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돌아본 일본역사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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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부터 간토까지, 여러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곳에 새겨진 일본 역사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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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연구총서 30
노태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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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641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641년은 많은 변화를 예고한 해였습니다.


당(唐) 제국이 비단길에 자리 잡은 고창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닿은 그해, 고구려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에 찬 황제답게 숙적 고구려를 치겠다는 의지를 신하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고구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당 태종의 야망을 까맣게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위기감이 커진 고구려 조정은 20여 년 만에 다시 현실로 다가온 통일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내부에서 불거진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동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위험인물로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해 화근을 미리 없애려고 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반격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부여의자(扶餘義慈, 재위 641~660)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 시대를 맞았습니다. 부왕처럼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부여의자, 즉 의자왕(義慈王)은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즉위하자마자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하였고(관련 자료), 신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습니다.


이듬해인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합니다. 곧이어 낙동강의 요충지인 대야성도 빼앗았습니다. 신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는 대야성의 성주이자 사위인 품석(品釋)과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고자 고구려로 들어갑니다. 마침 대야성이 함락되고서 얼마 뒤에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김춘추는 이것을 고구려와 협상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춘추는 신라가 연개소문 정권을 지지하는 대신에 고구려의 군사를 빌리겠다는 속셈으로 고구려행을 자원한 듯합니다.


삼실총에 그려진 공성도(문화콘텐츠닷컴)



하지만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쥔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연개소문은 몸소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며, 신라와 뜻을 같이할 마음이 없음을 확실히 합니다.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고립시키려던 신라는 되레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곤경에 빠졌고, 협상에 실패한 김춘추도 곤혹스러운 처지가 됩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뜻밖에도 요동의 작은 성인 안시성에 가로막혀 실패하면서 각국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고구려, 백제, 왜의 연계에 맞서려면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고구려를 무너뜨리려면 제2 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절감한 당도 신라의 존재를 새삼 주목하였습니다. 648년,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합니다. 이제 전쟁은 전에 볼 수 없는 양상으로 바뀝니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당과 왜가 직접 참전하였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이 당군의 일원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족과 말갈족은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티베트)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는 제목 그대로 삼국 통일 전쟁의 전후사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노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얽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삼국 통일 전쟁을 담담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삼국 통일 전쟁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 못지않게 그 배후에서 벌어진 외교전도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예컨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관련 기사)가 암시하듯 고구려는 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찾아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염립본왕회도>에 그려진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사신들의 모습(문화일보)



고구려, 백제보다 뒤처졌었던 약소국 신라는 돋보이는 외교 성과를 거두며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춘추는 고구려, 왜, 당 등을 돌아다니며 신라가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 애썼고, 그 노력은 열매를 맺어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신라의 기민한 외교 전략은 670년에 발발한 나당 전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이미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기 직전부터 왜에 사신을 파견해 왜와 화해하고 머지않아 일어날 당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던 신라는 조공·책봉 관계를 역이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당군의 공세가 거세다 싶으면 당에 '사죄'한다고 하여서 적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하기를 되풀이하며 전력의 열세를 극복했지요. 초강대국인 당 제국도 신라의 능구렁이 같은 양면 전술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이후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삼국의 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고 비판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삼국 통일이나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은 전근대를 외세와 동족이라는 구도로 바라볼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인들의 눈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백성'으로 보였다지만, 정작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와 백제도 당과 마찬가지로 '외세'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노태돈 교수는 오히려 한민족의 기본 틀을 형성한 것이 삼국 통일 전쟁의 역사적 의의라고 설명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의 주민들이 동질성을 자각했고, 통일은 동질성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 노 교수는 삼국 통일 전쟁이 대외 관계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7세기 말 8세기 초 발해가 등장하고 당과 관계가 개선되자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신라로선 대일관계는 대당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과의 안정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된 신라로선 이제 현실적으로 안보를 위해 일본의 동향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은 인국으로서 같은 당의 조공국이니, 당연히 양국은 대등한 인국으로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일본이 반발하니 양국은 점차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신라의 대외정책은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하였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는 그 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 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러한 삼국 통일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 전쟁이 한국 전쟁과 아울러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라는 평가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 201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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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1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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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하자마자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처음으로 국회 의원을 뽑은 5·10 총선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이 잇달아 터졌습니다. 불길한 출발이었습니다. 정부를 수립한 지 2년도 채 안 돼 터진 한국 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때까지 '북진 통일'을 외쳤던 정부는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나흘 만에 서울을 잃었고, 한강 철교를 끊고 야반도주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통령이었음에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이 실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권이 들어설 무렵부터 정부 형태와 국무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그와 관계가 험악해진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은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 책임제로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야당의 움직임을 알아챈 이승만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으로 맞받아쳤습니다. 이태 뒤인 1954년에는 삼선을 위한 개헌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들고나와 끝내 자기 뜻대로 헌법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이승만은 권좌를 위협하는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며 불굴의 권력 의지를 드러냈는데, 운도 따랐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승만은 힘들이지 않고 경쟁자를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쟁자인 조봉암(曺奉巖, 1898~1959)이 뜻밖의 돌풍을 일으키며 선전하면서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투표에 지고 개표에 이겨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승만은 이때의 '수모'를 잊지 않고, 뒷날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조봉암을 법살(法殺)하였습니다.



