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삶 -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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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 모두는 공포와 슬픔의 이유이다. (-) 중요한 것은 전쟁에 대한 절규 외에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상해를 겪은 뒤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나의 삶이 의존하는 사람들, 내가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을 사람들이 저기 밖에 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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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고 애도되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하는 애도성의 차별적인 할당은 누가 규범적으로 인간인가―무엇이 살아 있을 만한 삶과 애도할 만한 죽음으로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어떤 배타적인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하도록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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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영역은 부분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aid)과 보여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hown)으로 구성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의 경계, 보여질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정치적 발화가 작동하고 어떤 특수한 종류의 주체들이 생존 가능한 행위자들로 등장하는 영역의 구획을 정한다. (-)


(-) "적"의 얼굴에 대한 매체의 재현은 레비나스가 보기에 "얼굴"과 관련해 가장 인간적인 것을 삭제한다. (-) 이는 또 (-) 공적으로 승인된 나타남(appearence)의 장의 한계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얼굴이 없는 채 남겨진 이들, 우리에게 너무 많은 악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얼굴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제거해왔던 이들의 삶, 즉 애도성이 무한히 지연되어야 하는 이들의 삶 앞에서 우리가 무감해질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어떤 얼굴은 승인되어 공적 관점이 되어야 하고, 삶 아니 모든 삶의 가치의 합의를 더욱 날카롭게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한다. (-)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물론 애도는 어떤 사람에게는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겠지만, 폭력은 더 많은 상실을 낳을 뿐이고 그 결과 불확실한 삶의 오청을 배려하지 못함으로써 건조한 슬픔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정치적 분노만을 양산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

(-) 어떤 생각을 드러내는 일은 곧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가증스러운 호칭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모욕을 받는 일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런 조건 하에서 계속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호칭의 진실을 무시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들러붙는 오명을 무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위협적으로 들러붙는 무시무시한 동일시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거나 약한 방식으로 말하게 된다. 불일치를 진압하고 비판적 논쟁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이런 전략은 (-) 모욕 주기 술책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 영역 안에 합리적인 의견과 생존 가능한 발화주체로서 포함될 수 있는 것과 포함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면서 역시 작동한다. 이는 (-) 이른바 생존 가능한 말하는 존재(visible speaking being)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잃고 싶지 않기에 그렇게 된다. 동일시와 생존가능성의 의미를 규제하는 사회적 조건 하에서, 검열은 암묵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작동한다. (-)

(-) 국가주의적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보유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말하는 사람으로서 신용을 결핍하게 될 것이고 매체는 그/그녀에게 개방되지 않을 것이다(-).


(-) 이는 또한 어떤 삶이 삶으로서 표식될 수 있고 어떤 죽음이 죽음으로서 포함될 수 있는가를 확립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느끼고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은 미지수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나 공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어떤 삶들과 죽음들의 실재의 운명 역시 미지수다.


(-) 이스라엘 국가는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해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의 행위를 기술하려고 하면서도 정작 자국의 모든 폭력 실제에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체첸의 독립투쟁을 기술하면서 푸틴 역시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경우 체첸 지역에 대한 소련의 폭력적인 행위는 국가적 자기 방어의 행동으로 정당화된다. 미국은 그 단어를 사용해서, (-) 논의의 여지가 없는 폭력의 희생자인 양 자신의 위치를 잡는다. 그러나 폭력을 겪는다는 것과 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틀, 즉 자신의 고통의 출처와 꼭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과녁을 향해 무제한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해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틀의 토대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논점은 폭력을 이해하려는 틀은 폭력의 경험과 나란히 등장하며 그 틀은 어떤 질문들, 어떤 역사적 탐구들은 제외하면서 보복의 도덕적 정당화로 기능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

이러한 설명 틀에는 서사의 차원도 존재한다. 미국에서 우리는 9월 11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이야기할 때 1인칭 서사 관점을 사용한다. (-) 빈 라덴이 가족과 갈라선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등등.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흥미롭다. 개인적 병리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책임이라는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는 것, 아니면 2차 세계 대전 무렵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통해 대중화되었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이론과 일치하는 것, 즉 행위주체성(agency)의 위치를 다시 주체의 관점에 두기에 그럴듯하고 매력적인 서사이다.


