를 내렸고,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인쇄 출판을 거치며 가지를 뻗었다.
<조선 천주교 출판사>는 그 긴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세례를 받은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천주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에 뿌리를 내렸는지 나는 거의 알지 못했다. 선교사가 먼저 들어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접한 사람들이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동안 비로소 구체적인 맥락으로 다가왔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한글을 대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어와 어순과 문법이 다른 조선말을 공부하고, 문법을 정리하고, 사전을 만들었다. 목판 인쇄소를 세워 기도서와 교리서를 펴내기도 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수고를 감당하게 했을까.

나는 그 동력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세상 모든 이와 나누고 싶은 마음.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낯선 언어를 익히게 했고, 글자를 새기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수고는 책이라는 물성으로 드러났다.

사랑방에 떨어졌던 겨자씨 한 톨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 시작한 순간이다.

책을 덮고 표지를 다시 쓸어본다. 음각으로 새겨진 훈민정음이 손끝에 느껴진다.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글자가 새롭게 여겨진다. 이 문자 안에는 낯선 언어를 배우고, 글자를 새기며, 책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시간이 녹아 있다.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된 까마득한 시간.

오래전, 조선의 작은 사랑방에 떨어진 한 톨의 겨자씨는 나무가 되었다.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을 품은 한 그루 나무. 나는 지금 그 나무 아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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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홍성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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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해안에서 멀어지자 한 남자가 뱃머리로 나선다. 사색이 된 부하들이 옷자락을 붙잡아 만류하지만 단호히 뿌리치며, 눈먼 폴리페모스를 향해 외친다.

"네 눈을 멀게 한 자는 이타카의 왕,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다."

살기 위해 '우티스'(아무도 아닌 자)란 가면을 썼던 그가, 보란 듯이 이름을 밝히자 포세이돈의 저주가 시작된다. 승리에 도취된 한 인간의 오만과 허세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순간이다.

<오디세이아>는 타고난 지략으로 승승장구하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숱한 고난 속에서 함대와 부하들을 잃고 바닥까지 추락해, 비로소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마주 보는 한 인간의 궤적이다. 불완전한 자신을 수용하면서 끝내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영혼의 본향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온전히 나로 살아간다는 것. 그 묵직한 화두를 홍성남 신부님의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면 마음에 힘이 생기고, 웬만한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p.61

생존을 위해 우티스란 가면을 쓰고 폴리페모스를 속였던 오디세우스가, 섬을 떠나는 순간 무모한 객기로 신의 분노를 산다. 그의 이런 오만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오디세우스는 자신에 대해 무지했다. 승리 앞에서 초연해지지 못했고, 만류하는 부하들의 간언에도 귀를 닫았다.
이타카의 왕이라는 권위와 전장에서 증명한 지략은 명백했지만, 치솟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다. 자기 한계를 모른 채 부린 만용은 십 년의 방황으로 이어졌고, 이타카를 향한 귀환은 점점 멀어졌다.

나 역시 그랬다. 타인의 인정을 얻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망에 휘둘려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꽤 오랫동안 착취적인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거절을 못 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천성 탓이라고, 처음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너무 착하게만 대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며 사는 사람은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p.84

함부로 선을 넘고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사람들에게 왜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나.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나는 누군가 건네는 작은 호의에도 쉽게 무너지곤 했다. 그들이 속삭이는 '착하다'라는 말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증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아무리 무시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았다. 나는 착하니까 그들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면 결국 인정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헛된 기대가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바다 위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었다. 끝없는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가볍게 대하기 쉽습니다.
p.122

돌이켜 보니 내가 순수한 선의라 믿었던 행동 중 대다수는 인정 욕구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무엇이 싫은지 알면서도 표현하지 않았고, 부당한 요구 앞에서도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번번이 나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홍성남 신부님이 말하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돌보고, 무엇이 부당한지 판단하며 감당할 수 없는 요구에는 거절할 줄 아는 삶이다.

타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매사 눈치를 보고 무리한 요구를 수락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존중하고 함부로 선을 넘지 않는 것만으로 관계는 유지된다.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건강한 자존감은 바로 그런 절제와 중용의 삶에서 시작된다.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작은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자꾸 흔들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p.256

바다 위의 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제는 타인의 인정에 휘둘려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한다.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되, 나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 것. 지금 내가 향하는 이타카는 그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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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지음,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 엮음, 방종우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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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년, 한 수도자가 동료들을 이끌고 인적 드문 숲속으로 들어간다. 세속과 등을 진 그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도적들의 은신처로 전해지던 음습한 골짜기, 고립된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바로 그 땅에 수도자는 클레르보(Clairvaux), 빛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황량한 골짜기에 뿌리를 내린 베르나르도는 동료들과 함께 기도와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은 사랑과 겸손,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자라났고, <신애론>은 그 사유의 한 정점으로 남게 된다.

총 2부로 구성된 <신애론>은 베르나르도의 원전과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의 해제를 함께 담고 있다. 책의 이해를 돕는 해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나는 원전부터 펼쳤다. 피아조니의 해석을 경유해 베르나르도를 만나기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와 먼저 마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경험해 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책 또한 나만의 독법으로 깨우쳐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사랑

베르나르도는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철저히 자기애에 갇힌 사랑이지만, 베르나르도는 이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에, 그는 이 낮은 자리를 사랑의 출발점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가장 깊은 사랑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며 존재 안에서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야말로 자기에게 갇힌 사랑을 확장하는 첫 번째 문이라고.

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다만 여전히 자아라는 틀에 갇힌 사랑이다. 신을 찾지만 오직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단계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 불순함마저 기꺼이 끌어안는다. 사랑은 본래 이렇게, 제 필요에 떠밀려 시작되는 법이니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게중심이 하느님에게로 옮겨간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들어서는 순간, 자아라는 굳건한 성채가 무너지고 육체의 모든 감각은 오직 한분만을 향하게 된다. 줄곧 안으로만 파고들던 사랑이 마침내 유일한 진리를 마주한 것이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하느님을 열망했던 베르나르도처럼.

네 번째 단계는 가장 낯설고 심오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언뜻 첫 단계와 비슷한 지점같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미성숙한 자기애에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하던 사랑이, 이제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이 망아의 정점을 탈혼(excessus)이라 부른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단언한다. 이 마지막 여정은 현세에선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합일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탈혼은 육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베르나르도가 기다리는 것은 육신의 부활이다. 모든 연약함을 벗어난 영화로운 육신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클레르보라는 이름이 다시 보였다. 베르나르도가 발견한 골짜기는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기도와 노동 속에서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마주했다. 그가 말한 사랑의 네 단계도 다르지 않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보상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의 결핍에서 비롯되어 존재를 관통해 그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내 안에도 어둡고 습한, 오래된 골짜기가 있다. 신앙은 그 골짜기를 메워주진 않았다. 다만 그 어둠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골짜기가 그분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채워지지 않는 자리, 그 결핍의 공간이야말로 빛이 스며드는 문이라는 걸, 베르나르도는 아홉 세기 전 클레르보의 어둠 속에서 그 진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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