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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형 기자들 - 객관보도의 적,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고발한다
김지영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8월
평점 :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한 것을 떠올리면 일단 감이 잡힐 것이다. '어떤 어조와 제스처를 쓸 것인가' 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과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문체는 형식 이상입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문체입니다. 어떤 문체를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넓을 수도, 좁을 수도 있으며, 촘촘할 수도, 성길 수도 있습니다. 고문(古文)에서 벗어나 소품문(小品文)을 쓴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중세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온'한 문체가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조(正祖, 1752~1800)는 문체반정을 일으켜 소품문을 쓰지 못하도록 했지요. 우리는 고문이나 소품문이나 어렵고 딱딱한 한문 문체로 느낄 뿐이지만, 거기에 스민 생각과 생각은 서로 맞서고 부딪치며 시대를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한문이 아닌 오늘날 우리말 문체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의 결을 읽을 수 있을까요?
짧았던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광주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던 1980년 5월의 어느 날, 한 신문의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가 나왔습니다.
"이상을 요약컨대 정부의 5·17 조처는 심상찮은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를 감안한 것으로 풀이되며, 나아가서 이를 계기로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부정부패와 사회불안을 다스리려고 결심한 것으로 관측된다."
- 1980년 5월 20일자 『한국일보』 사설에서
이 문장에서 정부의 조처(비상계엄령 전국 확대)가 지닌 의미를 '풀이'하고 '관측'한 이는 누구일까요? 물론 이 문장을 읽는 우리는 글쓴이가 신문사의 기자나 논설위원이었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이 문장에서 글쓴이는 자신이 '풀이'하고 '관측'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이 한발 물러선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기나 한 듯이 말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문장의 서술어가 능동사가 아닌 피동사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가 '풀이'하고 '관측'하는 주체라면, 굳이 피동사를 쓰지 않아도 괜찮지만, 피동사를 씀으로써 '풀이'하고 '관측'하는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겼습니다. 그래서 문장의 주체는 글쓴이라기보다는 전두환인 것 같기도 하고, 신군부인 것 같기도 합니다. 왜 글쓴이는 어슴푸레한 글을 썼을까요?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대에 정부의 조처를 대놓고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억지로 쓰는 글이 떳떳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글쓴이는 피동문으로 주체를 흐리고 글 뒤에 숨었습니다. 공포 정치 아래에서조차 차마 버리지 못한 언론인의 양심이 피동형 문체를 낳은 셈입니다. 이것도 비겁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글쓴이 나름대로 고육지책을 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피동의 시대, 피동의 문체(경향신문)
그렇지만 광주 시민들의 희생으로도 전두환이 집권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고, 그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기자들은 차츰 양심이 찔려서가 아니라 그냥 되는대로 피동문을 기사에 썼습니다. 피동문으로 얼룩진 문체는 삽시간에 언론 문체의 한 전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분석된다, 알려졌다, 이해된다, 전해졌다, 주목된다, 해석된다' 따위의 피동사들을 신문과 방송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되었지요. 다시 마르크스의(그리고 그의 벗인 엥겔스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5공의 유령'이 한국의 언론계를 아직도 떠돈다고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기자로 일했던 김지영 씨는 『피동형 기자들 - 객관보도의 적,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고발한다』에서 이 같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피동형 문체가 지닌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피동문 기사에서는 글을 쓴 행동 주체인 기자가 잠적한다. 행위자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모호성ambiguity이 많다. 이로써 자연히 글의 책임성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책임성이 적다 보니 객관성을 지닌 글로 오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어법을 어기면서 기자의 의견을 일반화·객관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객관보도 원칙에 어긋난다. '정확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다. 객관성과 정확성에서 문제가 있으니 자연히 공정성도 약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 객관 보도를 망치는 '정범'인 피동형 문체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져서 고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신군부와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진보 언론이라면 신군부의 언론 검열에서 비롯한 피동형 문체를 가려 써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 언론도 보수 언론처럼, 아니 보수 언론보다 더 피동형 문체에 물들었습니다. 김지영 씨가 몇몇 중앙 일간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진보 언론이 보수 언론보다 피동형을 좀 더 많이 쓴다고 합니다. 보수 언론이나 진보 언론이나 모두 '무책임'한 피동형 문체를 마구잡이로 쓴다는 사실은 언론계가 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지요. 정론(正論)이 아닌 정론(政論)을 펼치며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얼굴이 피동형 문체로 드러났다고 한다면 지나칠까요?
언론의 피동형 문체는 언중의 언어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말은 능동문을 중심으로 삼은 언어임에도 현대에 들어서면서 피동문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이를테면, "매너모드를 해제합니다"라고 해도 될 문장을 "매너모드가 해제됩니다"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어색함을 못 느낍니다. 물론 피동문이 늘어난 까닭이 꼭 언론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말보다 피동형 문장을 많이 쓰는 영어나 일본어의 '접촉'과 '간섭'도 거기에 한몫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김지영 씨는 언론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가꾸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사회 모든 분야에 책임이 있다는 대답은, 곧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미디어는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잘 나타낸다. 그런 만큼 보도 언어는 국민 언어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신문·인터넷의 글과 방송의 말은 실상 공공 언어의 전령이요, 국민에게는 살아있는 '매일의 국어 교과서'다. 미디어는 수용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언중이 피동문을 많이 써서 우리말의 '중심'이 옮겨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억지로 막을 길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말의 주인은 언중이니까요. 하지만 기자들은 객관 보도를 위해서라도 피동형 문체를 멀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자로서 자기가 쓰는 문장에 책임지는 자세를 갖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기자처럼 글로 먹고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블로거나 트위터리안 같이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3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