4월 혁명 이후 시민들이 끌어내린 이승만 동상(시사저널)


그렇지만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장기 집권을 꾀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마산을 기점으로 하여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나서 시민의 저항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4월 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대권을 다툰 민주당의 조병옥(趙炳玉)이 4년 전 신익희처럼 선거를 앞두고 급사했고, 조봉암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단단해 보였던 이승만 정권은 왜 그토록 쉽게 무너졌을까요?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에서 언론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3~4월 항쟁에서 언론이 학생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 정권과 박 정권은 언론 포섭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정권은 야당보다도 언론으로부터 더욱 시달렸다. 기실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는 데는 언론의 뒷받침이 컸다.


(중략) 1950년대는 신문의 시대였다. 라디오 보급률이 낮았고, 그나마 유행가나 만담, 연속극에 귀 기울이는 정도였다. 정보와 판단의 기준은 대부분 신문에 의존했는데, 해방 직후 좌우 싸움의 선봉장으로 극렬한 논조를 폈던 신문은 불평불만이 많은 도시 중산층과 서민을 주된 구독자로 하고 있어서 야당 성향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정부·여당이 비리·부정·부패가 많았기 때문에 정치면 위주였던 당시 신문은 주로 그런 기사를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승만 국부론을 펼치는 『조선일보』가 이승만이 하야하자 1960년 4월 26일 자 석간 1면에 큼지막하게 '만세! 민권은 이겼다!'라는 제목을 새겨 넣으며 감격했을 정도니 당시 언론이 얼마나 이승만 정권을 적대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물론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한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승만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만히 둘 리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승만 정권의 언론 탄압은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언론 탄압에 견주면 매우 '소박한' 수준이었습니다. 언론계 내부를 갈라놓은 후대의 언론 탄압과 달리 이승만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면 탄압할수록 언론인들은 더 똘똘 뭉쳤고, 독자들은 권력에 맞서는 언론에 성원을 보냈습니다. 결국 『경향신문』 폐간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또 이승만 정권은 시위를 대처하는 능력이 모자랐으며,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이 중립을 지키고, 사태를 지켜보던 미국마저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니 이승만이 기댈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권력욕이 센 이승만이라고 하더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이러한 이승만의 몰락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권력 유지와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사찰 경찰만으로는 정부 비판 세력과 언론 등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긴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여야 정치인부터 학생·언론 등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회유하고 분열시키고 감시했으며, 수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후기에 깡패를 자주 동원해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는데, 박 정권은 그것도 제도 속으로 끌어들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온 사람은 얼마나 당할지 두려워했고, 밖에 나가서 그곳에서 당한 일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정보정치에 의존했고, 그래서 중앙정보부장은 대개 권력에서 제2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정희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도 이승만 정권과는 비교가 안 되게 큰 규모로 강화해 통제정치, 밀실정치를 펴나갔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정권도 이승만 정권처럼 몰락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에 이어서 등장한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4월 혁명이 뿌린 자유의 씨앗은 독재의 시련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습니다.

