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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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방 침대 위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차마 듣기 힘든 욕설로 언성을 높이던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자 여자는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떤다. 어쩌면 다음 순서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엄마...아빠 잠들었어?"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와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고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괴롭히던 아빠, 겁에 질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식의 존재 따윈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주사를 부리며 바닥을 드러내던 아빠는 평소의 자상한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전형적인 폭군에 지나지 않았다. 극단적인 양면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아빠는 가끔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며 가족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곤 했는데, 가장 사랑받는 딸이였던 나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변화무쌍한 감정기복의 소유자였던 아빠에게 나는 늘 주눅들어 있었고, 어쩌다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하루종일 침울한 얼굴로 방 안에 틀어박혀 혼자 우는 날이 많았기에 표정은 어두웠고 자연히 학교에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내 삶을 지배했고, 특히 인간관계에서 항상 반복됐던 악순환은 고립과 단절로 이어져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항상 내겐 버겁게 여겨졌다. 카인의 표식처럼 영혼에 새겨진 상처,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W.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 시절>은 내재과거아(Inner Child)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언급하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와 밀접하게 연결된 내재과거아는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반복적인 부정적인 패턴을 보이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성격 장애의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 안에 숨겨진 어린아이, 내재과거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것

당신의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지속된다.
p.11

가끔 어린 시절의 꿈을 꿀 때가 있다.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고막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가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던 아빠,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있던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이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도 악몽은 계속되고 꿈 속에서 여전히 나는 무기력한 아이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유년기 시절 내가 경험했던 폭력은 내재과거아라는 이름으로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평생 지켜보고 다독여야할 존재라는 인식이 차즘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공간에 웅크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연약한 아이, 내 상처의 기원이 되어 끊임없이 존재감을 알리던 내재과거.
휴 미실다인은 우리가 내재 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부드럽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할 수 있으며 삶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부모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일 뿐

어쨌든 이제 우리는 성장했으며, 어렸을 때처럼 부모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중략)부모를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사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p.55

한때 나는 아빠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사회적 성취와 상관없이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가 부끄러웠고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반발심을 드러내며 대든 적도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역정을 내며 가족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싫어 일부러 아빠의 연락을 피하면서 차갑게 대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나와 같은 내재과거를 간직한 인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에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정서적 거리를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학교를 다니며 동급생들의 구타와 따돌림을 겪어야 했고, 부모의 천대까지 감수해야 했던 유년기 시절 아빠에 대한 이해가 나에겐 없었다. 아빠 역시 나처럼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받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통찰이 없었기에 뒤늦은 깨달음은 늘 아프기만 하다. 부모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재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대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내재과거는 과거의 습관으로 축척된 기억이며 영혼에 새겨진 표식과도 같기에 그 흔적을 지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내재과거의 현명한 보호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현재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며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에 갇혀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을 버리고 내재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우리를 지배했던 폭력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갈피를 잃고 방황할 때마다 내 안에 새겨진 표식, 내재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분별없는 욕망과 쾌락에 눈이 멀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때로는 부드럽게 타이르고 달래며 그동안 숱하게 반복했던 오류를 바로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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