(-) 우리는 파괴된 삶과 살해된 사람들을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의 신호로 여기지 않으며, (-) 우리의 행위는 테러로 간주되지 않는다. 9.11 사건과 관련된 선사 역시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들려주기 시작하는 것,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은 이미 행위주체성의 문제―도덕적 다의성(moral equivocation)의 공포를 낳을 것이 분명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전히 잘못된 행위로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또 정념의 구조―우리를 한편으로는 희생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대의인 바 테러의 근절에 관여한 것으로 만드는―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겪었던 폭력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 나는 9월 11일과 함께 시작하는 이야기가 말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들려야 한다. 비록 엄청난 외상이 이런 사례에서 서사 능력을 훼손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그 이야기들은 들리고 있다. (-) 좌파인 내 친구들은 농담 삼아 제1세계인이라는 자기만족을 상실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식으로 그런 자기만족을 회복해야 할까? (-)


(-) 


그저 미국이 과거에 뿌린 씨를 거두어들인 것이라는 식의 좌파의 분석도 분명 존재한다. (-) 그런 설명은 닫힌 설명, 즉 미국의 우선권을 단언하고 미국의 전지전능함을 약호화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


(-) 조건은 개별 행위주체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주체도 조건 없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조건은 우리가 하는 것 안에 전제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마치 조건이 우리를 대신해 행위하는 양 그 조건들을 인격화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


(-)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잠정적으로 개인의 책임과 집단의 책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분명 폭력 행위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비개인적인 사회적 힘에 조종당하는 기계나 얼간이가 아니라 책임감을 갖춘 행위주체들이다. 그들 개인들은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만약 그들의 행위를 순전히 자생적인 의지나 개인적인 병리 혹은 "악"의 징후로 축소하려 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개인주의 담론과 도덕주의(-) 담론은 모두 책임(accountability)의 의미를 이루는 인과론적인 사슬의 첫 번째 고리를 개인으로 본다. 그러나 개인의 자생적인 행위를 도덕적 추론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어떤 세계가 그런 개인을 생기게 했는지를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폐제하는 것이다. (-) 

(-) 이것은 조건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자생적이지 않다. 우리의 행위는 조건화된다. 우리는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영향을 준다. 우리의 "책임감"은 그 둘의 접합 지점에 놓여 있다. 나를 형성한 조건들을 갖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조건들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한 것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가한 힘들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폭력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건 또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책임감은 고양된다. 우리는 폭력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런 경우들에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완전히 훼손된다. 폭력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폭력적인 상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윤리적으로 묻게 된다. 폭력의 역사적인 경주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걸까, 그 폭력에 반응하면서 우리는 누구로 바뀌는 걸까, 우리가 보인 반응으로 인해 폭력이 조장될까 아니면 폭력이 저지당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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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마음을 빼앗은 질문은 이렇다―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끝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으로 중요한가.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는 것이다. (-) 다른 상실도 존재한다. (-) 여성과 소수자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폭력에 종속되어 있고, 폭력의 실현은 아니라고 해도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각자는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신체―욕망과 물리적 취약성의 부지로서의, (-)―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사실과 취약성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신체들이고 다른 이들에 대해 상실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애착심을 갖는다는 것, 다른 이들에 노출됨으로써 폭력의 위험이 있음에도 그들에게 노출된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나는 언제 애도가 성공적인지, 아니 언제 우리가 다른 인간을 완전히 애도하게 되는지를 안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 그러나 나는 (-)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잊어버렸거나 혹은 그밖에 어떤 다른 것이 그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의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자신이 겪은 상실에 의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애도는 사전에 미리 그 결과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그런 변형을 겪기로(변형에 굴복한다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 나는 가령 상실이 일어났을 때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 난 이런 식으로 상실을 겪을 거고 저게 그 결과일 거야. 난 그 임무에 전념할 것이고 내 앞에 놓인 슬픔의 해결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갑자기 파도가 급습하고 (-) 자신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추락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소진될 것이지만 이유는 알지 못한다. (-)

뭔가가 당신을 붙잡는다. 그건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어떤 의미인 걸까?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게 되는 그런 순간들에 무엇이 우리를 요구하는 걸까? 우린 무엇에 묶인 걸까? 아니 우린 무엇에 붙들린 걸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누군가를 잃을 때, 잃어버린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항상 알지는 못한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상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것에 직면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가 상실 속에 숨어 있고 무언가가 상실의 후미진 깊은 곳에서 상실된다. 애도는 자기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아는 것을 포함한다면(그리고 우울증은 원래 어느 정도는 무지(not knowing)를 의미한다), 애도는 그 수수께끼적인 차원, 우리가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상실함으로써 야기된 무지의 경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일 게다.

