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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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출간된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의 전면 개정판인 『한국 고대사 산책』이 나왔습니다. 우리 고대사를 둘러싼 여러 물음을 던지고 풀이를 밝히는 형식은 그대로이지만, 초판이 나온 지 벌써 20년이 넘은 만큼 개정판에서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시대순과 국가별로 가른 소주제를 그 내용에 따라 기록·공간·소속·인물·함정·흔적 등으로 다시 묶었고, 학계에서 그동안 이룬 연구 결과와 새로운 발견도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면 개정판임을 내세운 것에 걸맞게 초판과 사뭇 다른 책이 됐습니다.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은 목간에 주목하지 않았으나, 『한국 고대사 산책』은 '목간으로 본 고대의 일상'이라는 소주제를 따로 두고 목간을 사료로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겨우 50여 점 남짓했던 목간의 숫자가 2017년 현재 700여 점에 이를 만치 늘어남에 따라 목간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진 덕분입니다. 오랫동안 고대의 연못, 우물, 도랑 속 진흙에 묻힌 목간을 발굴하면서 문헌 사료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가야 지역을 놓고 백제와 줄다리기하던 신라가 승기를 잡은 까닭도 목간을 통해 짐작할 수 있지요.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때 위기에 빠졌던 백제는 무령왕(武寧王) 대에 힘을 되찾으면서 반파국(대가야)이 다스리던 섬진강 유역의 기문 지방을 빼앗았습니다. 가야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동쪽에 거점을 확보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백제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왜의 행태에 성왕(聖王, ?~554, 재위 523~554)이 답답함 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백제는 가야 '진출'에 애먹었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낙동강 일대에 자리 잡은 가야 소국들을 하나씩 삼키며 몸집을 키웠습니다. 성왕과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이라는 뛰어난 군주가 당시 백제와 신라를 각각 이끌었고, 두 나라의 국력도 왕청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야 전선에서 백제와 신라가 얻은 결과는 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017년 1월에 공개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들(연합뉴스)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300점 이상 출토된 하찰은 561년 무렵 신라의 각 지방에서 함안으로 보낸 세금에 매달았던 하찰인데, 당시 신라의 국가 유통망과 생산·수취 구조를 알려준다. 이 하찰들에 기록된 촌명村名은 오늘날의 영주, 안동, 예천, 의성 등이며, 이곳들은 모두 낙동강의 수계水系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낙동강 수로를 통해 쉽게 함안에 도달할 수 있다. 함안은 당시 '아라가야(안라국)'가 있던 곳이다.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하찰은, 신라가 이들 지역을 차지한 뒤 백제의 가야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낙동강 수로를 활용하여 식량 등 전략 물자를 함안으로 집중시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백산맥이라는 천연 장애물에 가로막혀 가야 지역으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은 백제와 달리 신라는 낙동강 물길을 활용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전선으로 빠르게 보내면서 우위를 차지했음을,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들은 넌지시 말합니다. 병참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우는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고대인들이 쓰던 말이 글로 적힌 목간은 작은 어휘집이기도 합니다. 가령 신라인들이 '가오리'를 '加火魚(*가브리)'로 적었음을 목간으로 확인했는데, 오늘날 경상도에서 '가오리'를 가리켜 '가브리'나 '가부리'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국어사의 한 흐름이 보입니다. 과거 시제 선어말 어미를 '在'로, 주체 높임 선어말 어미를 '賜'로 표기했다는 사실도 목간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賜'의 경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용례가 나오지만, 목간은 후대가 아닌 당대 기록이므로 그 의의가 큽니다.


또한, 2009년에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면서 발견한 사리봉안기로 천년을 이어진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사랑 이야기가 흔들리게 된 사연도 책에 나옵니다. 서동 설화를 실은 『삼국유사』는 선화공주의 바람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사리봉안기에 적힌 이름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그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왕후 사택씨(沙宅氏)였습니다. 선화공주는 가공인물이고, 서동 설화는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미륵을 기리며 지어서 절 이름도 미륵사라고 했는데, 정작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미륵 신앙과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택왕후의 등장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습니다. 사리봉안기가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미륵사 창건에 선화공주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보는 이들의 목소리도 만만찮습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이 논쟁을 정리한 나라이름역사연구소의 조경철 소장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는 민초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글을 마무릅니다. 뚜렷한 해답이 보이지 않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서동 설화는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바뀌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밖에도 『삼국유사』 파른본이 공개되면서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냈음이 더욱 분명해진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국(桓國)'이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까닭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책에 가득 담겼습니다. 우리 고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고대사 산책』은 읽어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7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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