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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비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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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아빠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나는 거동이 불편한 아빠를 부축하고 장루를 갈아드리며 그렇게 넉 달간 아빠의 곁을 지켰다. 거듭된 항암으로 체력이 바닥난 아빠는 가끔 중심을 잃고 비틀대곤 하셨는데, 한 번은 앞으로 크게 넘어져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아빠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 붕 떠있던 발끝이 비로소 땅 위에 내려앉고, 구체적으로 죽음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쳤다. 제목부터 나를 끌어당겼던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죽음의 신비>.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를 앞두고 봤던 고해 성사에서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선 사랑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또한 은총이니까요." 신부님뿐만 아니라 성당 지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아빠의 죽음은 은총이라고. 장애가 있는 몸으로 태어나 평생 모진 수모와 천대를 겪다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받았던 분께 은총이라니. 결국 은총이란 신의 무심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인가?
신부님과 자매님들의 위로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은총'이란 단어로 아빠의 고통 자체가 축소되는 게 싫었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내게 은총이란 단어는 버겁기만 했다. 그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슈파이어는 죽음이 산 자에게 구멍을 낸다고 말한다. 그 구멍은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다고. 나는 그 구멍을 아빠의 장례 미사에서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인지, 아니면 그저 공백으로 남겨진 자리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자매님이 그랬다. "하느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시고 자매님을 부르셨네요." 슈파이어는 말한다. 하느님께선 때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이용해, 남겨진 사람들에게 영원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주신다고.
저자의 논지대로라면, 아빠의 고통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그 생각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버거운 진실이었다. 결국 아빠의 죽음은 나를 깨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셨을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은 나를 위한 것이었나. 그 생각이 나를 십자가로 이끌었다.

저자에 따르면, 케노시스란 자아를 비워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성자께선 그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두려움이나 체념이 아닌 완전한 사랑. 성자의 십자가는 사랑의 최종적 수긍이었다.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선택된 죽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도 소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였을까.

본가에는 아직도 아빠의 물건들이 남겨져 있다. 주인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놓인 물건들을 마주하는 게 지금도 여전히 편치가 않다. 밑줄이 그어진 책들과 마지막을 예감하며 쓴 메모들을 뒤적이고 있으면 여전히 울게 된다.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내 가슴속 구멍은 그대로다. 슈파이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희망하고, 결국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지만, 성자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p.231)

폰 슈파이어는 죽음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 말의 온전한 무게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것은 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아빠의 빈자리를 안고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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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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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 나는 완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두 달 남짓 일했던 학교에서 재계약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기에 일단 떠나기로 했다. 체념과 기대가 뒤섞인 채로.

터미널을 벗어난 버스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인트로가 끝나고 익숙한 멘트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빨간 책방 이동진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교수님 이야기입니다. 재미없을 것 같죠? 근데 아주 재밌습니다. 흡입력이 남달라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라는 책입니다."
낙방이 예정된 들러리 면접을 앞둔 그 길 위에서 나는 그렇게 <스토너>를 처음 만났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영문학개론을 듣던 스토너가 이 질문을 받는 장면에서 숨이 멈췄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완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른 도서관에서 펼쳐본 <스토너>는 그랬다. 처음인데 낯설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처럼. 이름부터 그랬다. Stone, Stoner. 삶의 모진 풍파를 홀로 버텨내는 바위같은 사람.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어딘가 답답한 인물. 그런 스토너에게 문학이 말을 건넨다. 신탁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는 금세 매혹당한다. 이디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문학도, 이디스도 결국은 평생을 두고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신탁은 어떤 면에서 형벌에 가깝다.

"그렇게 문학에 조예가 깊으십니까?"
면접 당일 교감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제 나름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는 역시나 낙방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스토너>를 읽으며 그 순간을 복기하고 있나. 그것도 아처 슬론이 스토너에게 던진 질문 속에서. 전혀 다른 맥락의 두 질문 앞에서 나는 고민했다. 문학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아니면 실패가 예정된 삶을 지속하는 스토너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걸까?

