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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홍성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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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해안에서 멀어지자 한 남자가 뱃머리로 나선다. 사색이 된 부하들이 옷자락을 붙잡아 만류하지만 단호히 뿌리치며, 눈먼 폴리페모스를 향해 외친다.

"네 눈을 멀게 한 자는 이타카의 왕,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다."

살기 위해 '우티스'(아무도 아닌 자)란 가면을 썼던 그가, 보란 듯이 이름을 밝히자 포세이돈의 저주가 시작된다. 승리에 도취된 한 인간의 오만과 허세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순간이다.

<오디세이아>는 타고난 지략으로 승승장구하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숱한 고난 속에서 함대와 부하들을 잃고 바닥까지 추락해, 비로소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마주 보는 한 인간의 궤적이다. 불완전한 자신을 수용하면서 끝내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영혼의 본향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온전히 나로 살아간다는 것. 그 묵직한 화두를 홍성남 신부님의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면 마음에 힘이 생기고, 웬만한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p.61

생존을 위해 우티스란 가면을 쓰고 폴리페모스를 속였던 오디세우스가, 섬을 떠나는 순간 무모한 객기로 신의 분노를 산다. 그의 이런 오만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오디세우스는 자신에 대해 무지했다. 승리 앞에서 초연해지지 못했고, 만류하는 부하들의 간언에도 귀를 닫았다.
이타카의 왕이라는 권위와 전장에서 증명한 지략은 명백했지만, 치솟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다. 자기 한계를 모른 채 부린 만용은 십 년의 방황으로 이어졌고, 이타카를 향한 귀환은 점점 멀어졌다.

나 역시 그랬다. 타인의 인정을 얻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망에 휘둘려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꽤 오랫동안 착취적인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거절을 못 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천성 탓이라고, 처음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너무 착하게만 대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며 사는 사람은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p.84

함부로 선을 넘고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사람들에게 왜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나.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나는 누군가 건네는 작은 호의에도 쉽게 무너지곤 했다. 그들이 속삭이는 '착하다'라는 말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증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아무리 무시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았다. 나는 착하니까 그들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면 결국 인정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헛된 기대가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바다 위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었다. 끝없는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가볍게 대하기 쉽습니다.
p.122

돌이켜 보니 내가 순수한 선의라 믿었던 행동 중 대다수는 인정 욕구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무엇이 싫은지 알면서도 표현하지 않았고, 부당한 요구 앞에서도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번번이 나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홍성남 신부님이 말하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돌보고, 무엇이 부당한지 판단하며 감당할 수 없는 요구에는 거절할 줄 아는 삶이다.

타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매사 눈치를 보고 무리한 요구를 수락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존중하고 함부로 선을 넘지 않는 것만으로 관계는 유지된다.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건강한 자존감은 바로 그런 절제와 중용의 삶에서 시작된다.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작은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자꾸 흔들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p.256

바다 위의 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제는 타인의 인정에 휘둘려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한다.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되, 나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 것. 지금 내가 향하는 이타카는 그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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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지음,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 엮음, 방종우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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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년, 한 수도자가 동료들을 이끌고 인적 드문 숲속으로 들어간다. 세속과 등을 진 그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도적들의 은신처로 전해지던 음습한 골짜기, 고립된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바로 그 땅에 수도자는 클레르보(Clairvaux), 빛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황량한 골짜기에 뿌리를 내린 베르나르도는 동료들과 함께 기도와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은 사랑과 겸손,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자라났고, <신애론>은 그 사유의 한 정점으로 남게 된다.

총 2부로 구성된 <신애론>은 베르나르도의 원전과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의 해제를 함께 담고 있다. 책의 이해를 돕는 해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나는 원전부터 펼쳤다. 피아조니의 해석을 경유해 베르나르도를 만나기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와 먼저 마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경험해 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책 또한 나만의 독법으로 깨우쳐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사랑

베르나르도는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철저히 자기애에 갇힌 사랑이지만, 베르나르도는 이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에, 그는 이 낮은 자리를 사랑의 출발점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가장 깊은 사랑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며 존재 안에서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야말로 자기에게 갇힌 사랑을 확장하는 첫 번째 문이라고.

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다만 여전히 자아라는 틀에 갇힌 사랑이다. 신을 찾지만 오직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단계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 불순함마저 기꺼이 끌어안는다. 사랑은 본래 이렇게, 제 필요에 떠밀려 시작되는 법이니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게중심이 하느님에게로 옮겨간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들어서는 순간, 자아라는 굳건한 성채가 무너지고 육체의 모든 감각은 오직 한분만을 향하게 된다. 줄곧 안으로만 파고들던 사랑이 마침내 유일한 진리를 마주한 것이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하느님을 열망했던 베르나르도처럼.