누군가를 잃을 때, 또는 어떤 장소나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 우리는 뭔가 일시적인 것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애도는 끝날 것이고 그 전의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것을 겪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와 관련된 어떤 것,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은 인연을 묘사하는 어떤 것, (-) 다름 아닌 인연이나 유대가 우리를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어떤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이쪽에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단지 저쪽에 있는 "당신"을 상실한다는, 특히 "당신"에 대한 애착이 "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당신을 잃는다면 나는 (-) 나 자신에 대해서도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 어떤 층위에서는 나는 "당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사라졌음을 알게 될 뿐이다. 내가 어떤 어휘도 미리 마련해두지 못했던 것은 배타적으로 나 자신 혹은 당신 어느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관계성(relationality), 나와 당신이란 항을 차별화하고 연결하는 인연으로 볼 수 있는 관계성이다.

(-) 나는 슬픔이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하고, 슬픔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

(-) 그런 관계들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내가 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갖고 있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당신에게 그것들을 열거하려고 할지 모른다. 나는 이 우정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그 애인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지금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할지 모른다. 나는 나의 관계들을 이야기하는 초연한 내레이터처럼 그 사례들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의 초연함을 극화하면서, 내가 간신히 보여줄지도 모르는 것은 내가 증명하고 있는 초연함의 형식이 바로 자신의 관계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 관계성을 하나의 옵션으로, 즉 근본적으로 나를 지속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건드리지 않는 어떤 것으로 환기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 나는 내가 선택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국 그 과정 어딘가에서 바로 그 관계가 나를 사로잡고 나를 망친 방식을 드러낼 것이다. 나의 서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비틀거린다.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훼손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정치적 곤궁에 대해 혹여 내가 "주장"할 수 있다면, 주장할 것이다. "권리"란 말을 듣게 되는 경우 우리는 대부분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다고 생각한다. 차별에 맞서 보호를 주장할 때 우리는 집단이나 계금으로서 주장한다. 바로 그 언어와 바로 그 맥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뚜렷하게 경계가 정해진 존재―즉 법 앞의 개별적인, 인지 가능한, 묘사된 주체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몇몇 특질들에 의해 정의된 공동체―로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언어를 사용해서 법적인 보호와 법적인 자격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법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틀로 삼고 우리가 무엇에 관한 존재인가를 설명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언어 덕분에 자유주의적인 인간 존재의 판형에 안전하게 몸을 숨긴 법적인 틀 내부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겠지만, 그 언어는 열정, 슬픔, 분노를 공정하게 평가하진 못한다. 열정, 슬픔, 분노, 이 모두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뜯어내어서 다른 이들에게 결속시키고 우리의 자리를 이동시키고 우리를 훼손시키고, 우리 자신의 삶은 아닌 삶들에 숙명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휘말려들게 하는 것들이다.

(-) 우리는 말하고, 다른 이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나 타자와 나 자신의 차이를 붕괴시킬 만한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로 그 문제틀을 가리키는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문제틀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마 그 문제틀은 해결 불가능할 것이고 또 해결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 스스로를 우리 밖에 배치하는 일은 신체적 삶으로부터, 신체의 취약성과 신체의 노출로부터 결과하는 것 같다.


(-)

신체는 도덕성, 취약성, 행위주체성을 함축한다. 즉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며 또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된다. 신체 때문에 우리는 행위주체가 되고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투쟁의 목적인바 신체가 꼭 우리 것은 아니다. 신체에는 항상 공적인 차원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구성되는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며 또 나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된 신체는 타자들의 자국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삶의 도가니 안에서 형성된다. (-)


(-) 우울증 환자의 나르시스트적 몰입이 자리를 이동해서 다른 이들의 취약성에 대한 고려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인간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보다 더 취약하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슬픔이 되는 그런 조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런 조건에 반대할 수 있다. (-)

 

(-)

그러나 취약성을 박탈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좌절된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 이런 일차적인 조건이 어떻게 착취될 수 있고 또 착취당하는지, 좌절되고 부인되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어떻게 억압으로 신음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 삶은 다르게 지지되고 유지된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히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력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 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마 애도의 서열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문 부고란의 양식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거기서 삶들은 재빨리 정돈되고 요약되고 인간화되고 그 와중에 삶들은 통상 이성애적인 행복한 일부일처제로 합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차별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 군대에 살해당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름, 아프간의 어린이들과 성인의 숫자와 관련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름들, 얼굴들, 개인적인 이야기들, 가족, 좋아하는 취미, 슬로건이 없는가? 군사적 수단에 의해 야기된 죽음을 받아들일 때 유쾌하게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표하거나 분명한 복수삼을 표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상실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작동하는 휴머니즘이 "서구적인" 주형틀을 이용해서 "인간"이란 개념을 자연화한 것이라면 아랍인들, 특히 이슬람교를 실천하는 아랍인들은 어느 정도나 "인간" 밖으로 낙오된 것일까? 여기서 작동하는 인간의 문화적인 윤곽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우리의 문화적 틀은 우리가 상실로서 인정할 수 있는 종류의 상실에 어떻게 제한을 두게 되는 걸까? 결국 누군가를 잃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실은 무엇이고 상실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애도는 어떻게 일어날까?

