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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사 ㅣ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연구총서 30
노태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폭풍 전야.
641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641년은 많은 변화를 예고한 해였습니다.
당(唐) 제국이 비단길에 자리 잡은 고창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닿은 그해, 고구려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에 찬 황제답게 숙적 고구려를 치겠다는 의지를 신하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고구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당 태종의 야망을 까맣게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위기감이 커진 고구려 조정은 20여 년 만에 다시 현실로 다가온 통일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내부에서 불거진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동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위험인물로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해 화근을 미리 없애려고 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반격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부여의자(扶餘義慈, 재위 641~660
)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 시대를 맞았습니다. 부왕처럼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부여의자, 즉 의자왕(義慈王)은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즉위하자마자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하였고(관련 자료), 신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습니다.
이듬해인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합니다. 곧이어 낙동강의 요충지인 대야성도 빼앗았습니다. 신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는 대야성의 성주이자 사위인 품석(品釋)과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고자 고구려로 들어갑니다. 마침 대야성이 함락되고서 얼마 뒤에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김춘추는 이것을 고구려와 협상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춘추는 신라가 연개소문 정권을 지지하는 대신에 고구려의 군사를 빌리겠다는 속셈으로 고구려행을 자원한 듯합니다.

삼실총에 그려진 공성도(문화콘텐츠닷컴)
하지만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쥔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연개소문은 몸소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며, 신라와 뜻을 같이할 마음이 없음을 확실히 합니다.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고립시키려던 신라는 되레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곤경에 빠졌고, 협상에 실패한 김춘추도 곤혹스러운 처지가 됩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뜻밖에도 요동의 작은 성인 안시성에 가로막혀 실패하면서 각국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고구려, 백제, 왜의 연계에 맞서려면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고구려를 무너뜨리려면 제2 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절감한 당도 신라의 존재를 새삼 주목하였습니다. 648년,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합니다. 이제 전쟁은 전에 볼 수 없는 양상으로 바뀝니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당과 왜가 직접 참전하였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이 당군의 일원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족과 말갈족은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티베트)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는 제목 그대로 삼국 통일 전쟁의 전후사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노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얽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삼국 통일 전쟁을 담담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삼국 통일 전쟁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 못지않게 그 배후에서 벌어진 외교전도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예컨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관련 기사)가 암시하듯 고구려는 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찾아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염립본왕회도>에 그려진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사신들의 모습(문화일보)
고구려, 백제보다 뒤처졌었던 약소국 신라는 돋보이는 외교 성과를 거두며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춘추는 고구려, 왜, 당 등을 돌아다니며 신라가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 애썼고, 그 노력은 열매를 맺어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신라의 기민한 외교 전략은 670년에 발발한 나당 전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이미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기 직전부터 왜에 사신을 파견해 왜와 화해하고 머지않아 일어날 당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던 신라는 조공·책봉 관계를 역이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당군의 공세가 거세다 싶으면 당에 '사죄'한다고 하여서 적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하기를 되풀이하며 전력의 열세를 극복했지요. 초강대국인 당 제국도 신라의 능구렁이 같은 양면 전술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이후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삼국의 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고 비판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삼국 통일이나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은 전근대를 외세와 동족이라는 구도로 바라볼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인들의 눈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백성'으로 보였다지만, 정작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와 백제도 당과 마찬가지로 '외세'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노태돈 교수는 오히려 한민족의 기본 틀을 형성한 것이 삼국 통일 전쟁의 역사적 의의라고 설명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의 주민들이 동질성을 자각했고, 통일은 동질성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 노 교수는 삼국 통일 전쟁이 대외 관계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7세기 말 8세기 초 발해가 등장하고 당과 관계가 개선되자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신라로선 대일관계는 대당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과의 안정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된 신라로선 이제 현실적으로 안보를 위해 일본의 동향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은 인국으로서 같은 당의 조공국이니, 당연히 양국은 대등한 인국으로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일본이 반발하니 양국은 점차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신라의 대외정책은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하였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는 그 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 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러한 삼국 통일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 전쟁이 한국 전쟁과 아울러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라는 평가는 지나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