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연구
김수경 지음 / 한국문화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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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당의 고종(高宗)이 한자리에 모여 회담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연개소문은 함경도 사투리로, 의자왕은 전라도 사투리로, 태종무열왕은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는데, 이들 사이에는 적의와 의심과 냉소가 넘칠지언정 서로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다만 이들이 중국 황제의 중국어를 알아듣는 것은 영화적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실제 역사에서 이들 모두가 한곳에 모인 일은 없었지만, 만약에 삼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면, 회담장에 통역관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없었을까요? 영화처럼 삼국의 언어가 '방언적'인 차이였다면, 통역관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영화와 달리 '언어적'인 차이였다면, 통역관이 동석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물음에 국어학자들은 엇갈린 답을 내놓습니다. 삼국의 언어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국의 언어가 사뭇 달랐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기문 교수는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입니다. 이기문 교수는 고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존재했던 언어들을 크게 북방의 부여계(夫餘系)와 남방의 한계(韓系)로 나누고, 부여계를 대표하는 언어로는 고구려어를, 한계를 대표하는 언어로는 신라어를 꼽았습니다.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의 한 기록(관련 자료)은 부여계 언어와 한계 언어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지배족의 언어로는, 왕(王)을 '어라하(於羅瑕)', 비(妃)를 '어륙(於陸)'이라 했음에 대하여 피지배족의 언어로는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이것은 고대에 있어서 부여계언어와 한계언어가 달랐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아마도 백제에 있어서는 지배족의 언어로의 피지배족의 언어의 치환은 없었고, 다만 약간의 영향을 준 데 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상층(Superstratum)이 백제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기문의 『한국어형성사』에서


이는 우리 학계에서 '정설'이 된 학설입니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모든 이가 이기문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회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북한 학계도 이기문 교수의 주장을 민족분열론이라고 하여 거세게 반박했습니다. 류렬(柳烈, 1918~2004) 교수와 함께 북한 국어학의 밑바탕을 다진 김수경(金壽卿, 1918~1999) 박사는 1989년에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썼는데, 1995년에 한국문화사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언어연구'로 제목을 바꿔 복제한 뒤 간행한 이 책에서 김수경 박사는 이기문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논리의 모순과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김수경 박사는 『주서』에 나오는 '어라하'와 '건길지'가 계급 방언의 차이를 보여 주는 예들로, 백제가 이원적 언어 사회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을 가리켜 한쪽에서는 '전하(殿下)'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님'이라고 했듯이 지배층이 쓰던 말과 피지배층이 쓰던 말이 다른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김방한(金芳漢, 1925~2001) 선생도 『한국어의 계통』에서 같은 문제를 지적했고, 더 나아가 '건길지'와 비슷한 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다 존재했으므로 '건길지'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 언어 차가 없었음을 시사하는 예라고 봤습니다(관련 글).


물론 이기문 교수가 '어하라'와 '건길지'만으로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달랐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기문 교수는 고대의 인명과 지명 등의 고유 명사들을 분석해 고구려어의 단어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신라어 어휘와 견줬습니다. 이를테면 성(城)을 가리켜 고구려에서는 '홀(忽)'이라고 불렀으나, 신라에서는 '잣(城叱)'이라고 불렀습니다. 얼핏 봐도 형태가 다른 두 단어 가운데 후자는 중세 국어로 이어졌지만, 전자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두 언어의 차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중세 국어가 고구려어가 아닌 신라어를 근간으로 삼아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관련 글). 반면에 김수경 박사는 구체적인 통계 결과를 제시하며 이기문 교수가 사실을 과장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마디밖에도 세 나라 가운데서 서로 다른 두 나라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마디가 매우 많으며 그것들이 서로 엇걸려서 총적으로 이 시기 세 나라 말의 어휘가 단일어의 어휘로서의 공통성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말하게 되는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라별로 보면 고구려는 약 150개의 어휘가운데서 세 나라의 자료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약 30개의 말마디가 있는외에도 백제자료와의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것이 약 20개, 신라자료와의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것이 약 40개로서, 모두 두 나라 이상의 자료에 공통적인것이 약 90개에 이른다. 약 150개의 어휘가운데서 3분의 2에 가까운 약 90개가 두 나라 이상의 자료에 공통적으로 보이고있다는것은 고구려말의 어휘가 백제, 신라에서의 어휘와 공통적이였다는것을 확고히 보여주는것으로 된다."