마지막 질문이 바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연구가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과 관련해서 제기해왔던 질문이다. 트랜스-젠더화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학대, 가끔은 살인의 표적이 되었을 때 그 질문을 제기한다. 규범적인 인간 개념, 인간의 신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점적인 개념을 빌미로 종종 원하지 않는 신체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형성기를 거쳐서 간성화된(intersexed) 사람들이 그 질문을 해왔다. (-)


(-) 폭력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은 이미 부인되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삶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기에 다시(또 다시) 부인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미 항상 상실되었거나 결코 "존재한 적"이 없기에 애도될 수 없고 그들은 이런 죽음(deadness)의 상태로 고집스럽게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살해되어야만 한다. (-) 


(-)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

다니엘 펄을 애도하는 일은 나나 우리 가족의 혈통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친숙한 이름, 친숙한 얼굴이고 이는 내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부인이 받은 교육은 그녀의 언어를 나에게 친숙하게, 심지어 감동적이게 만드는데, 이는 비슷한 것들의 가까움 때문이다. 다니엘 펄과 관련해서 나는 낯선 것(the unfamiliar)의 가까움, 즉 새로운 동일시의 유대를 만들어내고 언제나 공통의 인식론적 문화의 토대를 가정할 수는 없을 인간 공동체에 속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차이의 가까움에 불안해지지는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 그곳에 편안히 머무르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친숙한 것을 인간의 삶을 애도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 나는 내가 "당신"에게 묶이는 방식을 발견하고 번역함으로써,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알고자 한다면 나의 언어가 깨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만 "우리"를 모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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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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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기제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는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도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진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 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 사랑은 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


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 (-)


(-) 죽음은 곧 자신의 붕괴, 가지들의 부러짐이다. 처음 사라지는 건 행복이다. 그 무엇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된다. (-)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던 슬픔(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온 듯한 슬픔), 유머 감각, 사랑에 대한 신념과 사랑하는 능력. 그렇게 모든 것들이 걸러져 나가면 스스로에게도 멍청이로 보인다. 원래 머리숱이 적었다면 더 적어지고 원래 피부가 나빴다면 더 나빠진다. 자신에게조차 역겨운 냄새를 풍기게 된다. 다른 사람을 믿거나 감동하거나 슬퍼하는 능력도 잃는다. (-)

현재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게 된 것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의 부재는 다른 것들의 존재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약물치료는 덩굴식물을 난도질한다. 우리는 약물이 그 기생식물을 조금씩 말라죽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가지들이 자연적인 형태를 제법 회복하는 게 느껴진다. (-) 덩굴식물의 무게가 사라져도 대개의 경우 나무에겐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뿌리는 남아 있고 드문드문 남은 잎들이 필수적인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삶도, 강한 삶도 되지 못한다. (-)


(-) 나는 행복할 때는 행복감 때문에 마음이 좀 산란해진다. 행복감이 내 정신과 두뇌 속에서 활동을 원하는 어떤 부분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 상실의 순간에 나의 이해력은 강화되고 예리해진다. 유리로 된 물체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볼 수 있다. (-)


사람을 마비시키는 절박감은 우울증의 커다란 한 부분을 이룬다. 우리는 6인치 높이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을 천 길 낭떠러지에서는 못한다. 추락에 대한 공포가(바로 그 공포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도) 우리를 사로잡는다. (-)


우울증 환자의 주위 사람들은 환자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 주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는 침울해할 여지를 여간해서는 주지 않는다. (-)


(-)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의 진전이다. 우리에게는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약은 약한 독이고, 사랑은 무딘 칼이며, 통찰력은 무리하게 잡아당기면 끊어지고 마는 밧줄이고, 의지력은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므로 그것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


