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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 -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전기
카미유 뷰르동클 지음, 연숙진 옮김 / 생활성서사 / 2024년 12월
평점 :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수난을 감수하셨던 그리스도, 끝없는 성심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그분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간직했던 한 성직자가 있다. 남다른 총명함과 깊은 영성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탄탄대로 인생을 보장받았으나 세속의 안락함 대신 조선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선택한 브뤼기에르 주교.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은 예수 성심으로 타올랐던 그의 삶과 신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양 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천주교를 박해했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던 주교의 삶은 다소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김새는 물론 언어와 풍습, 가치관까지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조선이란 낯선 나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 예수 성심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신심과 덕행으로 비범한 자질을 드러냈던 주교는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사랑했던 고향과 가족을 떠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던 주교.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나자렛을 떠나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이별의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끊임없이 영혼을 정화하며 하느님께 나아갔던 거룩한 예수 성심. 삶의 동력이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조선 선교의 길로 주교를 인도했던 예수 성심. 식사와 수면, 의복조차 제대로 정비할 수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인내했던 주교의 삶은 <이름 없는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타인의 모욕과 손가락질, 목숨조차 연명할 수 없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바쳤던 순례자의 여정은 예수 성심으로 불타올랐던 주교의 삶과 중첩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됐지만 기쁨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주교의 체력도 문제였지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경비와 주변의 만류는 조선 선교를 향한 주교의 꿈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혹독한 내핍의 생활을 감내하며 오직 하느님께 의탁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뜻을 관철하며 주교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느 사람이라면, 담금질이 덜된 영혼이었다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는 그러한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략)그는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의 도우심을 고대했다. 그분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204
현실적 한계와 체력의 고갈, 악화된 건강으로 주교는 조선 땅을 밟기 직전, 만리장성 근처 마가자에서 선종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순종했던 충직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 고국을 떠나 아시아를 가로질러 조선으로 향했던 그의 여정은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매 순간 뜨겁게 타올랐던 예수 성심은 신앙의 불꽃이 되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비록 조선 선교의 열망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숭고한 삶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분의 지시와 그분의 허락이 없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 은총의 도움으로 그분의 계획에 순명하는 것이 곧 저의 의무입니다.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