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1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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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하자마자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처음으로 국회 의원을 뽑은 5·10 총선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이 잇달아 터졌습니다. 불길한 출발이었습니다. 정부를 수립한 지 2년도 채 안 돼 터진 한국 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때까지 '북진 통일'을 외쳤던 정부는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나흘 만에 서울을 잃었고, 한강 철교를 끊고 야반도주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통령이었음에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이 실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권이 들어설 무렵부터 정부 형태와 국무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그와 관계가 험악해진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은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 책임제로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야당의 움직임을 알아챈 이승만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으로 맞받아쳤습니다. 이태 뒤인 1954년에는 삼선을 위한 개헌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들고나와 끝내 자기 뜻대로 헌법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이승만은 권좌를 위협하는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며 불굴의 권력 의지를 드러냈는데, 운도 따랐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승만은 힘들이지 않고 경쟁자를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쟁자인 조봉암(曺奉巖, 1898~1959)이 뜻밖의 돌풍을 일으키며 선전하면서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투표에 지고 개표에 이겨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승만은 이때의 '수모'를 잊지 않고, 뒷날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조봉암을 법살(法殺)하였습니다.



4월 혁명 이후 시민들이 끌어내린 이승만 동상(시사저널)


그렇지만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장기 집권을 꾀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마산을 기점으로 하여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나서 시민의 저항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4월 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대권을 다툰 민주당의 조병옥(趙炳玉)이 4년 전 신익희처럼 선거를 앞두고 급사했고, 조봉암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단단해 보였던 이승만 정권은 왜 그토록 쉽게 무너졌을까요?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에서 언론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3~4월 항쟁에서 언론이 학생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 정권과 박 정권은 언론 포섭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정권은 야당보다도 언론으로부터 더욱 시달렸다. 기실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는 데는 언론의 뒷받침이 컸다.


(중략) 1950년대는 신문의 시대였다. 라디오 보급률이 낮았고, 그나마 유행가나 만담, 연속극에 귀 기울이는 정도였다. 정보와 판단의 기준은 대부분 신문에 의존했는데, 해방 직후 좌우 싸움의 선봉장으로 극렬한 논조를 폈던 신문은 불평불만이 많은 도시 중산층과 서민을 주된 구독자로 하고 있어서 야당 성향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정부·여당이 비리·부정·부패가 많았기 때문에 정치면 위주였던 당시 신문은 주로 그런 기사를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승만 국부론을 펼치는 『조선일보』가 이승만이 하야하자 1960년 4월 26일 자 석간 1면에 큼지막하게 '만세! 민권은 이겼다!'라는 제목을 새겨 넣으며 감격했을 정도니 당시 언론이 얼마나 이승만 정권을 적대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물론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한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승만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만히 둘 리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승만 정권의 언론 탄압은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언론 탄압에 견주면 매우 '소박한' 수준이었습니다. 언론계 내부를 갈라놓은 후대의 언론 탄압과 달리 이승만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면 탄압할수록 언론인들은 더 똘똘 뭉쳤고, 독자들은 권력에 맞서는 언론에 성원을 보냈습니다. 결국 『경향신문』 폐간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또 이승만 정권은 시위를 대처하는 능력이 모자랐으며,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이 중립을 지키고, 사태를 지켜보던 미국마저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니 이승만이 기댈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권력욕이 센 이승만이라고 하더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이러한 이승만의 몰락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권력 유지와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사찰 경찰만으로는 정부 비판 세력과 언론 등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긴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여야 정치인부터 학생·언론 등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회유하고 분열시키고 감시했으며, 수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후기에 깡패를 자주 동원해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는데, 박 정권은 그것도 제도 속으로 끌어들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온 사람은 얼마나 당할지 두려워했고, 밖에 나가서 그곳에서 당한 일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정보정치에 의존했고, 그래서 중앙정보부장은 대개 권력에서 제2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정희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도 이승만 정권과는 비교가 안 되게 큰 규모로 강화해 통제정치, 밀실정치를 펴나갔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정권도 이승만 정권처럼 몰락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에 이어서 등장한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4월 혁명이 뿌린 자유의 씨앗은 독재의 시련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습니다.

- 2016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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