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교과서 파동
윤종영 지음 / 혜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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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런데도 학계가 그간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1987년 트라우마' 때문이다. 당시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강단·재야학계 토론회가 열렸는데, 청중들은 강단사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모욕적인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이후 학계는 이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툭하면 내놓는 '공개토론하자'는 얘기는 '일단 불러낸 뒤 청중을 동원해 망신을 주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토론 참가 경험이 있는 한 학자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을 해도 대답은 안하고 식민사학에 찌들었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야유만 보내는 데 무슨 토론이 되겠냐"고 말했다."



2016년 3월 4일 자 『한국일보』 기사에 나오는 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의 토론회는 '한국 상고사의 제 문제'라는 주제로 1987년 2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열렸습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의 역사 담당 편수관으로 일한 윤종영 씨는 1999년에 쓴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정문연이 이 토론회를 연 까닭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정문연은 고대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재야 측의 기존 학계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양측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학문적으로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이를 계획, 추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임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정문연 관계자를 만나 재야 측과 여러 차례 만나 대화해 본 경험으로 보아 정상적인 학술회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더욱이 이들에게 무조건 성원을 보내는 일반 청중이 다수 참여하는 장소에서는 진지한 학문적 토론이 불가능하니 원고만을 받아 논문집으로 내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청중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편수관이 되고서부터 유사 역사학 또는 사이비 역사학에 빠진 이들의 등쌀에 수없이 시달린 윤종영 씨는 이들과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으리라고 예감하고 이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정문연 원장이 행사 개최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데다가 이미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와 상당한 물밑 접촉을 한 뒤라서 토론회 일정을 바꿀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민족사 바로잡기국민회의는 유사 역사학자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이 모임의 의장이 윤보선 전 대통령이었고, 부의장이 당시 국회의원인 이종찬 씨였을 만큼 유력 정치인들도 다수 참여하였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일개 편수관인 윤종영 씨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덕일 씨의 선동으로 폐기된 동북아역사지도(뉴시스)



결국, 제날짜에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는 고고학과 고대사 두 분야로 나눠 주제 발표와 토론 순서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토론회를 보러 온 청중의 숫자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적어도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윤종영 씨가 우려한 대로 토론회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26일 대강당에서 열린 종합토론회는 손보기 교수가 사회를 보았는데 회의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고조된 회의 분위기 때문에 발표자와 토론자 가운데 일부가 자리를 뜨고 윤내현·이기동·임효재·임승국 등만이 자리를 지켰다. 재야 측과 이들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청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윤내현 교수, 임승국 씨, 손보기 교수 등은 재야 측의 지지를 받는 학자들이었고 모든 공격의 화살은 기존 학계 측의 학자로 외롭게 자리를 지키던 이기동 교수에게 쏟아졌다. 학자와 학자 사이의 토론이 아니고 방청객들과 단상에 있는 학자 사이에 질의 응답이 오갔다. 단군조선은 신화인가, 정말 존재한 왕조인가 하는 것이 그 초점이었다. 이기동 교수가 문헌사학의 입장에서 문헌의 신빙성 문제를 사료 비판적 차원에서 설명하자 설명을 계속해 나가지 못할 정도의 공격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로까지 번져 일제 식민사관을 들먹이면서 듣기 민망할 정도의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기존 역사학자들을 성토하려는 방청객들이 서로 발언하려고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고, 마이크를 얻지 못한 일부 방청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의 이 교수를 향해 고성을 지르고, 일부는 단상으로 몰려가고 난장판이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이기동 교수는 비교적 침착하게 단상에 앉아 자기의 뜻을 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자리를 계속 지키기가 면구스러워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 방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를 통해 발언 내용을 들으면서 이러한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회의장을 나왔다."


당시 서울대학교박물관의 관장인 임효재 교수는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에 그날의 분위기를 권투 경기에 빗대었습니다. 그 정도로 토론회는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는데(관련 글), 토론회를 취재한 『동아일보』 기사에는 청중이 내뱉은 말이 일부 나옵니다.




죄인을 조리돌리는 것도 아니고, 이기동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했을까요? 토론을 빙자한 사이비들의 시비 걸기에 역사학자들이 학을 뗄 만도 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정문연의 토론회가 끝나고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가 이와 같은 자리를 또 마련하면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참석하라고 학자들에게 통보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응한 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편수관으로서 내키지 않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윤종영 씨는 또 고통을 받았습니다.


