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테마 한국문화사 3
김동욱 지음 / 돌베개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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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백미인 수원 화성의 이모저모를 알려 주는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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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한국사 - 한국사 밖의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엮음 / 푸른역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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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잡히고, 꺼려지고, 잊혀진 이들을 위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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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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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동(莫同)은 몰락한 양반집의 노비였습니다. 비록 노비 신세이지만, 남의 종노릇이나 하다가 늙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어느 날 주인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 옛 주인인 송생(宋生)과 우연히 만난 '반노' 막동은 자기가 양반이 된 사연을 말합니다.



주인집을 나선 뒤 막동은 대가 끊긴 최씨(崔氏)의 집안사람인 양 행세하며 서울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돈을 웬만큼 모으자 시골로 이사한 막동은 양반처럼 글을 읽고, 재물을 써서 주위의 환심을 삽니다. 사족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막동은 한 무변의 딸을 아내로 맞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해 동부승지까지 지낸 막동을, 마을 사람들은 '최 승지'로 부르며 유지로 대접합니다. 송생은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린 막동의 모습에 놀라 감히 추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송생은 막동이 입막음하려고 준 돈을 받고 그의 비밀을 지켜 줍니다.


이것은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망한 노비가 신분 세탁에 성공하여 크게 출세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점에서 신분 제도가 서서히 무너지던 조선 후기의 세태를 엿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막동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일이었을까요?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을 읽으며 그 의문점을 풀어 봤습니다. 경상도 단성현에 살았던 수봉(守奉)과 그 후손들의 호적과 족보를 조사한 이 책에서 우리는 막동처럼 신분 상승을 꿈꿨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김득신의 <노상알현도>에서(우리역사넷)



17세기 중엽에 태어난 수봉은 원래 심정량(沈廷亮)이라는 양반이 부리던 노비였습니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노비였습니다. 수봉의 조상들이 언제부터 노비 신세가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노비로 태어난 수봉이 노비의 굴레를 스스로 벗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노비였음에도 재산을 제법 지닌 수봉은 재산 일부를 나라에 바쳐 면천합니다.


다만 막동이 곧바로 양반이 된 것과 달리 수봉은 평민이 된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양반을 자처하려면 수봉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김(金)이라는 성을 쓰고, 아들의 이름을 고유어계에서 한자어계로 바꾸고, 납속통정대부라는 직역을 얻고, 조상들의 신분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만으로는 양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양반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머나먼 여정'이었습니다.


"김수봉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유학을 칭하기 시작한 것은 1831년에서 1867년 사이에 등장하는 그의 5세손과 6세손 단계에서였다. 19세기 호적은 내용이 소략한 데다 엄밀성도 이전 시기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수봉의 후손들도 기재되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호적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유학을 칭했다. 그 시기는 대개 19세기 중엽부터다. 김수봉의 후손들이 중간층의 직역을 획득한 뒤 다시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한때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유학이란 호칭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는 수봉이 노비에서 해방되고 약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물론 직역을 유학(幼學)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진짜 양반님네는 수봉가를 혼인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상의 구별이 점차 흐릿해져도 그들에게 수봉가 사람들은 가짜 양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수봉가는 그 벽을 뛰어넘으려고 본관을 김해에서 안동으로 바꾸거나 양반 문화를 받아들여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을 추진합니다. 족보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막동처럼 벼슬길에 나가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수봉가가 학문적 성취까지 이루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수봉과 수봉의 후손들은 당대 사회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민란의 들불이 삼남 지방을 휩쓸었을 때도 수봉가가 거기에 가담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편법을 아예 안 쓴 것은 아니나, 대체로 합법적인 수단으로 지위 상승을 꾀한 그들은 시대에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양반을 향하여 나아가는 수봉가의 기나긴 도전은 충분히 인상 깊습니다. 그러한 도전이 모이고 모여 견고한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고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고 생각한다면, 수봉가와 같은 장삼이사들의 삶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 2016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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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사 - 되찾은 주몽신화의 시대
김기흥 지음 / 창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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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주몽 신화'라고 부르는 고구려 건국 신화를 포함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은 설화의 냄새가 짙습니다. 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서기전 37~서기전 19) 주몽(朱蒙)이 부여를 빠져나와 추격자들을 피해 강을 건널 때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었다거나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 탔다는 신마(神馬)에 얽힌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 속에 숨은 역사성을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습니다. 뒷사람들이 부풀렸거나 꾸몄을지 몰라도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몽이 비류수에 처음 다다랐을 때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초막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나라를 막 세웠을 무렵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기록들을 신화나 전설로만 여겨서 버리기보다는 역사로 복원해 재구성해야 마땅합니다.