네 번째 단계는 가장 낯설고 심오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언뜻 첫 단계와 비슷한 지점같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미성숙한 자기애에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하던 사랑이, 이제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이 망아의 정점을 탈혼(excessus)이라 부른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단언한다. 이 마지막 여정은 현세에선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합일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탈혼은 육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베르나르도가 기다리는 것은 육신의 부활이다. 모든 연약함을 벗어난 영화로운 육신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클레르보라는 이름이 다시 보였다. 베르나르도가 발견한 골짜기는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기도와 노동 속에서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마주했다. 그가 말한 사랑의 네 단계도 다르지 않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보상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의 결핍에서 비롯되어 존재를 관통해 그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내 안에도 어둡고 습한, 오래된 골짜기가 있다. 신앙은 그 골짜기를 메워주진 않았다. 다만 그 어둠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골짜기가 그분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채워지지 않는 자리, 그 결핍의 공간이야말로 빛이 스며드는 문이라는 걸, 베르나르도는 아홉 세기 전 클레르보의 어둠 속에서 그 진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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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비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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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아빠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나는 거동이 불편한 아빠를 부축하고 장루를 갈아드리며 그렇게 넉 달간 아빠의 곁을 지켰다. 거듭된 항암으로 체력이 바닥난 아빠는 가끔 중심을 잃고 비틀대곤 하셨는데, 한 번은 앞으로 크게 넘어져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아빠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 붕 떠있던 발끝이 비로소 땅 위에 내려앉고, 구체적으로 죽음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쳤다. 제목부터 나를 끌어당겼던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죽음의 신비>.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를 앞두고 봤던 고해 성사에서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선 사랑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또한 은총이니까요." 신부님뿐만 아니라 성당 지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아빠의 죽음은 은총이라고. 장애가 있는 몸으로 태어나 평생 모진 수모와 천대를 겪다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받았던 분께 은총이라니. 결국 은총이란 신의 무심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인가?
신부님과 자매님들의 위로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은총'이란 단어로 아빠의 고통 자체가 축소되는 게 싫었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내게 은총이란 단어는 버겁기만 했다. 그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슈파이어는 죽음이 산 자에게 구멍을 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구멍은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로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그 구멍을 아빠의 장례 미사에서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인지, 아니면 그저 공백으로 남겨진 자리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자매님이 그랬다. "하느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시고 자매님을 부르셨네요." 슈파이어는 말한다. 하느님께선 때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이용해, 남겨진 사람들에게 영원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주신다고.
저자의 논지대로라면, 아빠의 고통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그 생각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버거운 진실이었다. 결국 아빠의 죽음은 나를 깨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셨을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은 나를 위한 것이었나. 그 생각이 나를 십자가로 이끌었다.

저자에 따르면, 케노시스란 자아를 비워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성자께선 그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두려움이나 체념이 아닌 완전한 사랑. 성자의 십자가는 사랑의 최종적 수긍이었다.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선택된 죽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도 소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였을까.

본가에는 아직도 아빠의 물건들이 남겨져 있다. 주인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놓인 물건들을 마주하는 게 지금도 여전히 편치가 않다. 밑줄이 그어진 책들과 마지막을 예감하며 쓴 메모들을 뒤적이고 있으면 여전히 울게 된다.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내 가슴속 구멍은 그대로다. 슈파이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희망하고, 결국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지만, 성자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p.231)

폰 슈파이어는 죽음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 말의 온전한 무게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것은 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아빠의 빈자리를 안고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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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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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나는 완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두 달 남짓 일했던 학교에서 재계약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기에 일단 떠나기로 했다. 체념과 기대가 뒤섞인 채로.

터미널을 벗어난 버스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인트로가 끝나고 익숙한 멘트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빨간 책방 이동진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교수님 이야기입니다. 재미없을 것 같죠? 근데 아주 재밌습니다. 흡입력이 남달라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라는 책입니다."
낙방이 예정된 들러리 면접을 앞둔 그 길 위에서 나는 그렇게 <스토너>를 처음 만났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영문학개론을 듣던 스토너가 이 질문을 받는 장면에서 숨이 멈췄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완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른 도서관에서 펼쳐본 <스토너>는 그랬다. 처음인데 낯설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처럼. 이름부터 그랬다. Stone, Stoner. 삶의 모진 풍파를 홀로 버텨내는 바위같은 사람.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어딘가 답답한 인물. 그런 스토너에게 문학이 말을 건넨다. 신탁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는 금세 매혹당한다. 이디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문학도, 이디스도 결국은 평생을 두고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신탁은 어떤 면에서 형벌에 가깝다.