"(-) 첫째로는 그들에게 잊는 법을 가르쳤어요. 우리는 날마다 잊는 연습을 했어요. 완전히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조금씩 잊을 수 있도록 말예요. (-) 그들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 그들이 하고 싶다는 일들을 하게 합니다. 한꺼풀만 벗기면 우울증이 있지만, 온몸의 살갗 바로 아래에 우울증이 숨쉬고 있지만, 그것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잊으려는 노력은 할 수 있죠. (-) 일을 다 배우면 사랑을 가르칩니다. 나는 우리 집 옆에 간이 한증탕을 하나 지었어요. (-) 그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목욕도 하고 서로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도 발라 주게 하고 손톱 손질법도 가르치지요. 그렇게 하면 자신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되니까요. 그들은 그런 느낌을 간절히 원하죠.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접촉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들을 육체적 고립의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결국 감정적인 고립도 해소되니까요. 그들은 함께 몸을 씻고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서로 얘기도 나누고 조금씩 서로를 믿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친구를 사귀게 되고 더 이상 혼자 외롭게 살 필요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 나한테밖에는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게 됩니다."


(-) 나는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심한 우울증은 다르다. 사람은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근절하고자 하는 것은 우울증으로 인해 살아 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이며 이 책도 그런 목적을 위해 쓰인 것이다.


(-)


"우울증은 사회적 저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궁핍과 빈곤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빈곤층 사이에서 우울증은 너무도 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하지 못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 "친구들이 다 그런 상태라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된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외부적인 일들의 탓으로 여기며 외부적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면적인 것도 변할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

(-) 빈곤층 가운데 다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우울증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학습된 무력감이다. 동물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습된 무력감은 맞서 싸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할 때 일어난다. 이런 처지에 놓인 동물은 인간의 우울증과 흡사한 유순한 상태가 된다. (-)


(-) 아이들은 의지를 지녔으며 자신의 힘을 믿으며 자랄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성공적인 힘의 주장은 그 아이들의 상대적인 부유함과 지적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 주장에 대해 (하다못해 부정적으로라도) 반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재앙이다. (-) "우리는 일부 환자들에게 감정들의 목록을 주고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지요. 그들이 무조건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죠. 그런 다음 그들에게 그런 감정들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 다음에 목표를 세우고요. 그들 가운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일인 사람들도 있지요." 


(-) 사람들은 우울증을 에이즈의 결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울증이 먼저인 경우가 많다. (-) "기분장애를 갖게 되면 섹스와 주사 바늘에 대해 훨씬 더 부주의해진다. 콘돔이 찢어져서 에이즈에 걸리는 경우는 극히 적다. (-)"


(-)


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 "유감스럽게도 자살이나 고통, 슬픔의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어떤 증세들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그저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이 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질환과 성격은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어떤 환자들은 심각한 증세들도 잘 견디고 어떤 환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견디지 못한다. 우울증은 심각하게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려면 상당한 생존 욕구가 필요하다. (-)

(-) 우울증을 겪는 동안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생이 끝난 시점에서 불행했던 세월만큼을 더 살 수는 없다. 우울증이 삼켜버린 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당신이 우울증을 겪으며 보내는 순간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 나는 우리 모두가 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으며, 화학적인 운명이나 그로 인한 도덕적인 허점을 거부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선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재기하는지를 아우르는 통일체가 존재한다. (-) 엔젤 스타키는 강철 같은 낙관주의로 대중 앞에서 노리스타운 병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무한한 애정으로 룸메이트에게 몇 시간이고 오이 껍질 벗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나의 집필을 돕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자신들의 생각들을 적어 보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집을 티끌 하나 없이 청소한다. 우울증은 그녀의 기능은 손상시켰지만 성격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아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 경험과 화학 작용의 무질서한 영역을 벗어나 금맥처럼 순수하게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는 없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서로에게 굴복당하거나 서로를 선택하는 자아들의 연속체다. 우리는 각자의 선택들과 상황들의 총합이며 자아는 세상과 우리의 선택들이 만나는 좁은 공간에 존재한다. (-) 의사를 찾아가 특정한 처치를 받으면 그런 관용과 사랑을 지닌 인물로 거듭날 수 있을까? 관용과 사랑은 막대한 에너지와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과연 (-) 주사를 놓듯 인격을 주입하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간디나 테레사 수녀처럼 될 수 있는 그런 날이 도래할까? (-) 훌륭한 자질이란 것도 그저 임의적인 화학적 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이 세상의 어떤 명약도 우리를 재창조할 수는 없으며 다만 우리가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선택이라는 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자아는 매일의 선택들 속에 존재한다. 하루에 두 번씩 약을 먹기로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나이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기로 선택하는 것도, 개를 기르기로 선택하는 것도, (-) 

(-)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진실에 가까울 공산이 크다. (-) 어떤 사건에 대한 통제력에 관해 묻자 정상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실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반면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통제력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와 인지는 정확성이 아닌 자신과 세계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자기 강화적인 환상들이 특징이다. (-) 가벼운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은 정상인들에 비해 자신과 세계와 미래를 정확하게 본다. ......그들에겐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고 실패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환상이 결여되어 있다."


