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선집 3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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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이야기이며, 그의 모든 생활이다.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그는 비난받는 것인데, 오직 그것만이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 거기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 인물이 "만약 내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둔다면, 사람들은 전혀 나를 알 수 없겠지"라는 강박에 의해, 이전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나 자신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문제이다." (-) 쓰는 것에 지치고 싫증이 나면서도, 이제 그만 닥치라는 도전에 부딪히면서도 여전히 "서두르자. 종이 위에 중단되어 있는 말들"을 내던지는 이 인물(-) 그에게는 가까스로 이 몇 마디를 "다시 읽을 시간만큼 글을 수정할 시간은 더욱 부족"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즉 자기자신을 묘사한 초상이 제일 잘 묘사된 것이라고 말이다. 설령 그 초상이 자신과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달력은 일기의 악마이다. 그는 일기에 무엇인가를 불어넣고 구성하며 선동하고 수호하는 자이다. 자신의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일상적인 나날들의 보호를 받는 것, 즉 글쓰기를 일상적인 나날들의 보호하에 두는 것이다. (-)


일기의 중요성은 그 무의미에 있다. 바로 거기에 일기가 갖는 경향과 법칙이 있다. (-) 매일매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한다. 기록된 매일매일은 모두가 보존된 매일매일이다. 이것은 유리한 이중작용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번 산다. 그래서 사람은 망각으로부터도, 말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의 보물들을 핀으로 고정시키자"라고 바레스는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 일기는 일상생활의 바닥을 긁어 사소한 일이라는 까칠까칠한 면에 달라붙는 닻과 같은 것이다. (-)


일기에는 이중적인 무가치 상호 간의 행복한 보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자신의 생을 갖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자는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글을 쓰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 하루의 여러 범상한 일들을 통해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비껴 나가게 되는 인간이 이것들의 사사로움을 이야기하고 고발하며 혹은 그것에 만족하기 위해 그것들 쪽으로 되돌아간다. (-)


일기를 씀으로써 과연 쓰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되고 때로는 살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된다. (-)


"내가 기록했던 것이 내 안에서 지나간 모든 것을 소생시키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남은 것이라고는 내 지나간 삶에 대해 공허한 반영만을 전해 줄 뿐인 불충분한 몇몇 문장뿐이다." 결국 인간들은 산 것도 아니고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중의 실패이다. 이 실패로부터 일기는 자체의 긴장과 중력을 재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쥘 르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물 밑바닥에 닿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일기는 내 기분을 풀어주고 나를 기쁘게 해주며 또한 나를 메마르게 만들어 버린다."


(-) 신체는 회복되지만 상처의 경험은 남는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상처의 본질은 치료할 수 없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너도 알다시피 내가 신이기 때문이야"라고 그녀가 대답하였다.―"나는 미치광이야......"―"아니야, 너는 보아야 해. 자 어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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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주베르(Joseph Joubert)(-) 특출한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무명으로 살았고, 무명인 채로 죽었으며 사후에도 그러했다(-)

(-)그는 일찍이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쓸 준비를 하고, 그것이 간신히 가능하게 될 조건들을 단호한 결의로 추구했을 뿐이다. (-)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 쓰는 행위가 발생하는 그 원천, 그곳에서 써야만 하는 공간, 공간 속에 국한시켜야 하는 그 빛, 이러한 것이 그에게 그를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문학적 작업에 부적절하게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성향을 요구하고, 그의 안에 그 성향을 확립한 것이다. (-)

 

『수첩』에 붙은 부제 「주베르의 내면의 일기」는 우리를 헤메게 하긴 하지만 오해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바로 가장 깊은 내밀성이며, 이 내밀성에 대한 탐구이고 그곳으로 다다르기 위한 길이며, 결국에는 그것이 틀림없이 하나로 녹아들게 될 말의 공간인 것이다 “모든 것은 깊은 안쪽에서 생겨난다. 아주 사소한 말의 표현도 모두 그렇다. 이것은 아마도 불편한 일이지만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나는 이 필연성에 따른다.” 주베르는 이 필연성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안으로 빠져 들어가거나 너무 깊게 말려 들어가는 정신”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런 경향은 그의 세기世紀의 독특한 결점인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슬프게 적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에게는 이미 표면이 없다.” 이것은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특히 예술이라는 형태로만, 이미지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이미지를 통해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공간을 통해서만 쓸 수 있는 인간에게는 괴로운 확인이다. (-)