- 2016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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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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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대 문인‘으로 살펴보는 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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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연구
김수경 지음 / 한국문화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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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당의 고종(高宗)이 한자리에 모여 회담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연개소문은 함경도 사투리로, 의자왕은 전라도 사투리로, 태종무열왕은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는데, 이들 사이에는 적의와 의심과 냉소가 넘칠지언정 서로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다만 이들이 중국 황제의 중국어를 알아듣는 것은 영화적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실제 역사에서 이들 모두가 한곳에 모인 일은 없었지만, 만약에 삼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면, 회담장에 통역관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없었을까요? 영화처럼 삼국의 언어가 '방언적'인 차이였다면, 통역관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영화와 달리 '언어적'인 차이였다면, 통역관이 동석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물음에 국어학자들은 엇갈린 답을 내놓습니다. 삼국의 언어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국의 언어가 사뭇 달랐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기문 교수는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입니다. 이기문 교수는 고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존재했던 언어들을 크게 북방의 부여계(夫餘系)와 남방의 한계(韓系)로 나누고, 부여계를 대표하는 언어로는 고구려어를, 한계를 대표하는 언어로는 신라어를 꼽았습니다.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의 한 기록(관련 자료)은 부여계 언어와 한계 언어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지배족의 언어로는, 왕(王)을 '어라하(於羅瑕)', 비(妃)를 '어륙(於陸)'이라 했음에 대하여 피지배족의 언어로는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이것은 고대에 있어서 부여계언어와 한계언어가 달랐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아마도 백제에 있어서는 지배족의 언어로의 피지배족의 언어의 치환은 없었고, 다만 약간의 영향을 준 데 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상층(Superstratum)이 백제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기문의 『한국어형성사』에서


이는 우리 학계에서 '정설'이 된 학설입니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모든 이가 이기문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회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북한 학계도 이기문 교수의 주장을 민족분열론이라고 하여 거세게 반박했습니다. 류렬(柳烈, 1918~2004) 교수와 함께 북한 국어학의 밑바탕을 다진 김수경(金壽卿, 1918~1999) 박사는 1989년에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썼는데, 1995년에 한국문화사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언어연구'로 제목을 바꿔 복제한 뒤 간행한 이 책에서 김수경 박사는 이기문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논리의 모순과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김수경 박사는 『주서』에 나오는 '어라하'와 '건길지'가 계급 방언의 차이를 보여 주는 예들로, 백제가 이원적 언어 사회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을 가리켜 한쪽에서는 '전하(殿下)'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님'이라고 했듯이 지배층이 쓰던 말과 피지배층이 쓰던 말이 다른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김방한(金芳漢, 1925~2001) 선생도 『한국어의 계통』에서 같은 문제를 지적했고, 더 나아가 '건길지'와 비슷한 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다 존재했으므로 '건길지'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 언어 차가 없었음을 시사하는 예라고 봤습니다(관련 글).


