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트다운 -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어떻게 일본을 침몰시켰는가
오시카 야스아키 지음, 한승동 옮김 / 양철북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3·11로부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았을 그날의 참사가 남긴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았습니다. 핵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후쿠시마 곳곳에 뿌려졌고, 사람들이 떠난 그곳에는 주인을 잃은 동물들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5년 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되새겨야 합니다.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사히신문』 출신인 오시카 야스아키[大鹿靖明] 기자의 『멜트다운』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순간을 시작으로 약 반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저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를 맡은 도쿄전력은 사고가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재난이 닥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지진에 이어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쳐 외부 전력을 잃자 순식간에 혼란에 빠집니다. 전기가 끊겨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멜트다운(Meltdown), 즉 원자로의 노심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사고인 노심 용융이 발생할 위기에 놓입니다. 현장을 지키던 직원들이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일분일초가 다급한 그때 도쿄전력의 회장과 사장은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사고 당시 가쓰마타 쓰네히사[勝俣恒久] 회장과 시미즈 마사타카[清水正孝] 사장은 각각 중국과 지방에 가 있었습니다. 물론 가쓰마타 회장과 시미즈 사장은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안 됐겠지만, 회사의 '머리'인 두 사람이 여행을 즐기느라 자리를 한꺼번에 비웠다는 사실에서 이들을 비롯한 도쿄전력 중역들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도쿄전력은 멜트다운 직전에도 바닷물을 원자로에 붓기를 망설였고, 심지어 이 사실을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발전소 건물이 잇따라 폭발하자 도쿄전력은 사고 수습은 뒷전으로 미루고 달아날 궁리부터 하였습니다. 도쿄전력이 현장의 정보를 숨긴다는 것을 뒤늦게 안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본사로 직접 찾아가 도쿄전력의 높으신 분들을 꾸짖지 않았다면, 이들은 정말 다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쿄전력 사람들은 사고의 '피해자'인 자신들을 총리가 격려하기는커녕 질책하자 되레 총리에게 반감과 증오심을 품었습니다.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고밖에 할 말이 없으나, 이 뒤틀린 마음이 나중에 자기 발목을 잡을 줄은 간 총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총리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야 할 전문가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인 마다라메 하루키[班目春樹] 교수는 몇 번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며 간 총리를 안심시켰지만, 마다라메 위원장의 말과 달리 폭발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한 관료가 저게 뭐냐고 마다라메 위원장에게 따지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때 마다라메 위원장은,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의 기억에 따르면, (나중에 자주 보여줬지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우왓!"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잠시 머리를 감싸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이 "이건 체르노빌 같은 사고인가요?" 하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목격한 시모무라 내각심의관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이 일본 원자력 최고 전문가의 모습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현장(연합뉴스)



오히려 사고가 일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기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이 부른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처참하면서도 황당한 일들을 몸소 겪으면서 간 총리는 일본을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간 총리는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며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3·11 이후 일본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반성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하마오카 핵 발전소의 가동을 멈췄고, 탈핵을 위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나 간 총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산업성은 핵 발전소 사고를 책임지는 관청이었지만, 거기에 속한 이들은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력 회사들과 이해관계로 얽힌 경제산업성 관료들은 간 총리의 탈핵 노선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도쿄전력에 면벌부를 줘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에게 간 나오토는 자기들의 영역을 침해하려는 미운 총리일 뿐이었습니다. 간 총리는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제산업성의 소장파 관료들을 등용하여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에 정신을 빼앗겨 총리를 흔들었습니다.


간 총리를 더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가 해수 주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언론 보도였습니다. 이 보도는 거짓이었지만, 그와 관계없이 간 총리가 받은 타격은 컸습니다. 간을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오보 뒤에 전 총리이자 현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앞뒤를 따져 볼 때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아베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이는 도쿄전력 관계자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피해자 의식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는 도쿄전력은 자기들을 가해자 취급하는 간 정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습니다. 적반하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뻔뻔하니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온갖 공작에 시달린 간 내각은 끝내 무너졌고, 그로부터 약 1년 뒤 정권은 아예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자력촌(原子力村)'이라고 부르는 '핵 마피아'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시카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체르노빌과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가져다 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책임을 진 사람은 관할관청인 경제산업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분리해 환경성으로 이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을 뿐, 그 다음에는 단 한 사람도 책임을 추궁당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순탄하게 출세하고, 세간의 잣대로 봐도 상당히 높은 퇴직금을 손에 쥐었으며 순조롭게 낙하산 인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런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가스미가세키의 A급 성청인 경제산업성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간 정권은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지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본인들보다 더 낫기를 바라지만, 지난 역사에서 대형 사고를 처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고사하고 소도 외양간도 모두 잃지는 않을지 불안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뻔히 보고도 납품 비리를 버젓이 저지르는 이들이 핵 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을 발휘해 그것을 해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3·11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해서 걱정스럽습니다. 『멜트다운』에 그려진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먼저 3·11을 당신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우리나라이며,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여러모로 일본과 닮은꼴이 많은 나라도 우리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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