스토너의 삶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학자로서 성취는 미미했고, 이디스와의 결혼은 균열투성이였으며, 딸 그레이스의 방황은 그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캐서린과의 사랑은 짧았고, 로맥스와의 대립은 그의 완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그 무엇도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악물고 버틴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받아들인다. 불행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기본값으로 끌어안는다. 스토너의 삶은 체념이 아니라 수용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의 인생을 '패배자의 초상'이라 폄하할지 모른다. 유연한 처세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바위 같은 뚝심이 문제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에서 숙연함을 느꼈다. 아처 슬론의 질문은 스토너에게 신탁이었다. 신탁은 일종의 형벌이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그 형벌을 끌어안고 살아갔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이기 때문에. 거듭된 패배를 통해 스토너는 자신만의 신탁을 완성했다.

"그렇게 문학에 조예가 깊으십니까?"
2015년 여름, 완도에서 받았던 질문 앞에서 나는 말없이 <스토너>의 책등을 쓰다듬는다. 바위처럼 우직한 한 남자의 생애가, 그가 감내했던 신탁의 무게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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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론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의태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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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위 위에 한 젊은이가 홀로 앉아 있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성소聖召라는 거룩한 운명 앞에 섰다. 상실감과 두려움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고개를 든 젊은이의 얼굴에는 눈물 대신 미소가 번진다. 포기한 자의 허탈함이 아닌, 길을 찾은 자의 평온함이 영혼을 감싼다. 훗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아버지가 될 프란치스코 교황, 청년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모습이다.

영화 <두 교황>의 이 장면은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 있었다. 사랑을 잃고도 웃을 수 있는 저 초연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회한과 상실로 남은 기억 앞에서 주저앉은 내게, 그 미소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신비였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싶은데, 현실은 냉혹했다.
상처 없이 완전한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삶'을 원했다.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부정하면서.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솔직히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의무감으로 선택한 책이었기에. 제목부터 <행복론>이라니. 펼치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마음을 비워라' 같은 말들만 가득하겠지. 분명 좋은 말이지만, 마음을 울리지는 못하는 클리셰들.
그저 그런 '도덕 교과서' 같은 위로를 예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내심 당황했다. 교황님은 뜬구름 잡는 영적 통찰이나 어려운 신학 용어로 가르치려 들지 않으셨다.
'상처'를 언급하고 '고유함'을 이야기했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구절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어떠한 상황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어쩌면 자신의 과거를 '리셋reset'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을 권리를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가 없는 성인은 없고, 미래가 없는 죄인도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진주는 조개의 상처에서 탄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진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p.75

이 문장을 읽는 순간, 2008년 겨울이 떠올랐다. 거의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통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웹 소설 주인공처럼 회귀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망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삶의 얼룩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하지만 교황님은 그 얼룩을 '진주가 될 상처'라고 부르셨다. 어쩌면 인간 각자의 고유함은 '상처'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역사에 새겨질 수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열망하는 이들의 희망이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하나뿐인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85

이제 나는 영화 속 젊은이,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미소를 이해한다. 그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세속의 행복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가장 나다워지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고유함은 거룩한 삶으로 이어져 상처를 품어낸 진주처럼 뚜렷한 생의 무늬가 된다는 걸, 교황님은 당신의 삶으로 몸소 증명하셨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또 넘어질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니까. 하지만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매번 아버지가 일으켜 세워줘야 하는 아이들(p.148)'이라고.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넘어져도 괜찮다. 그 상처 또한 나의 고유함이 될 테니까.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의 얼룩은 백지가 될 수 없다. 상처가 진주가 된다는 건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을 감싸 안은 흔적이 나만의 결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상실의 아픔을 품고 하느님께 나아갔던 젊은 시절의 호르헤처럼, 나 또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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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도의 언어 - 시편을 읽는 40가지 단어
장 피에르 프레보스트 지음, 이기락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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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장대한 독주곡 <샤콘>은 짧은 베이스 패턴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곡이다. 동일한 화성 진행이 수십 번 거듭되지만, 이 반복은 감각을 무디게 하는 지루함에 머물지 않는다. *되풀이될수록 감정은 더욱 응축되고, 확신은 깊어지며,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굴레에서 조금씩 해방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한 자유와 확신'의 역설은 독실한 신자였던 바흐의 음악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매번 우리에게 영감을 건네는 시편의 언어에서도 동일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장피에르 프레보스티의 <시편, 기도의 언어>는 바로 이 '반복'되는 마흔 가지 핵심 어휘 속에 담긴 시간을 초월한 생명력과 영적 메시지를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히브리어의 구조와 의미, 그 안에서 맞물린 영성적 리듬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밝힌다. 시편의 반복이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신학적 장치이자 영혼의 호흡이라는 것을.