그리고 두 언어를 비교할 때 어휘 체계를 비롯해 음운 체계와 문법 체계도 함께 비교해야 하는데, 이기문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김수경 박사는 지적합니다. 이 문제는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비교에서도 되풀이하는데, 이기문 교수는 고구려어와 일본어가 친족 관계일지 모른다고 주장하면서도 음운 대응의 규칙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에 남은 고대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라지만, 그럴듯한 보기들만 나열하고, 음운 대응의 규칙을 확립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약점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처럼 이기문 교수에 대한 김수경 박사의 비판은 그 나름대로 탄탄한 논거를 갖췄습니다. 그럼에도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이질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민족분열론이라거나 '두 개 조선' 조작 책동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 삼국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고대는 '하나의 조선'의 당위가 되어야 할 민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하나의 조선'은 북한에서 주장하듯이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었습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이고요.


신라어가 중세 국어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우리말 형성에 이바지했음이 틀림없는 고구려어나 백제어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사려 깊지 못한 표현으로 민족사의 정통성을 신라에 두려고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김수경 박사가 거기에 맞서 고구려어의 우위성을 부각하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제 정통성이라는 개념이 그리 유효하다고 여기지 않거니와 비중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삼국의 언어가 모두 우리말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주서』의 짧은 기록만으로 언어의 계통을 논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부여계와 한계를 설정한 가설도 회의적으로 봅니다. 고구려어와 일본어를 이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쉬이 의사소통할 만큼 말이 통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김수경 박사의 이야기대로 삼국의 언어가 음운 체계와 문법 체계가 거의 같았다고 하더라도 어휘 체계가 제법 달랐다면, 계통이 다르다고 할 수는 없어도 고대인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적잖은 위화감이 들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서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단어가 절반이나 된다면, 그 말을 그저 방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김수경 박사도 인정했듯이 방언적인 차이와 언어적인 차이는 "순언어적인 요인만으로는 결정하지 못" 하며, 언어와 방언의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고 흐릿합니다(관련 글). 상호의사소통력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광둥어와 보통화(普通話)는 다른 언어나 다름없다지만, 광둥어 화자와 보통화 화자 대다수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했기에 광둥어와 보통화는 중국어라는 틀 안에 같이 들어갑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두 언어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그 사용자들이 서로 웬만큼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한 언어로 묶지 않는 까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독립국인 사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북분단의 현실에 순종할것이 아니라 두개 민족, 두개 나라를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하여서도 이를 단호히 저지파탄시켜야 한다. 바로 이러한 민족적 책무감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언어사연구에서의 민족분렬론을 그토록 반대, 배격하는것이다."


김수경 박사는 민족주의가 짙게 배어나는 글로 책을 마무리하는데, 삼국의 언어를 저마다 다른 언어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 언어의 방언들로 볼 것인지 하는 문제가 언어학만의 영역이 아님이 잘 드러납니다.