(-)


생존자들은 약에 의존하면서 기다린다. 물론 정신역동 치료나 전기충격 치료, 수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계속 살아간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듯 그것에서 언제,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우울증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도 생기에 차 있다. 어쩌면 내년쯤 나는 다시 무너질 수도 있으며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나는 거의 날마다 순간적인 절망감을 맛보며, 늘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걱정한다. 그리고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충동들에 젖는다. (-) 난 그런 감정들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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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문화사 - 죽을 수 있는 자유
게르트 미슐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시공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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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런던에서는 1829년에 시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시청 직원이 자살 사건 우범 지역을 정기적으로 순찰했다. <휴먼 소사이어티>의 구성원들은 밤중에 하이드 파크의 연못이나 호수를 순찰했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멘체스터와 런던의 경찰은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체포했다. (-) 많은 의사들에게 조울증과 망상은, 문제가 많고 비도덕적인 질환이었다. 그들은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훈계의자'라고 부르는 회전의자에 앉혀 놓고 일장 훈계를 하거나, 찬물로 샤워를 시키거나, 고의로 훼손된 자아감이나 자기애에 '도덕적 처치'를 해주었다.


나바호족은 (-) 자살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모든 생명의 아버지를 불쾌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벌로 자살할 때 사용했던 도구를 영원히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목을 매달아 죽으려는 수족과 나바호족은 가능하면 작은 나무를 선택해서 죽었다.


콜로라도 강 연안에 사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모하비족에게도 자살은 금기 사항이 아니었다. (-) 그들은 모든 종류의 죽음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자살도 예외가 아니라고 인식했다. (-) 모하비 문화는 모든 죽음을 자살로 간주했다. 죽고는 싶으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손에 목숨을 맡기는 것도 자살과 같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적의 손이나 마법으로 죽게 되는 경우도 자살로 인정받았다.


모하비족의 신앙은 개개인에게 자살을 감행할 수 있도록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공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 파탄, 사랑의 실패, 근친상간 또는 질병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며, 그 외에도 죽은 자들이 '영원한 사냥터'로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유혹했다는 이유로 자살했다. (-)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근친상간 죄를 저지른 사람은 소카라는 물고기의 쓸개즙을 마시고 자살해야 했다. 쓸개에 들어 있는 독이 너무나 강해서 누구든 일단 그것을 마시면 순식간에 즉사했다. 남태평양에서는 자살할 때 독성을 지닌 덩굴식물에 목을 매달거나 야자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노인들과 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에게 목을 졸라 달라고 부탁하거나 산 채로 매장되었다. (-)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은 사회에 봉사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이에 실패한 사람은 전통적인 (-)도덕에 따라 자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위 '실패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의 단결과 진보를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 가족에게 수치심을 준 자들도 자살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 이 세상은 질병과 노령화 같은 고통으로 가득 찬 중간 역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인간의 진정한 고향이 아니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몇몇 예외적인 교파들만이 죄인들에게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을 뿐이다.


할복자살할 때 무사들은 맨 먼저 자신의 칼에 몸을 던졌다. 이때 중요한 사항은 복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것이었다. 복부는 중세 일본인들의 도덕 규범에서 진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얼굴은 사회적인 예의를 표할 수 있지만, 복부는 삶의 원초적인 힘과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어떤 시대에서든 경멸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회나 종교 또는 도덕이 개인으로 하여금 자살을 하게 했는지 금지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


오늘날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종교, 철학, 도덕적인 금지 때문에 자살을 포기하는 사람도 드물다. 대부분 자살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고통이나 질병, 노령 또는 외로움 때문에 죽는다. 그런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일부분을 누리지 못한다. 서구 인권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는 한, (-) 스스로 삶에 종지부를 찍어 자신의 존엄을 지킬 권리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삶이 지긋지긋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삶은 자연에 역행하는 행위가 된다. 그때 삶은 일종의 강요나 속박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는 오직 자살만이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삶이 실패했다고 여겨질 때 자살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행동이다. 자살은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계속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다."