"회의 벽두에 사회자는 주최 측이 참석자들에 대한 사전 양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초청을 한 미숙한 준비에 대한 사과보다 불출석한 위원들의 무성의와 이번 회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불출석 위원과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국민회의에 참여한 많은 사람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과거의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행정부의 관료를 불러 호통치는 식으로 학자들도 일방적으로 호출하면 나와야 되고 질책하는 소리를 조용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회자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거북하여 밖으로 나와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87년 트라우마'라는 말이 결코 지나친 게 아닙니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이후 사이비들이 준동하는 것을 방관하다시피 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결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원하던 여러 사업이 좌초된 것은 또 다른 불행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 제2의 국사교과서 파동이라고 할 만한 사건까지 겹치면서 불행은 더욱 커졌습니다. 더는 트라우마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움츠러들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물론 그동안 사학계가 대중들과 접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만 꼽자면, 『한길역사강좌12 - 한국고대사론』은 문제의 정문연 토론회로부터 몇 달 뒤에 여러 학자가 일반인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었고, 1987년에 창간해서 2012년에 종간한 『한국사 시민강좌』도 학계의 성과를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나온 잡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대개 단발성으로 그쳤기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방법으로 사이비들과 맞서야 할 때입니다.

- 201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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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개설 - 증보판
송환도웅 외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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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을 둘러싼 환호가 제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으로 바뀌기까지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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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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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수양제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남북조 시대가 낳은 역사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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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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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역사가이자 빼어난 이야기꾼인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이 말하는 중국사 최대 분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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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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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한 뒤 천여 년 동안 그 땅에 선 <광개토왕릉비>를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잊었습니다. 물론 그 커다란 비석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으니 비의 존재 자체는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을 금(金) 황제의 비로 착각할 만큼 비문 내용까지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석은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 재위 391~412)의 비로 '재발견'됐는데, 정작 조선인들보다 일본인들이 비석에 적힌 글에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왜(倭)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신묘년조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신묘년조가 고대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여겼습니다. 고구려인들이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 엉뚱하게도 고대 일본을 미화하는 자료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일본 군부는 <광개토왕릉비>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짰습니다. 한반도에 '진출'한 왜의 활약상을 적은 비를 일본 국민에게 직접 보여 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었을까요? 아니면 비문을 조작한 일을 숨기고자 함이었을까요? 그런 추측과 달리 비석 반출 계획을 추진한 이들은 뜻밖에도 왜가 고구려에 끝내 지는 바람에 대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비석을 일본으로 가져오자고 제안한 동양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는 "고구려는 마치 지금의 노국(露國, 러시아)과 같은 관계여서 일본이 반도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 하면 고구려가 이를 누르려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부의 삼국을 지배하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북부의 고구려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북의 노국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선에서 세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전에는 지나(支那, 중국)와 싸웠고 지금은 노국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상의 관계에서 일본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러일 전쟁을 전후한 당시 상황을 고대사에 고스란히 투영한 시라토리의 눈에 고구려는 마치 러시아처럼 보였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고 전쟁을 벌이듯이 고구려와 왜도 고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는 게 시라토리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면서 그는 왜가 고구려에 진 '재미없는 것'이 비석에 적혔음에도 비를 일본으로 가져온다면, 사람들의 분개심을 자극하는 교훈으로 삼아 같은 일을 또 겪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행히 시라토리의 제안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일화는 근대인들이 고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상징하는 듯한 사건입니다.



'근대 텍스트'로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의 모습(동북아역사재단)



해방 이후 <광개토왕릉비> 논쟁은 더욱 뜨거워지는데, 역시 신묘년조가 문제였습니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은 신묘년조 문장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바꿔야 옳다며 해석의 뒤집기를 시도했습니다. 한학자답지 않게 정인보 선생이 새로 풀이한 문장은 한 문장 안에서도 행위의 주체가 자꾸 바뀌어서 어딘지 어색했지만, 고구려 우위의 해석은 북한 학자들도 따를 만큼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비문을 일본에 대해 한민족이 승리한 기록으로 봤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시라토리가 비문의 왜에서 근대 일본을 읽었듯이 정인보 선생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근대 한민족을 읽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해석과 한국의 해석은 정반대인 양 보여도 어떻게 보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대인인 고구려인이 쓴 비문은 근대의 텍스트로 읽혔습니다.



