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로널드 롤하이저 지음, 이선정 옮김, 허찬욱 감수 / 생활성서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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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일반 병동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낸 아빠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는데 독한 진통제에 의존하던 아빠는 선망 증세까지 보이며 혼수상태에 빠져들던 시간이 많아졌다. 더는 해줄 것이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던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지만 현실을 수용하는 것밖엔 다른 도리는 없었다. 넋을 잃고 배회하듯 병동을 떠돌다가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참담해졌다. 아빠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자비의 희년' 기도문을 만지작거리다 체념하듯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는 속삭였다.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요? 왜 이런 순간에 침묵하고 계신 건가요?'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랜 냉담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내 마음 한편에 세워진 불신의 벽은 쉽사리 허물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장막으로 겹겹이 쌓인 세상 속에 나 혼자 고립된 느낌. 가까운 친척들과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시간들,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세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시기와도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 로널드 롤하이저의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은 신앙의 어두운 밤과 인간의 한계를 다루며 즉각적인 응답을 바라는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신뢰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강조한다. 성 테레사, 성 요한 등이 경험한 신앙의 침묵과 갈망, 그들이 간직한 영적인 신비와 깊이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통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 듯 암흑 속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참신앙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중략) 신앙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이나 마음속의 확신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넘어 영혼에 찍힌 낙인처럼 존재한다는 걸, 하느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56

십자가 수난을 앞둔 밤,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 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피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랐던 군중들은 비난과 야유를 서슴지 않았으며 제자들은 스승을 부인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거부 속에서 홀로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가슴에 새겨진 하느님의 침묵이 사랑으로 드러나고 모든 굴욕의 순간마다 흘렸던 핏방울과 눈물들이 숨겨진 은총으로 가슴을 두드릴 때 고통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때 내가 바쳤던 기도와 전혀 다른 응답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결핍 앞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그럴수록 상처는 깊어져갔다. 바닥조차 가늠되지 않는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하느님을 불렀던 나의 외침은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달라 떼쓰는 '구조' 요청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하느님은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핵심적인 계시입니다. p.95

신앙을 가지면 항상 위로받고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많다. 십자가는 삶의 고통을 면제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이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어,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p.194

구원이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오류와 죄악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드는 하느님, 세상을 정화하는 그분의 침묵을 사랑으로 깨닫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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