고통과 권태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도움과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하고, 죽으려는 의지가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부할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조롱받지 않으면서 삶을 그만둘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할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


충분히 숙고한 뒤에 그야말로 자유 의지로 자살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자살한 사람의 친구들, 친척, 의사, 이웃이나 동료들은 대부분 ‘그 행동’을 경멸한다. 그들은 대부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슬픔과 고통을 느끼기는 하지만 동정과 이해는 불가능하다. (-)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결정에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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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선집 3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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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이야기이며, 그의 모든 생활이다.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그는 비난받는 것인데, 오직 그것만이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 거기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 인물이 "만약 내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둔다면, 사람들은 전혀 나를 알 수 없겠지"라는 강박에 의해, 이전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나 자신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문제이다." (-) 쓰는 것에 지치고 싫증이 나면서도, 이제 그만 닥치라는 도전에 부딪히면서도 여전히 "서두르자. 종이 위에 중단되어 있는 말들"을 내던지는 이 인물(-) 그에게는 가까스로 이 몇 마디를 "다시 읽을 시간만큼 글을 수정할 시간은 더욱 부족"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즉 자기자신을 묘사한 초상이 제일 잘 묘사된 것이라고 말이다. 설령 그 초상이 자신과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달력은 일기의 악마이다. 그는 일기에 무엇인가를 불어넣고 구성하며 선동하고 수호하는 자이다. 자신의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일상적인 나날들의 보호를 받는 것, 즉 글쓰기를 일상적인 나날들의 보호하에 두는 것이다. (-)


일기의 중요성은 그 무의미에 있다. 바로 거기에 일기가 갖는 경향과 법칙이 있다. (-) 매일매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한다. 기록된 매일매일은 모두가 보존된 매일매일이다. 이것은 유리한 이중작용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번 산다. 그래서 사람은 망각으로부터도, 말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의 보물들을 핀으로 고정시키자"라고 바레스는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 일기는 일상생활의 바닥을 긁어 사소한 일이라는 까칠까칠한 면에 달라붙는 닻과 같은 것이다. (-)


일기에는 이중적인 무가치 상호 간의 행복한 보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자신의 생을 갖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자는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글을 쓰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 하루의 여러 범상한 일들을 통해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비껴 나가게 되는 인간이 이것들의 사사로움을 이야기하고 고발하며 혹은 그것에 만족하기 위해 그것들 쪽으로 되돌아간다. (-)


일기를 씀으로써 과연 쓰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되고 때로는 살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된다. (-)


"내가 기록했던 것이 내 안에서 지나간 모든 것을 소생시키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남은 것이라고는 내 지나간 삶에 대해 공허한 반영만을 전해 줄 뿐인 불충분한 몇몇 문장뿐이다." 결국 인간들은 산 것도 아니고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중의 실패이다. 이 실패로부터 일기는 자체의 긴장과 중력을 재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쥘 르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물 밑바닥에 닿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일기는 내 기분을 풀어주고 나를 기쁘게 해주며 또한 나를 메마르게 만들어 버린다."


(-) 신체는 회복되지만 상처의 경험은 남는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상처의 본질은 치료할 수 없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너도 알다시피 내가 신이기 때문이야"라고 그녀가 대답하였다.―"나는 미치광이야......"―"아니야, 너는 보아야 해. 자 어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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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주베르(Joseph Joubert)(-) 특출한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무명으로 살았고, 무명인 채로 죽었으며 사후에도 그러했다(-)

(-)그는 일찍이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쓸 준비를 하고, 그것이 간신히 가능하게 될 조건들을 단호한 결의로 추구했을 뿐이다. (-)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 쓰는 행위가 발생하는 그 원천, 그곳에서 써야만 하는 공간, 공간 속에 국한시켜야 하는 그 빛, 이러한 것이 그에게 그를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문학적 작업에 부적절하게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성향을 요구하고, 그의 안에 그 성향을 확립한 것이다. (-)

 

『수첩』에 붙은 부제 「주베르의 내면의 일기」는 우리를 헤메게 하긴 하지만 오해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바로 가장 깊은 내밀성이며, 이 내밀성에 대한 탐구이고 그곳으로 다다르기 위한 길이며, 결국에는 그것이 틀림없이 하나로 녹아들게 될 말의 공간인 것이다 “모든 것은 깊은 안쪽에서 생겨난다. 아주 사소한 말의 표현도 모두 그렇다. 이것은 아마도 불편한 일이지만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나는 이 필연성에 따른다.” 주베르는 이 필연성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안으로 빠져 들어가거나 너무 깊게 말려 들어가는 정신”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런 경향은 그의 세기世紀의 독특한 결점인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슬프게 적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에게는 이미 표면이 없다.” 이것은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특히 예술이라는 형태로만, 이미지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이미지를 통해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공간을 통해서만 쓸 수 있는 인간에게는 괴로운 확인이다. (-)