 

(-)이것은 내밀성이지만 간신히 그의 내밀성일 뿐, 언제나 그에게서 멀어지는 형태로, 이 거리로부터도 멀어지는 형태로 머물러 있으며, 많은 경우 자기자신을 삼인칭으로 고찰할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가 “나는 참을성이 강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고 썼을 때, 곧 다시 “그는 …… 갖고 있지 않다”라고 쓸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거대한 사유를 갖고 있지 않다.“ ”……쓸 능력이 없어“, (”정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괄호 속에 있는 말은 죽기 직전의 것이다.

 

왜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는 것일까? 꽤 이른 시기부터 그는 쓰인 것이나 쓴다는 행위에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결코 표현 장애 때문에 어찌할 수 없게 마비되어 버린 인간이 아니었다. 요컨대 그의 편지는 그 수도 많고 세밀한 장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기의 천재성이라 할 만한 재능으로 쓰여져 있다. (-) 그런데 이 인물은 더없는 재능을 갖추고 거의 매일 곁에 수첩을 두고 거기에 무언가를 썼는데,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고 출판해야 할 어떤 것도 남겨 놓지 않은 것이다((-)퐁텐Pierre Fontaine은 1803년에 그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제안하는데 자네가 보낸 하루에 대한 여러 고찰을 정리해서 매일 밤 써 보면 어떻겠나. 좀 나중에 자네의 그 두서없는 생각 속에서 골라 보는 거야. 그러면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아름다운 저작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놀라게 될 걸세.’ 이 아주 아름다운 저작을 만들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주베르의 공로인 것이다).

일기를 통해 가식적인 풍부함이라든지 겉모습뿐인 언어 등의 기쁨을 얻고, 그러한 기쁨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지 않으며 완전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력을 잃어 버리는 작가가 있는데, 주베르도 그런 작가들 중 하나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큼 그와 관계없는 것도 없다. (-)그는 마흔 살이 되기까지는 자신은 지금 다른 많은 저작과 마찬가지로 멋진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들은(-) 소설의 기획이기도 했으며, 그 단편들은 지금 우리 손에 남아 있다. 요컨대 그때까지 『수첩』은 전혀, 혹은 거의 쓰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첩』은 그가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 생각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자신이 따라야만 하는 매혹을, 그가 그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하는 움직임을 알게 된다. (-)

“실제로 나의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목적을 상정하고 있는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예술을 함으로써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가? 이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야심인가! 이것이 내가 바랐던 것인가? …… 이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오랜 동안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잘 조사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1799년 10월 23일에 쓰여졌고, 당시 주베르는 마흔 다섯 살이었다. 일 년 후 10월 27일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언제냐고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답해 드리지. ……내가 나의 球體를 에워싸게 될 때다.” 이 물음은 그의 생활 전체를 통해 이어지며, 나날이 강해져 간다. (-)주베르는 극히 추상적인 성찰만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책 없는 저자, 저작 없는 작가로서 이미 완전히 예술에 속해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품고 있지 않다. (-)친구들의 “언제?”라는 물음에 대해 눈에 보이는 작품을 통해서 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은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 저작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예술에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확신이다.


(-) 

“이것을 고백해 두려 한다. 나는 아이올로스Aeolos의 하프와 같다. 아름다운 소리는 좀 낼 줄 알아도 곡은 전혀 연주하지 않는 아이올로스의 하프이다.”

 

“저녁놀은 멋지다. 이것은 조심스럽고 완화된 햇빛이다. 그러나 새벽빛은 별로 멋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햇빛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혹은 세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정말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끝“에 불과하다. 햇빛의 끝에 불과하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중간적 빛”이다. (-) 그 빛이 중간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그것이 신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제나 그 빛의 반쪽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그 경우 빛은 분할된 빛이며 또한 우리를 분할하는 빛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 괴로운 분할에 동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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