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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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선생의 『중국중세사』는 원제가 '대당제국(大唐帝国)'입니다. 그런데 정작 책을 펼치면, 당 제국의 역사가 서술된 부분은 불과 1할 남짓할 정도로 소략합니다. 당이 들어서기 이전인 위진 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기에 '대당제국'이라는 제목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미야자키 선생도 이 점을 모를 리 없었는지 저서에 '중국중세사'가 아니라 '대당제국'이라고 제목을 붙인 까닭을 서문에서 밝힙니다.



미야자키 선생은 후한(後漢)이 멸망한 3세기 전반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으로 나뉜 중원을 송(宋)이 통일하는 10세기 중반까지를 중국사의 중세로 여깁니다. 하지만 송대 이후를 중세로 보는 학설도 있음을 존중하여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처음 머릿속에 떠올린 '중국중세사'를 제목으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에 중세사를 대표하는 국가인 당 왕조를 내세워서 책 제목을 '대당제국'으로 결정했다고 미야자키 선생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글쓴이가 원래 의도하였던 제목으로 되돌아갔으니 얄궂은 운명입니다.


서문의 끝에서 "당 성립 이전의 오호남북조로써 당의 본질을 말하는 필법"을 썼다고 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미야자키 선생의 또 다른 저서 『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이 수양제(隋煬帝)의 치세만 다루지 않고 그 전후사도 아울러 훑어보면서 중세라는 '큰 골짜기의 시대'가 낳은 폭군이 수양제임을 설득력 있게 서술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당 제국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는데, 책을 읽다 보면 '대당제국'이 허투루 쓴 표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중세는 어떻게 시작하였을까요? 사회 경제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는 교토[京都] 학파의 중심인물이었던 학자답게 미야자키 선생은 경기 순환 개념을 도입하여 시대를 구분하였습니다. 경제 발전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던 한 제국은 말기에 접어들면서 경기 불황에 시달립니다. 당시 동아시아보다 문화 수준이 높은 지역인 서아시아와 무역하면서 황금이 외부로 계속 유출되었고, 중국 주변의 사금마저 대부분 고갈되면서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은 탓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동맥 경화증에 걸린 상태라고 해야겠지요. 그러자 돈이 있는 부자들은 장원을 개발하여 자급자족을 꾀하게 됩니다. 뒷날 육조(六朝)를 거쳐 당대(唐代)에도 영향을 미치는 장원 경제가 발달하면서 고대 사회는 큰 변화를 맞습니다.


"장원은 별업(別業) 또는 별서(別墅) 등으로 불렸다. 그 때까지 인민의 본거지는 성 안에 있었고, 그 소유지는 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교외에 있었다. 그런데 장원은 성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와 산지의 경계 가까이에 설치되었다. 그 곳에는 소유자의 저택 이외에 노동자들의 집도 설치되어 촌락을 형성했다. 소유주는 본래 성 안의 그들 저택에 거주하는데, 때때로 순시하다 숙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것을 별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유럽에서 빌라[별장]가 성립한 것과 방법을 같이한다. 이와 함께 고대의 도시제도가 붕괴해 가는 것이다."


화폐가 부족해지자 누구보다 고통받는 건 평범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동전으로 세금을 내기 어려워지면서 본적지를 떠나는 백성이 하나둘씩 생겼습니다. 유랑자가 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거나 장원에 들어가 예농으로 일하거나…….


자유민에서 예속민으로 전락한 백성이 늘어난다는 건 군역에 징용하거나 조세를 징수할 공민이 줄어든다는 뜻이기에 국가가 받는 타격은 컸습니다. 그에 반비례하여 장원주는 힘이 세지면서 중앙의 지방 통제력은 나날이 약화하였습니다. 엎치고 덮친다고 조정 안에서 황실 외척과 환관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은 혼란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유비와 조조가 대화하는 장면을 그린 『삼국지연의』의 삽화(위키백과)



결국, 희망을 잃고 종교에 기댄 백성들이 머리에 노란 수건을 두르고 '황천(黃天)'을 외치며 무기를 들고 일어서기에 이릅니다. 이른바 황건의 난이 벌어진 것입니다. 반란은 이내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권위를 잃은 한 제국은 이미 무너진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반면에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지방에 근거를 둔 군벌이 득세하는데, 우리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잘 아는 동탁(董卓), 원소(袁紹), 원술(袁術), 손견(孫堅), 유비(劉備), 조조(曹操) 등이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삼국지'의 시대와 함께 중국의 중세가 시작된 셈이지요.


경제 문제를 화두로 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출현을 설명하지만, 풍부한 예시와 비유를 든 덕분에 어려운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또 솥발처럼 갈라진 천하가 진(晉)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갈라져 숱한 국가와 인물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과정은 소설을 읽는 듯 흥미진진합니다. 미야자키 선생이 왜 탁월한 역사학자이자 빼어난 이야기꾼인지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촌철살인의 문장은 글의 품격을 더합니다. 당 제국이 건국되기 직전 상황을 묘사한 다음 구절은 "당 성립 이전의 오호남북조로써 당의 본질을 말하는 필법"의 정수라고 할 만합니다.


"남북조의 역사는 실로 어둡다. 통치자에게 어둡다면, 피통치자에게는 당연히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빨리 새로운 빛을 맞이하고 싶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정치의 대세를 움직인다. 그러나 세상은 한 걸음에 밝게 되지 않는다. 수왕조의 실패가 야기한 혼란을 가라앉힌 원동력은 결국 수왕조와 마찬가지로 오랜 기반을 가진 무천진군벌 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밖에도 『중국중세사』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중국사 최대 분열기인 중세에 당 제국은 이례적으로 300년 가까이 통일 중국을 다스렸습니다. 특히 중간에 안사의 난처럼 크나큰 시련을 겪었음에도 멸망하지 않고 1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미야자키 선생은 이번에도 역시 경제에서 답을 찾는데,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직접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하나 귀띔하자면, 안사의 난을 계기로 이전처럼 무력으로 국가를 지탱하는 일은 시대에 뒤처졌음을 당 조정이 깨달았다는 점에 해답이 숨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중세와 유럽의 중세가 어떤 면에서 같은지 견주어 본 것도 재미있습니다. 예컨대 로마 제국이 용병으로 부리던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듯이 삼국을 통일한 진 제국도 흉노 등 이민족을 끌어들여 군대로 쓰다가 몰락을 맞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동서양의 차이점도 뚜렷함을 간과하면 안 되겠지만, 비교역사학의 관점으로 중국사를 바라보면 시야가 넓어지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 2018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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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3
박한제 지음 / 사계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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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살던 이들의 후손이 일으켜 세운 세계 제국 당은 ‘장안의 봄‘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나, 봄은 짧았고 여름·가을·겨울이 더 길었다. 너무 짧았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그때 그 봄날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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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낭만과 비극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2
박한제 지음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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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시대 장강 이남에서 꽃피운 귀족 문화는 화려하였으나, 그 속이 아름답지만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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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시대의 빛과 그늘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1
박한제 지음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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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로 뒤덮이고 세월에 풍화된 중국 중세사의 흔적을 되짚으면서 오호 십육국 시대는 중화를 어지럽힌 혼란기로만 여길 수 있는지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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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 -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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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마음으로 이 땅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짖던 그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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