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10 (반양장)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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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코쿠 시대, 격랑의 전장을 누비던 세 명의 영걸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담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중국의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12권 분량의 대하 역사 소설이다.
화려한 지략과 병법,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평정했던 두 걸출한 인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이에야스는 항상 뒷전에 밀려 그들의 영광을 지켜보는 이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낙담하지 않았다. 볼모로 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은 '인내'라는 굳건한 토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겐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하고 기꺼이 고개 숙여 순종했지만, 그 이면에는 예측불허의 속내가 존재했다. 폭주하듯 맹렬한 속도로 타오르는 두 영웅을 숭배하기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에야스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개중엔 조롱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침묵과 인내로 수양을 거듭했던 그는 깨닫는다. 지금은 묵묵히 내실을 쌓으며 인종(忍從)이란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 때라는 걸. 조급한 야망보다 인내에 근간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매 순간 인내와 끈기로 쌓아 올렸던 탑은 결국 하늘의 뜻과 맞닿았고, 마침내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가 됐다. 260년에 이르는 평화의 시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과업을 성취한 인물이였기에 젊은 시절 내 독서는 자연 이에야스의 인생 철학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막부의 개창자라는 위업을 이룬 이에야스의 묵직한 여정에 사로잡혀 역사의 뒷켠으로 쓸쓸히 사라진 인물에게 시선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대망>을 완독한 사람들은 누구나 꿈꿀 것이다. 연이은 좌절과 굴욕 속에서도 특유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에야스를.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불굴의 투지로 승부하는 이에야스의 삶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 뿐, 우리의 삶은 대부분 상실과 회한으로 채워진다.

그런 삶의 이치를 깨달을 무렵 나는 중년이 됐고, 자연스레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불세출의 영웅 이에야스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로. 나름 특출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에 갇혀버린 히데요리. 센코쿠 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누렸던 그의 삶은 여느 부잣집 도련님과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갖춰진 오사카성, 그가 손에 넣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날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진 수난을 겪으며 정치적 감각을 익혔던 이에야스는 직감한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히데요리는 결코 난세를 평정할 기량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특유의 분방한 기질로 내전을 휘저었던 생모 요도기미. 그녀는 히데요리의 보호막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자기연민과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녀. 히데요리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여인들에 둘러싸여 안방에서만 자란 히데요리에게, 난세에서 자라온 난폭한 영주들을 제압할 힘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p.143

히데요리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았다.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에게서 더 깊은 공명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강철같은 의지나 묵직한 내공도 갖추지 못한 채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내 삶은 놀랍도록 그와 닮아 있었다. 역사라는 모체를 공유하며 서로를 마주 보는 쌍둥이처럼.

세상의 거친 민낯을 몰랐기에 어른이 될 수 없던 히데요리.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표면적인 예의만 갖춘 채 서서히 거리를 두던 가신들 틈에서. 화려한 오사카성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됐으며, 결국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섬뜩하게 벼려진 역사의 칼끝에 흥건한 핏물만을 남긴 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벼랑에 내몰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상처를 덜어주는 쪽이기를, 그리고 잊혀진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나이기를 바란다.
히데요리의 짧은 생이 나에게 남긴 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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