사실 전체 글자가 1,700자가 넘는 비문에서 신묘년조는 겨우 32자에 불과한데도 비석을 재발견한 뒤 백여 년 동안 신묘년조에 집중해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고 신묘년조를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진실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문에는 백제와 신라가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쳤다고 적혔지만, 막상 백제와 신라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펄쩍 뛰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항의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부여가 추모왕(鄒牟王, 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록도 고구려의 과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인의 시각을 짙게 반영한 비문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신묘년조를 해석하며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봤기에 이런 허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이들이 비로소 고구려 텍스트로서 비문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전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내용이 나뉘는데, 그 가운데 맨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는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새겼습니다. 광개토왕의 공적을 칭송하는 글만 적혔으리라고 막연히 여긴 사람이 비문을 처음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만큼 이 부분은 길고 자세합니다. 심지어 수묘인이 어디 출신인지까지 밝혔을 정도이지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고구려에서는 선왕들의 무덤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수묘인을 함부로 사고파는 '부유한 자'들이 나타나는 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부유한 자들은 5부에 소속된 지배층이었을 텐데, 이를 걱정한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을 정비하고 수묘인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 규정에 의해 광개토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는 무려 330가(家)나 되었다고 합니다. 구민(舊民)으로 불린 고구려 출신 110가의 수묘인연호를 제외한 나머지 200가의 수묘인연호는 광개토왕이 백제 등을 공격해 포로로 빼앗은 한(韓)과 예(濊) 사람들이었는데, 그 출신지를 따져 보니 이들 대부분이 광개토왕이 공파한 64성에서 왔음이 드러났습니다. 광개토왕의 무훈을 적은 비문의 두 번째 부분과 수묘인 규정이 서로 맞물린 내용이었던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생전에 거둔 모든 전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비문의 글쓴이는 수묘인 제도와 얽힌 싸움을 주로 기록하려고 했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관미성 전투나 후연(後燕)과의 전쟁은 비문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왕실이 우리 생각보다 수묘인 제도를 훨씬 중시했으며, 비문도 그와 깊은 연관을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의 무덤 앞에 우뚝 선 거대한 비석과 무덤을 지키는 천 명도 넘는 수많은 수묘인을 보면서 왕의 업적을 마음속에 되새겼겠지요. 그리하여 한때 흔들렸던 왕실의 권위는 다시 섰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그리 눈여겨보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며 비문을 해석하면, 거기에는 고대 일본의 영광이나 한민족의 승리와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가 엿보입니다.



"비문이 새삼스레 신성한 왕가의 출자(出自)와 계보를 강조하고 또 광개토왕릉의 수묘인이란 고구려 고유의 질서 세계를 지키는 이른바 정의의 전투, 즉 성전(聖戰)의 결과가 초래한 것이라 역설한 것은, 왕가의 위신을 체현한 능묘의 수호조차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이었음에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배후에서는 고구려 지배층 내 집단들 사이의 균형 관계와 상호 긴장 관계가 있었음도 간파할 수 있다.



비문의 필자는 시조 이래의 계보를 이어받은 위대한 왕의 훈적과 그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들의 내력을 기록하고 수묘역 체제가 앞으로 영원히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니 만큼 그 내용은 바로 비문의 독자인 지배 공동체(5부) 내부의 상극(相克)과 긴장의 산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재일 한국인 2세로 고대 동아시아사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 이성시 교수가 쓴 『만들어진 고대 - 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는 앞서 살펴본 <광개토왕릉비>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뒤틀린 고대사 인식을 고발합니다. 이 책에서 글쓴이는 근대 민족주의가 고대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합니다.



발해사를 서로 자국의 역사로 끌어당기려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관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오릅니다. 발해의 지배층에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있었음을 애써 무시하고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보려는 중국이나 근거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남북국 시대론을 내세워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고자 여러 사료에서 나타나는 말갈의 존재감을 줄이는 한국이나 똑같이 문제가 있다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발해사 논쟁은 겉으로 볼 때 역사 논쟁인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십 개가 넘는 소수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해야 하는 중국과 남북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적인 정치 과제가 숨었습니다.



"각국의 발해사 연구는 이러한 현실적 과제가 직접·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현실적 과제의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과제의 무게는 각각에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정치 과제를 매개 없이 역사에 투영하거나 혹은 가탁하는 불모성(不毛性)을 문제삼으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내부를 향한 선전은 될 수 있어도 국제적인 범위에서 학술적으로 발해의 족속 문제를 해명하는 데는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없다."



발해를 우리 민족의 나라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국사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의 틀을 다시 짜야 하는 오늘날에 이성시 교수의 말을 새겨들을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5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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