"그렇게 문학에 조예가 깊으십니까?"
면접 당일 교감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제 나름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는 역시나 낙방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스토너>를 읽으며 그 순간을 복기하고 있나. 그것도 아처 슬론이 스토너에게 던진 질문 속에서. 전혀 다른 맥락의 두 질문 앞에서 나는 고민했다. 문학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아니면 실패가 예정된 삶을 지속하는 스토너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걸까?

스토너의 삶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학자로서 성취는 미미했고, 이디스와의 결혼은 균열투성이였으며, 딸 그레이스의 방황은 그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캐서린과의 사랑은 짧았고, 로맥스와의 대립은 그의 완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그 무엇도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악물고 버틴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받아들인다. 불행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기본값으로 끌어안는다. 스토너의 삶은 체념이 아니라 수용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의 인생을 '패배자의 초상'이라 폄하할지 모른다. 유연한 처세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바위 같은 뚝심이 문제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에서 숙연함을 느꼈다. 아처 슬론의 질문은 스토너에게 신탁이었다. 신탁은 일종의 형벌이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그 형벌을 끌어안고 살아갔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이기 때문에. 거듭된 패배를 통해 스토너는 자신만의 신탁을 완성했다.

"그렇게 문학에 조예가 깊으십니까?"
2015년 여름, 완도에서 받았던 질문 앞에서 나는 말없이 <스토너>의 책등을 쓰다듬는다. 바위처럼 우직한 한 남자의 생애가, 그가 감내했던 신탁의 무게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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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론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의태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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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위 위에 한 젊은이가 홀로 앉아 있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성소聖召라는 거룩한 운명 앞에 섰다. 상실감과 두려움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고개를 든 젊은이의 얼굴에는 눈물 대신 미소가 번진다. 포기한 자의 허탈함이 아닌, 길을 찾은 자의 평온함이 영혼을 감싼다. 훗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아버지가 될 프란치스코 교황, 청년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모습이다.

영화 <두 교황>의 이 장면은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 있었다. 사랑을 잃고도 웃을 수 있는 저 초연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회한과 상실로 남은 기억 앞에서 주저앉은 내게, 그 미소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신비였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싶은데, 현실은 냉혹했다.
상처 없이 완전한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삶'을 원했다.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부정하면서.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솔직히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의무감으로 선택한 책이었기에. 제목부터 <행복론>이라니. 펼치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마음을 비워라' 같은 말들만 가득하겠지. 분명 좋은 말이지만, 마음을 울리지는 못하는 클리셰들.
그저 그런 '도덕 교과서' 같은 위로를 예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내심 당황했다. 교황님은 뜬구름 잡는 영적 통찰이나 어려운 신학 용어로 가르치려 들지 않으셨다.
'상처'를 언급하고 '고유함'을 이야기했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구절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어떠한 상황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어쩌면 자신의 과거를 '리셋reset'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을 권리를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가 없는 성인은 없고, 미래가 없는 죄인도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진주는 조개의 상처에서 탄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진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p.75

이 문장을 읽는 순간, 2008년 겨울이 떠올랐다. 거의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통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웹 소설 주인공처럼 회귀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망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삶의 얼룩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하지만 교황님은 그 얼룩을 '진주가 될 상처'라고 부르셨다. 어쩌면 인간 각자의 고유함은 '상처'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역사에 새겨질 수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열망하는 이들의 희망이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하나뿐인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85

이제 나는 영화 속 젊은이,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미소를 이해한다. 그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세속의 행복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가장 나다워지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고유함은 거룩한 삶으로 이어져 상처를 품어낸 진주처럼 뚜렷한 생의 무늬가 된다는 걸, 교황님은 당신의 삶으로 몸소 증명하셨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또 넘어질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니까. 하지만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매번 아버지가 일으켜 세워줘야 하는 아이들(p.148)'이라고.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넘어져도 괜찮다. 그 상처 또한 나의 고유함이 될 테니까.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의 얼룩은 백지가 될 수 없다. 상처가 진주가 된다는 건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을 감싸 안은 흔적이 나만의 결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상실의 아픔을 품고 하느님께 나아갔던 젊은 시절의 호르헤처럼, 나 또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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