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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손희송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8월
평점 :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마음을 아리게 하던 겨울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워낙 술을 좋아하셨던 아빠였기에 가끔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곤 하셨는데, 그때 아빠 목소리는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내 귓가에 닿았다. 정민아, 잘 지내지… 오늘 태형이랑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나눴는데, 태형이가 네 걱정 많이 하더라. 핸드폰을 든 채 힘없이 대꾸하던 내게 아빠는 잠시 뜸을 들이다 한 마디 말을 남기셨다.
"정민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라.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바닥까지 추락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자존감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흐려지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시고 벌써 9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따뜻한 체온으로 남아 있다.
익숙한 온기, 사랑으로 닿는 말들
경륜과 영성 가득한 손희송 주교님의 책들 가운데 유독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에 마음이 쏠렸던 이유는 단순하다.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좋았다. 표지에 인쇄된 활자를 조용히 읊조리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부터 퍼지는 익숙한 온기가 좋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타인에게 가벼운 호의는커녕 나 자신조차 따뜻하게 바라볼 수 없던 내게 이 책은 돌아가신 아빠가 건넨 위로와 사랑의 말들로 다가왔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당신을 배신할 것으로 내다보시면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p.7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즉흥적이고 과격한 언행, 십자가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는 커녕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스승을 부인했던 베드로. 인간적 한계가 명확한 베드로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지만 예수님은 제자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세주였던 그리스도, 불멸의 존재가 건넨 사랑의 온기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인간은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더없이 완전한 피조물로 거듭난다. 불멸과 필멸의 찬란한 빛이 지상을 밝히는 순간, 부서진 틈 사이로 햇살처럼 스며드는 온기를 느낀다. 오직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분, 그리스도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나약한 의지와 게으른 천성, 시기와 질투만 가득해 모든 것이 늘 불만스러웠던 딸을 그저 측은하게 바라보셨던 아빠의 눈빛이 닿는 것 같아 아프기도 하다.
부질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데에 시간과 신경을 쏟지 말고 먼저 하느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좋은 점이 무엇인지, 나의 특성과 재능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해야 한다.
p.157
과거의 나는 항상 타인과 나를 비교하기에 바빴다. 인형처럼 예쁜 친구 앞에서 곧잘 위축됐고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싼 옷과 가방을 사들였고,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이 외모 지적을 하면 오랫동안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비하했고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
"정민이 넌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지성미 넘치는 얼굴이야. 내 딸이라 그런 게 아니라 너는 그 자체로 충분히 분위기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란다." 온종일 외모에 대한 생각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진심을 담아 조언하셨지만 철없던 난 아빠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나 자신의 본질은 더더욱 몰랐기에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던 딸을 바라보셨던 아빠의 눈빛, 주교님의 글에서 지난 세월의 회한과 아픔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며 가슴에 닿는다. 뒤늦은 깨달음은 항상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느님은 인간처럼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초월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p.172
인간의 지성과 생각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오감으로 그분의 신비를 헤아릴 수 없기에 우리는 매 순간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그분의 인내와 자비, 항구하심을 깨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침묵으로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봉헌할 수 있기를, 그분께 순명하지 못했던 과거를 끊임없이 참회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항상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그분의 사랑을 믿기에 고독과 침묵 속에서도 내 영혼은 평온하리라.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두 손 모으고 계실 아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