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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평점 :
고구려가 멸망한 뒤 천여 년 동안 그 땅에 선 <광개토왕릉비>를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잊었습니다. 물론 그 커다란 비석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으니 비의 존재 자체는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을 금(金) 황제의 비로 착각할 만큼 비문 내용까지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석은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 재위 391~412)의 비로 '재발견'됐는데, 정작 조선인들보다 일본인들이 비석에 적힌 글에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왜(倭)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신묘년조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신묘년조가 고대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여겼습니다. 고구려인들이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 엉뚱하게도 고대 일본을 미화하는 자료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일본 군부는 <광개토왕릉비>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짰습니다. 한반도에 '진출'한 왜의 활약상을 적은 비를 일본 국민에게 직접 보여 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었을까요? 아니면 비문을 조작한 일을 숨기고자 함이었을까요? 그런 추측과 달리 비석 반출 계획을 추진한 이들은 뜻밖에도 왜가 고구려에 끝내 지는 바람에 대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비석을 일본으로 가져오자고 제안한 동양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는 "고구려는 마치 지금의 노국(露國, 러시아)과 같은 관계여서 일본이 반도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 하면 고구려가 이를 누르려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부의 삼국을 지배하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북부의 고구려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북의 노국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선에서 세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전에는 지나(支那, 중국)와 싸웠고 지금은 노국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상의 관계에서 일본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러일 전쟁을 전후한 당시 상황을 고대사에 고스란히 투영한 시라토리의 눈에 고구려는 마치 러시아처럼 보였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고 전쟁을 벌이듯이 고구려와 왜도 고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는 게 시라토리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면서 그는 왜가 고구려에 진 '재미없는 것'이 비석에 적혔음에도 비를 일본으로 가져온다면, 사람들의 분개심을 자극하는 교훈으로 삼아 같은 일을 또 겪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행히 시라토리의 제안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일화는 근대인들이 고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상징하는 듯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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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텍스트'로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의 모습(동북아역사재단)
해방 이후 <광개토왕릉비> 논쟁은 더욱 뜨거워지는데, 역시 신묘년조가 문제였습니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은 신묘년조 문장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바꿔야 옳다며 해석의 뒤집기를 시도했습니다. 한학자답지 않게 정인보 선생이 새로 풀이한 문장은 한 문장 안에서도 행위의 주체가 자꾸 바뀌어서 어딘지 어색했지만, 고구려 우위의 해석은 북한 학자들도 따를 만큼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비문을 일본에 대해 한민족이 승리한 기록으로 봤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시라토리가 비문의 왜에서 근대 일본을 읽었듯이 정인보 선생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근대 한민족을 읽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해석과 한국의 해석은 정반대인 양 보여도 어떻게 보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대인인 고구려인이 쓴 비문은 근대의 텍스트로 읽혔습니다.
사실 전체 글자가 1,700자가 넘는 비문에서 신묘년조는 겨우 32자에 불과한데도 비석을 재발견한 뒤 백여 년 동안 신묘년조에 집중해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고 신묘년조를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진실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문에는 백제와 신라가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쳤다고 적혔지만, 막상 백제와 신라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펄쩍 뛰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항의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부여가 추모왕(鄒牟王, 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록도 고구려의 과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인의 시각을 짙게 반영한 비문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신묘년조를 해석하며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봤기에 이런 허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이들이 비로소 고구려 텍스트로서 비문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전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내용이 나뉘는데, 그 가운데 맨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는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새겼습니다. 광개토왕의 공적을 칭송하는 글만 적혔으리라고 막연히 여긴 사람이 비문을 처음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만큼 이 부분은 길고 자세합니다. 심지어 수묘인이 어디 출신인지까지 밝혔을 정도이지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고구려에서는 선왕들의 무덤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수묘인을 함부로 사고파는 '부유한 자'들이 나타나는 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부유한 자들은 5부에 소속된 지배층이었을 텐데, 이를 걱정한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을 정비하고 수묘인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 규정에 의해 광개토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는 무려 330가(家)나 되었다고 합니다. 구민(舊民)으로 불린 고구려 출신 110가의 수묘인연호를 제외한 나머지 200가의 수묘인연호는 광개토왕이 백제 등을 공격해 포로로 빼앗은 한(韓)과 예(濊) 사람들이었는데, 그 출신지를 따져 보니 이들 대부분이 광개토왕이 공파한 64성에서 왔음이 드러났습니다. 광개토왕의 무훈을 적은 비문의 두 번째 부분과 수묘인 규정이 서로 맞물린 내용이었던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생전에 거둔 모든 전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비문의 글쓴이는 수묘인 제도와 얽힌 싸움을 주로 기록하려고 했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관미성 전투나 후연(後燕)과의 전쟁은 비문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왕실이 우리 생각보다 수묘인 제도를 훨씬 중시했으며, 비문도 그와 깊은 연관을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의 무덤 앞에 우뚝 선 거대한 비석과 무덤을 지키는 천 명도 넘는 수많은 수묘인을 보면서 왕의 업적을 마음속에 되새겼겠지요. 그리하여 한때 흔들렸던 왕실의 권위는 다시 섰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그리 눈여겨보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며 비문을 해석하면, 거기에는 고대 일본의 영광이나 한민족의 승리와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가 엿보입니다.
"비문이 새삼스레 신성한 왕가의 출자(出自)와 계보를 강조하고 또 광개토왕릉의 수묘인이란 고구려 고유의 질서 세계를 지키는 이른바 정의의 전투, 즉 성전(聖戰)의 결과가 초래한 것이라 역설한 것은, 왕가의 위신을 체현한 능묘의 수호조차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이었음에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배후에서는 고구려 지배층 내 집단들 사이의 균형 관계와 상호 긴장 관계가 있었음도 간파할 수 있다.
비문의 필자는 시조 이래의 계보를 이어받은 위대한 왕의 훈적과 그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들의 내력을 기록하고 수묘역 체제가 앞으로 영원히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니 만큼 그 내용은 바로 비문의 독자인 지배 공동체(5부) 내부의 상극(相克)과 긴장의 산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재일 한국인 2세로 고대 동아시아사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 이성시 교수가 쓴 『만들어진 고대 - 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는 앞서 살펴본 <광개토왕릉비>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뒤틀린 고대사 인식을 고발합니다. 이 책에서 글쓴이는 근대 민족주의가 고대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합니다.
발해사를 서로 자국의 역사로 끌어당기려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관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오릅니다. 발해의 지배층에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있었음을 애써 무시하고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보려는 중국이나 근거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남북국 시대론을 내세워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고자 여러 사료에서 나타나는 말갈의 존재감을 줄이는 한국이나 똑같이 문제가 있다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발해사 논쟁은 겉으로 볼 때 역사 논쟁인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십 개가 넘는 소수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해야 하는 중국과 남북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적인 정치 과제가 숨었습니다.
"각국의 발해사 연구는 이러한 현실적 과제가 직접·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현실적 과제의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과제의 무게는 각각에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정치 과제를 매개 없이 역사에 투영하거나 혹은 가탁하는 불모성(不毛性)을 문제삼으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내부를 향한 선전은 될 수 있어도 국제적인 범위에서 학술적으로 발해의 족속 문제를 해명하는 데는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없다."
발해를 우리 민족의 나라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국사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의 틀을 다시 짜야 하는 오늘날에 이성시 교수의 말을 새겨들을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5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