 

(-)이것은 내밀성이지만 간신히 그의 내밀성일 뿐, 언제나 그에게서 멀어지는 형태로, 이 거리로부터도 멀어지는 형태로 머물러 있으며, 많은 경우 자기자신을 삼인칭으로 고찰할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가 “나는 참을성이 강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고 썼을 때, 곧 다시 “그는 …… 갖고 있지 않다”라고 쓸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거대한 사유를 갖고 있지 않다.“ ”……쓸 능력이 없어“, (”정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괄호 속에 있는 말은 죽기 직전의 것이다.

 

왜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는 것일까? 꽤 이른 시기부터 그는 쓰인 것이나 쓴다는 행위에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결코 표현 장애 때문에 어찌할 수 없게 마비되어 버린 인간이 아니었다. 요컨대 그의 편지는 그 수도 많고 세밀한 장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기의 천재성이라 할 만한 재능으로 쓰여져 있다. (-) 그런데 이 인물은 더없는 재능을 갖추고 거의 매일 곁에 수첩을 두고 거기에 무언가를 썼는데,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고 출판해야 할 어떤 것도 남겨 놓지 않은 것이다((-)퐁텐Pierre Fontaine은 1803년에 그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제안하는데 자네가 보낸 하루에 대한 여러 고찰을 정리해서 매일 밤 써 보면 어떻겠나. 좀 나중에 자네의 그 두서없는 생각 속에서 골라 보는 거야. 그러면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아름다운 저작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놀라게 될 걸세.’ 이 아주 아름다운 저작을 만들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주베르의 공로인 것이다).

일기를 통해 가식적인 풍부함이라든지 겉모습뿐인 언어 등의 기쁨을 얻고, 그러한 기쁨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지 않으며 완전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력을 잃어 버리는 작가가 있는데, 주베르도 그런 작가들 중 하나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큼 그와 관계없는 것도 없다. (-)그는 마흔 살이 되기까지는 자신은 지금 다른 많은 저작과 마찬가지로 멋진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들은(-) 소설의 기획이기도 했으며, 그 단편들은 지금 우리 손에 남아 있다. 요컨대 그때까지 『수첩』은 전혀, 혹은 거의 쓰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첩』은 그가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 생각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자신이 따라야만 하는 매혹을, 그가 그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하는 움직임을 알게 된다. (-)

“실제로 나의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목적을 상정하고 있는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예술을 함으로써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가? 이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야심인가! 이것이 내가 바랐던 것인가? …… 이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오랜 동안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잘 조사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1799년 10월 23일에 쓰여졌고, 당시 주베르는 마흔 다섯 살이었다. 일 년 후 10월 27일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언제냐고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답해 드리지. ……내가 나의 球體를 에워싸게 될 때다.” 이 물음은 그의 생활 전체를 통해 이어지며, 나날이 강해져 간다. (-)주베르는 극히 추상적인 성찰만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책 없는 저자, 저작 없는 작가로서 이미 완전히 예술에 속해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품고 있지 않다. (-)친구들의 “언제?”라는 물음에 대해 눈에 보이는 작품을 통해서 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은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 저작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예술에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확신이다.


(-) 

“이것을 고백해 두려 한다. 나는 아이올로스Aeolos의 하프와 같다. 아름다운 소리는 좀 낼 줄 알아도 곡은 전혀 연주하지 않는 아이올로스의 하프이다.”

 

“저녁놀은 멋지다. 이것은 조심스럽고 완화된 햇빛이다. 그러나 새벽빛은 별로 멋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햇빛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혹은 세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정말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끝“에 불과하다. 햇빛의 끝에 불과하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중간적 빛”이다. (-) 그 빛이 중간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그것이 신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제나 그 빛의 반쪽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그 경우 빛은 분할된 빛이며 또한 우리를 분할하는 빛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 괴로운 분할에 동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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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의 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되살아날 때마다, 가슴은/이미 알았고, 닫힌다.//매번 그것은 찢어짐,/매번 그것은 죽음./우리는 언제나 싸웠다./싸움을 결심한 사람은 죽음을 맛보고, 핏속에 갖고 다닌다./더이상 증오하지 않는/착한 적들처럼/우리는 똑같은 목소리,/똑같은 고통을 갖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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