- 2015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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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 천지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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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치세의 청 제국은 전성기의 절정을 맞았으나, 달도 차면 기운다는 것을 그들은 그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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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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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대가, 독재 군주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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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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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일제‘라고 불린 어느 황제의 음성으로 듣는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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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트다운 -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어떻게 일본을 침몰시켰는가
오시카 야스아키 지음, 한승동 옮김 / 양철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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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로부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았을 그날의 참사가 남긴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았습니다. 핵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후쿠시마 곳곳에 뿌려졌고, 사람들이 떠난 그곳에는 주인을 잃은 동물들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5년 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되새겨야 합니다.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사히신문』 출신인 오시카 야스아키[大鹿靖明] 기자의 『멜트다운』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순간을 시작으로 약 반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저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를 맡은 도쿄전력은 사고가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재난이 닥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지진에 이어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쳐 외부 전력을 잃자 순식간에 혼란에 빠집니다. 전기가 끊겨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멜트다운(Meltdown), 즉 원자로의 노심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사고인 노심 용융이 발생할 위기에 놓입니다. 현장을 지키던 직원들이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일분일초가 다급한 그때 도쿄전력의 회장과 사장은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사고 당시 가쓰마타 쓰네히사[勝俣恒久] 회장과 시미즈 마사타카[清水正孝] 사장은 각각 중국과 지방에 가 있었습니다. 물론 가쓰마타 회장과 시미즈 사장은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안 됐겠지만, 회사의 '머리'인 두 사람이 여행을 즐기느라 자리를 한꺼번에 비웠다는 사실에서 이들을 비롯한 도쿄전력 중역들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도쿄전력은 멜트다운 직전에도 바닷물을 원자로에 붓기를 망설였고, 심지어 이 사실을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발전소 건물이 잇따라 폭발하자 도쿄전력은 사고 수습은 뒷전으로 미루고 달아날 궁리부터 하였습니다. 도쿄전력이 현장의 정보를 숨긴다는 것을 뒤늦게 안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본사로 직접 찾아가 도쿄전력의 높으신 분들을 꾸짖지 않았다면, 이들은 정말 다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쿄전력 사람들은 사고의 '피해자'인 자신들을 총리가 격려하기는커녕 질책하자 되레 총리에게 반감과 증오심을 품었습니다.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고밖에 할 말이 없으나, 이 뒤틀린 마음이 나중에 자기 발목을 잡을 줄은 간 총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총리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야 할 전문가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인 마다라메 하루키[班目春樹] 교수는 몇 번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며 간 총리를 안심시켰지만, 마다라메 위원장의 말과 달리 폭발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한 관료가 저게 뭐냐고 마다라메 위원장에게 따지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때 마다라메 위원장은,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의 기억에 따르면, (나중에 자주 보여줬지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우왓!"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잠시 머리를 감싸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이 "이건 체르노빌 같은 사고인가요?" 하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목격한 시모무라 내각심의관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이 일본 원자력 최고 전문가의 모습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현장(연합뉴스)



오히려 사고가 일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기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이 부른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처참하면서도 황당한 일들을 몸소 겪으면서 간 총리는 일본을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간 총리는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며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3·11 이후 일본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반성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하마오카 핵 발전소의 가동을 멈췄고, 탈핵을 위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나 간 총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산업성은 핵 발전소 사고를 책임지는 관청이었지만, 거기에 속한 이들은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력 회사들과 이해관계로 얽힌 경제산업성 관료들은 간 총리의 탈핵 노선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도쿄전력에 면벌부를 줘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에게 간 나오토는 자기들의 영역을 침해하려는 미운 총리일 뿐이었습니다. 간 총리는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제산업성의 소장파 관료들을 등용하여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에 정신을 빼앗겨 총리를 흔들었습니다.


간 총리를 더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가 해수 주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언론 보도였습니다. 이 보도는 거짓이었지만, 그와 관계없이 간 총리가 받은 타격은 컸습니다. 간을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오보 뒤에 전 총리이자 현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앞뒤를 따져 볼 때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아베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이는 도쿄전력 관계자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피해자 의식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는 도쿄전력은 자기들을 가해자 취급하는 간 정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습니다. 적반하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뻔뻔하니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온갖 공작에 시달린 간 내각은 끝내 무너졌고, 그로부터 약 1년 뒤 정권은 아예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자력촌(原子力村)'이라고 부르는 '핵 마피아'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시카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체르노빌과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가져다 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책임을 진 사람은 관할관청인 경제산업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분리해 환경성으로 이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을 뿐, 그 다음에는 단 한 사람도 책임을 추궁당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순탄하게 출세하고, 세간의 잣대로 봐도 상당히 높은 퇴직금을 손에 쥐었으며 순조롭게 낙하산 인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런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가스미가세키의 A급 성청인 경제산업성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간 정권은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지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본인들보다 더 낫기를 바라지만, 지난 역사에서 대형 사고를 처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고사하고 소도 외양간도 모두 잃지는 않을지 불안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뻔히 보고도 납품 비리를 버젓이 저지르는 이들이 핵 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을 발휘해 그것을 해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3·11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해서 걱정스럽습니다. 『멜트다운』에 그려진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먼저 3·11을 당신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우리나라이며,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여러모로 일본과 닮은꼴이 많은 나라도 우리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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