어휘의 관점에서 시편집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데, 바로 반복이다. 시편 기도의 어휘가 광범위하지는 않아서 같은 단어가 계속 반복되어 사용되는데, 이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p.12

어근 중심의 히브리어는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다양한 형태로 되풀이된다.
예를 들어, ḥesed(자비), yasha(구원), barakh(찬미) 같은 어근은 형태를 달리하며 시편 전체에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 시편 기도의 신학적 기둥을 이룬다. 반복은 결핍이 아니라 심화이자, 성령의 변주다. <샤콘>이 반복 위에 쌓아 올린 변주처럼 시편도 순환되는 어휘에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변주한다. 반복을 통해 끝없이 상승하는 <샤콘>과 같은 결을 공유하며, 시편은 영혼을 고양시킨다. 심연을 뚫고 끝없이 비상하는 새처럼.

인간은 단조로운 일상과 반복되는 기도 앞에서 무뎌지기 쉽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과 신앙은 그 되새김의 자리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독실한 신자였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샤콘>에서 발견된 진리와, 시편의 마흔 가지 핵심 어휘가 그렇다. <샤콘>이 단순한 네 마디 화성 위에서 수많은 변주를 견뎌낼 때 벅찬 희열이 솟아오르듯 , 시편 역시 그렇다. 기도의 누적은 우리를 영적 번아웃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날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결국 반복의 궤적은 지루함이 아닌 시간을 견디는 힘이며, 익숙한 고통이 아닌 영원한 자유와 확신의 길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그 숭고한 변주의 길 위에 홀로 또 함께 걸으며, 쉼 없이 호흡하고 있다.

그분께서 불어넣어주신, 성령의 숨결로.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에서 인용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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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어 봅시다! 가톨릭 신학과 교리 해설
조한규 지음 / 생활성서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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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수녀님 손에 이끌려 나는 예비자 교리를 듣기 시작했다. 성호 긋는 법부터 각종 기도문, 그리고 십계명까지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숙지하며 조심스럽게 가톨릭 신앙에 입문했다. 세례를 받은 뒤엔 주일 미사를 거르지 않았고, 고해소에도 정기적으로 들리며 나름대로 ‘신앙인답게’ 살아가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교리 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은 어느새 휘발됐고 나는 점점 성당과 멀어졌다. 그 시절 나는 신앙의 깊이를 헤아리기엔 너무나 어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미숙했다. 몇 번의 냉담 끝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느낌. 그 감각은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래전 들었던 교리 수업을 다시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흘러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미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내게 한 권의 책이 찾아왔다. 홀로 추억 속에 잠겨 있던 나를 일깨우듯.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음, 부활에 이르는 여정을 교리적으로 풀어낸 책은 많다. 하지만 그 사건들을 신학과 철학, 그리고 인간의 실존으로 확장시킨 책은 드물다. 조한규 신부님의 <한 번 읽어봅시다!>라는 책은 단연 후자에 속한다.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깊이 와닿았던 구절은 ‘인간은 스스로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늘 타인과 비교했으며 과거의 실수에 집착했고, 인정욕구에 휘둘려 매 순간 위태롭게 비틀대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흔들리던 내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이란 신앙의 본질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손길 없이는 나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인간은 한편으로는 무한하고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절대자의 도움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p.216

또한, 삼위일체가 머리로 이해하는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구조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성부는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성자는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밝혀주며 성령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내 마음 깊은 곳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삼위일체의 ‘흐름’ 안에서만 완전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동시에’ 존재하는 신비로서.

삼위 하느님은 같은 분이시고, 세 위격 모두 한 번 하느님이십니다. p.222
성부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p.223
성령의 활동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관되고,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모든 답은, 모든 게시에 대한 답인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p.240

신앙은 단 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넘어지고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긴 여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께 닿을 수 있다.

성인들은 죄에 빠지기 쉬운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하느님 선택과 은총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응답한 후에도 자주 걸려 넘어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p.28

결국 이 책은 지식의 단편적 나열이 아닌, 세상과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사유의 흐름'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신앙의 본질을 마주 보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게 한다. 더는 과거에 얽매여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새로운 신앙의 첫 장을 펼치도록.
삶의 무게중심이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오른편에 계신 그분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새로운 여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 안에서 맥동하는 나의 가장 단단한 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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