물론 이기문 교수가 '어하라'와 '건길지'만으로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달랐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기문 교수는 고대의 인명과 지명 등의 고유 명사들을 분석해 고구려어의 단어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신라어 어휘와 견줬습니다. 이를테면 성(城)을 가리켜 고구려에서는 '홀(忽)'이라고 불렀으나, 신라에서는 '잣(城叱)'이라고 불렀습니다. 얼핏 봐도 형태가 다른 두 단어 가운데 후자는 중세 국어로 이어졌지만, 전자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두 언어의 차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중세 국어가 고구려어가 아닌 신라어를 근간으로 삼아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관련 글). 반면에 김수경 박사는 구체적인 통계 결과를 제시하며 이기문 교수가 사실을 과장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마디밖에도 세 나라 가운데서 서로 다른 두 나라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말마디가 매우 많으며 그것들이 서로 엇걸려서 총적으로 이 시기 세 나라 말의 어휘가 단일어의 어휘로서의 공통성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말하게 되는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라별로 보면 고구려는 약 150개의 어휘가운데서 세 나라의 자료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약 30개의 말마디가 있는외에도 백제자료와의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것이 약 20개, 신라자료와의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것이 약 40개로서, 모두 두 나라 이상의 자료에 공통적인것이 약 90개에 이른다. 약 150개의 어휘가운데서 3분의 2에 가까운 약 90개가 두 나라 이상의 자료에 공통적으로 보이고있다는것은 고구려말의 어휘가 백제, 신라에서의 어휘와 공통적이였다는것을 확고히 보여주는것으로 된다."


그리고 두 언어를 비교할 때 어휘 체계를 비롯해 음운 체계와 문법 체계도 함께 비교해야 하는데, 이기문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김수경 박사는 지적합니다. 이 문제는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비교에서도 되풀이하는데, 이기문 교수는 고구려어와 일본어가 친족 관계일지 모른다고 주장하면서도 음운 대응의 규칙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에 남은 고대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라지만, 그럴듯한 보기들만 나열하고, 음운 대응의 규칙을 확립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약점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처럼 이기문 교수에 대한 김수경 박사의 비판은 그 나름대로 탄탄한 논거를 갖췄습니다. 그럼에도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이질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민족분열론이라거나 '두 개 조선' 조작 책동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 삼국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고대는 '하나의 조선'의 당위가 되어야 할 민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하나의 조선'은 북한에서 주장하듯이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었습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이고요.


신라어가 중세 국어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우리말 형성에 이바지했음이 틀림없는 고구려어나 백제어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사려 깊지 못한 표현으로 민족사의 정통성을 신라에 두려고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김수경 박사가 거기에 맞서 고구려어의 우위성을 부각하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제 정통성이라는 개념이 그리 유효하다고 여기지 않거니와 비중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삼국의 언어가 모두 우리말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주서』의 짧은 기록만으로 언어의 계통을 논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부여계와 한계를 설정한 가설도 회의적으로 봅니다. 고구려어와 일본어를 이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쉬이 의사소통할 만큼 말이 통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김수경 박사의 이야기대로 삼국의 언어가 음운 체계와 문법 체계가 거의 같았다고 하더라도 어휘 체계가 제법 달랐다면, 계통이 다르다고 할 수는 없어도 고대인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적잖은 위화감이 들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서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단어가 절반이나 된다면, 그 말을 그저 방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김수경 박사도 인정했듯이 방언적인 차이와 언어적인 차이는 "순언어적인 요인만으로는 결정하지 못" 하며, 언어와 방언의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고 흐릿합니다(관련 글). 상호의사소통력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광둥어와 보통화(普通話)는 다른 언어나 다름없다지만, 광둥어 화자와 보통화 화자 대다수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했기에 광둥어와 보통화는 중국어라는 틀 안에 같이 들어갑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두 언어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그 사용자들이 서로 웬만큼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한 언어로 묶지 않는 까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독립국인 사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북분단의 현실에 순종할것이 아니라 두개 민족, 두개 나라를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하여서도 이를 단호히 저지파탄시켜야 한다. 바로 이러한 민족적 책무감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언어사연구에서의 민족분렬론을 그토록 반대, 배격하는것이다."


김수경 박사는 민족주의가 짙게 배어나는 글로 책을 마무리하는데, 삼국의 언어를 저마다 다른 언어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 언어의 방언들로 볼 것인지 하는 문제가 언어학만의 영역이 아님이 잘 드러납니다.

- 2015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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