김기흥 교수의 『고구려 건국사 - 되찾은 주몽신화의 시대』는 주몽이 남하해 졸본 부여에 자리 잡으면서 막을 올렸다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이 암살되면서 막을 내린 고구려의 신화시대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신화와 전설로 윤색된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신화에서는 인격신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는 주몽이 역사에서는 동부여 왕의 후궁이 낳은 아들이었으리라고 김 교수는 설명합니다. 왕의 서자였던 주몽이 어떻게 신의 아들이 되었을까요?


"주몽을 금와왕의 서자로 보는 데도 이유가 있다. 신화가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주몽신화에는 주몽과 금와왕의 관계가 매우 모호하고 독특하게 나온다. 신화에 의하면, 주몽은 햇빛에 의해 잉태되어 동부여왕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나고 금와왕의 아들이 아닌데도 왕자들과 같이 생활한다.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는 금와왕의 별궁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동부여 태후의 예로써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사실인즉 주몽의 어머니는 금와왕의 후궁으로서 별궁에 산 것이며, 주몽은 서자지만 왕자라서 다른 왕자들과 사냥도 하며 생활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주몽신화는 주몽이 왕의 서자라는 신분상의 흠을 하늘의 아들이라는 논리로 꾸미는 과정에서 이렇게 모호한 가족관계를 그리게 된 것이다."


역사가 신화가 되면서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해마다 시월이면 열린 국중대회 동맹(東盟)에서 제사 지냈다는 굴의 신인 '수신(隨神)'은 땅의 신이자 물의 신이기도 했는데(관련 자료), 언젠가부터 고구려인들은 수신과 유화를 동일시하였습니다. 신앙이 토착화하면서 왕의 첩이던 유화가 곡식을 맡아 다스리는 여신으로 떠받들린 것이지요. 이제 여신 유화에게 어울리는 짝은 한낱 인간이 아니라 신이어야 했습니다. 땅이 있으면, 하늘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들은 하늘의 신을 해모수로 탈바꿈해서 유화와 짝지었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몽이라고 말하여 '천손(天孫)'이라는 신성한 옷을 입혔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수신을 맞던 국동대혈의 모습(세계일보)



김 교수는 이러한 주몽 신화의 기본 줄거리가 고구려 초기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후기에야 고구려인들이 신화를 완성했다는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김 교수의 주장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일찍부터 자기들의 영웅인 주몽을 이야기했으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왕실에서 그 이야기를 언제 받아들였는지 다른 문제입니다. 2~3세기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존재한 고대 국가들의 상황을 알려 주는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 문헌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는 추상적인 구절만 나올 뿐입니다(관련 자료). 이것은 주몽의 방계로 보이는 태조왕(太祖王, 재위 53~146)이 왕위에 오르면서 주몽 신화가 오랫동안 왕실의 공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4세기 중엽에 전연(前燕)의 침공으로 수도 국내성이 무너지고, 뒤이어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백제군과 싸우다가 죽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고구려 왕실은 국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추모왕(동명성왕)계와 태조왕계로 갈라진 왕계를 하나로 잇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예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던 주몽의 이야기에 새삼 귀를 기울였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승자가 된 주몽은 왕실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했습니다. 그리하여 5세기에 쓰인 <광개토왕릉비>의 첫머리는 주몽의 이야기로 장식되었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과 동시대를 산 중급 귀족인 모두루(牟頭婁)도 자기 조상과 주몽이 인연이 깊었다는 글을 제 무덤 속에 새겨 가문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주몽은 왕실을 넘어서 고구려 지배층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야기의 틀은 일찌감치 이루었지만, 주몽 신화가 고구려 곳곳으로 퍼지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린 셈입니다.


또한, 김기흥 교수는 『삼국사기』나 『구삼국사(舊三國史)』의 기록을 따라 주몽의 출자지(出自地)를 동부여로 봤는데, 사실 동부여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서 한참 뒤에 나타난 나라입니다. 외침으로 부여 사람들이 피난한 곳에 들어선 나라가 동부여라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은, 부여가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었다는 중국 측 기록과 맞부딪칩니다(관련 자료). 무엇보다 <광개토왕릉비>가 주몽의 출자지로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를 가리키는 것만 봐도 동부여출자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 부분에서 의견이 엇갈리지만, 『고구려 건국사』는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알기 쉽게 풀어 놓은 책입니다. 무엇보다 신화에 반영된 고대인의 생활상과 가치관을 아울러 설명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옛일들을 이해하게끔 한 점은 큰 장점입니다. 독자들이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소설 문체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중간중간 해설을 덧붙인 구성도 돋보입니다. 물론 글쓴이가 소설가가 아니기에 서툰 문장도 가끔 눈에 띄지만, 대중과 함께 호흡하려고 애쓴 김 교수의 마음은 높이 평가해야겠습니다.

- 2015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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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엮음 / 사계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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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시대정신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 단군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고조선을 둘러싼 쟁점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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