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1
김현구 외 지음 / 일지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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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진 덴노 치세부터 닌켄 덴노 치세까지 고대 한일 관계사의 여명기를 고대 일본인들은 어떻게 바라봤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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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흥 지음 / 창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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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신라답게 한 중고기를 살펴봄으로써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룬 힘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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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사 - 되찾은 주몽신화의 시대
김기흥 지음 / 창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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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온 고구려 초기사를 그린 대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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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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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고구려 침략의 원흉으로 잘 알려진 수양제(隋煬帝, 재위 604~618)는 중국사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후한(後漢)이 멸망하고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분열을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수(隋) 제국은 건국한 지 40년이 채 안 돼 수양제의 학정으로 무너졌고,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서 허덕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를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선생은 수양제를 가리켜 "근본부터 악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아주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라고 평가합니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중국 최악의 폭군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야자키 선생이 1965년에 쓴 『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은 수양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수양제만 이야깃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수양제의 아버지 수 문제(文帝, 재위 581~604)와 무천진 군벌 출신인 그의 가문 그리고 남북조 시대의 천자들까지 이야기하며 수양제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무엇이었는지 따져 봅니다. 이것은 미야자키 선생의 명저 『대당제국(大唐帝国)』(국내에는 '중국중세사'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제목처럼 당 제국의 역사만 다루지 않고, 740년에 걸친 중국 중세사를 두루 살피며 그 흐름 속에서 당 제국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내고자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수양제는 최악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나, 그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못나고 어리석은 천자가 수두룩했습니다. 특히 남북조 시대는 남조든 북조든 가리지 않고 폭군과 암군이 자주 나타난 암흑기였습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천자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들고일어나서 천자를 갈아치워도 얼마 못 가서 폭정을 일삼는 천자가 또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 왕조가 오래가지 못했고, 천자들의 평균 재위 기간도 짧았습니다. 미야자키 선생은 책의 첫 장에서 남북조 시대에 악명을 떨친 여러 폭군과 암군의 기괴하고 이상한 행태를 늘어놓으며, 수양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한편 북주(北周) 황실의 외척으로 실권을 장악한 양견(楊堅)은 581년에 제위를 빼앗고 수 제국을 세웠습니다. 뒷날 수 문제로 불리는 양견은 강남에 자리 잡은 진(陳)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589년에 진의 수도 건강을 쳐서 마침내 통일 대업을 이뤘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수 문제는 선정을 펴서 기나긴 전쟁으로 생긴 혼란을 수습해 민생을 안정화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열심히 정사를 돌봤고, 사치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수 문제가 황제답지 않게 무척 검소하게 생활한 덕분에 국고에는 식량이 넉넉히 채워졌습니다. 확실히 수 문제는 전 시대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군주들과 격이 다른 명군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 수 문제가 어렵사리 기초를 다진 제국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까닭은 가정 교육에 철저히 실패한 탓이었습니다.


수 문제에게는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모두 어딘가 비뚤어져서 제국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습니다. 무엇보다 수 문제의 뒤를 이어야 할 맏아들 양용(楊勇)은 황태자로서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바람직하지 못한 행실로 아버지의 속을 썩였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 양광(楊廣)은 부모님 앞에서는 효자인 양 '코스프레'를 해서 부모님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뒤에서는 형이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양광의 모함은 성공하여 양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양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버렸습니다. 형을 밀어내고 새 황태자가 된 양광은 수 문제가 죽고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형을 죽이고 자기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막내아우를 힘으로 내리눌렀습니다.


"이로써 수문제의 다섯 아들 가운데 천자가 된 차남 수양제를 제외하면 장남 폐태자는 수양제에게 살해당했고, 셋째 아들 진왕 양준은 아내에게 독살당했으며, 넷째 아들 촉왕 양수는 수문제의 노여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전락했는데, 이번에 또 한왕 양량이 유폐됨으로써 하나같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결과의 근본 원인을 따지자면 수문제의 가정교육이 실패했다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의 사회 환경, 특히 부자연스러운 권력 구조의 왜곡에 따른 문제점도 컸다."



중국사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수양제(위키백과)


이제 거칠 게 없어진 수양제는 제힘을 뽐내듯 이런저런 사업을 잔뜩 벌였습니다. 대운하를 건설하고, 장성을 보수하거나 개축했습니다. 물론 남북으로 갈라진 중원을 하나로 이을 대운하를 만드는 것은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북방에서 돌궐 등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였습니다. 다만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기면서까지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점이 화근이었습니다. 대운하 공사는 그저 물길만 내는 일이 아니라 선착장, 창고, 숙사 이외에 이궁까지 지어야 했기에 백성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당연히 국가 재정은 적자에 시달렸고,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반란이 일어날 만큼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수양제는 중국 천자의 위엄을 외국에까지 보이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외국 군주가 직접 입조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습니다. 사방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수양제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만은 수양제의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건방진 고구려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마음먹은 수양제는 612년에 몸소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쳐들어갔으나, 뜻밖에도 성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하고 참패했습니다.


약이 오른 수양제는 이듬해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대운하 개통으로 병력과 군수 물자 동원이 옛날보다 좀 더 쉬워지면서 전쟁을 쉽게 여기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누구도 수양제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 실패로 구겨진 자존심을 되찾아야 했을지 몰라도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잃은 패전의 상처가 겨우 한 해 만에 나을 리 없었건만, 다시 전쟁을 벌인다는 건 백성들이 보기에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일 뿐이었습니다.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뜻이 담긴 노래가 더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흔들리는 민심을 지켜본 양현감(楊玄感)은 수양제가 원정을 떠나 나라를 비운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때 자기 측근이던 재상 양소(楊素)의 아들인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수양제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설상가상 양현감의 벗이자 병부시랑인 곡사정(斛斯政)마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싸움을 이어갈 수 없게 됐습니다. 수양제는 하릴없이 군대를 돌려 양현감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하였으나, 고구려 원정은 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한데, 수양제는 질리지도 않고 세 번째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3년을 내리 고구려를 친 일은 범상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미야자키 선생은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예전 실패를 만회하려고 초조해하는 점이 수양제의 평범함을 보여준다"라고 지적합니다. 역설처럼 보이는 이 지적대로 수양제는 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황제라고 하기보다 도박꾼이나 투기꾼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미 양현감이 댕긴 반란의 불길이 온 나라로 번진 상황에서 고구려 원정이 성공하기란 요행이나 다름없었지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것을 알아챈 고구려는 곡사정을 중국으로 돌려보내 수양제의 체면을 세우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고 제의합니다. 사관은 그때 수양제가 시늉에 불과한 고구려의 항복을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럴 거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한 전쟁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쟁은 흐지부지 매듭지었습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였습니다.


요동에서 회군한 뒤 수양제는 자포자기한 채 의욕을 잃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막기 어려워서 수도 장안까지 위험해지자 그는 강남의 강도로 행차하여 그곳에 머물며 주색에 빠졌습니다. 말이 행차지 사실상 달아났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통일 제국 황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일이 틀어져 과거 남조의 천자들처럼 살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속셈이었겠으나, 수양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반기를 들면서 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성난 부하들의 강요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허무한 최후였습니다. 수양제의 죽음과 함께 수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수양제는 남북조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낡고 고루한 천자였다. (중략) 수나라는 문제 시대에 남북을 통일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고 그것들이 나중에 당으로 이어졌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시작되었음에도 나라를 운영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부분들이 있었다. 수양제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생전에 수양제는 자신이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황제가 됐을 거라는 식으로 허풍을 떨었지만, 실상 그는 천하를 담을 만한 그릇이 못 되는 사내였습니다. 공을 세우면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곧잘 어기고, 의심과 질투심까지 강한 그의 곁에는 믿을 만한 신하가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광이었음에도 겁도 많았습니다. 평범하게 살았어야 할 인간이 분수에 넘치는 권력을 쥔 셈이니 천하를 잃고 제 몸까지 망치는 뻔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 수양제를 통해 모순으로 가득 찼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풍경을 엿봅니다.


이처럼 어둡고 무거운 수양제의 삶이지만, 『수양제』는 무척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것은 글쓴이인 미야자키 선생이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 문제가 고구려를 힐문하는 편지를 보낸 때를 597년이라고 한 것이나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을 요동왕으로 책봉한 이듬해에 고구려가 요서에 쳐들어온 일을 보복했다고 한 것은 오류입니다. 수 문제가 고구려에 편지를 보낸 때를 597년이라고 한 중국 사서의 기록은 틀렸으므로 590년으로 고쳐야 옳습니다(관련 자료). 또한, 영양왕이 요동왕에 책봉된 해는 591년이며,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해는 598년입니다. 따라서 영양왕을 요동왕으로 책봉한 이듬해에 고구려를 쳤다는 기술은 잘못입니다. 미야자키 선생이 중국사 연구자로서 중국 측 기록을 주로 참고하다 보니 생긴 옥에 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 2016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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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이호영 지음 / 서경문화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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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최약체이던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왜 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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