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한담 법정 스님 전집 5
법정 지음 / 샘터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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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노라면 문득 안스럽고 가엾은 연민의 정을 느낄때가 많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처지로 보아 몹시 미운 놈일지라도 한참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미운 생각은 어디라도 돌려 세워 보면 그 뒤뜰에는 우수의 그늘이, 인간적인 비애가 서려 있다.

얼굴은 가려진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환한 얼굴과 싱그러운 미소로써 기쁨에 넘치는 속뜰을  드러내고 그늘진 표정과 쓸쓸한 눈매로써 우수에 잠긴 속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얼굴은 얼의 꼴이다.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니 얼굴마다 수심이 서리고 굳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80년대의 얼굴인가. 우리가 기대하던 그런 얼굴이란 말인가. 내 입에서도 곧잘 재미 없는 세상이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언제는 깨가 쏟아지게 신나고 재미있는 세상이었던 것처럼 한입 두입 '재미 없는 세상'이라고 뇔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돌림병처럼 온통 재미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재미가 없는 세상을 말로써 거듭거듭 다질 때, 어쩌다 움터 나올 재미도 그 싹을 틔울 수 없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낙원이 아닌 사바세계다. 사바세계라는 그 어원은 범어에서 온 말인데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온 데 길이 든 우리는, 또 참고 견디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다 높은 가치를 찾아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지고 드러냄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이다. 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말에 하면 하나같이 인생은 짧다고 한다.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 인생은 곧 끝나버린다는 것. 후딱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곧 끝나버린다는 말이다. 현재의 이 육신을 가지고는 단 한번뿐인 인생.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인 우리.

그렇다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그것도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기 전에 각자에게 배당된 그 한정된 시간을 마음껏 활용해야 할 것이다. 자기 몫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바로 실행할 일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니까.


12세기 선승 원오 극근은 그의 어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 같은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죽음에 당해서는 조금도 생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살 때에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다. 사는 것도 나 자신의 일이고 죽음도 나 자신의 일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은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미련없이 신속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때그때의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의 특색은 이와 같이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데에 있다. 생과 사에 철저할 때 윤회의 고통 같은 것은 발 붙일 틈이 없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다행히도 저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생각과 말과 행동양식, 즉 업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존재다.

우리들은 이 지구상에서 자기의 특성을 실현하도록 초대받은 나그네들이다. 사람은 자기 자리에 맞도록 분수와 특성에 어울리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의 자리를 엿보거나 가로채면서 자기 특성을 버린다면 그는 도둑일 뿐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실현할 수 없다.


저마다 특색을 지닌 얼굴이기 때문에 남의 얼굴을 닮아서는 안 된다. 자기 얼굴을 자기다운 얼굴을 가꾸어나가야 한다. 자기 얼굴을 가꾸려면 뭣보다도 자기답게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 얼굴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기 때문.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가리켜 이력서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의 얼굴이 사랑으로 둘러싸이지 않을 때는 굳어진다. 그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단순한 소재다. 맑은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빈 꺼풀.


사람에게 웃음과 눈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웃음과 눈물이 우리를 구현한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닫혀진 밀실에서 활짝 열린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어준다. 눈물 어린 얼굴에서 친구의 진실을 본다. 반대로 우거지상을 한 굳은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은 우리들의 뜰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살아가는 기쁨을 앗아간다.

역사상 독재자들의 얼굴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이 없다. 무섭도록 굳어 있기만 하다. 그의 내면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이리라. 누가 자기한테 오래오래 해 처 먹으라고 욕이라도 하지 않나 혹은 자기 자리를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미지나 않을까 해서 늘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이 다음에는 어리석은 백성한테 또 어떤 먹이를 던져줄까, 머리를 짜다보면 잠자리인들 편하겠는가. 그래서 잔뜩 굳어져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고 했다. 자기가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링컨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새로운 각료로 기용해보라고 어떤 사람을 천거했다. 링컨은 친구가 소개해 보낸 사람을 만났지만 그를 기용하지는 않았다. 며칠 후 친구가 대통령을 찾아와 자기가 소개한 사람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한 거냐고 물었다. 이때 링컨의 말,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네."

"여보게. 얼굴이야 부모가 만들어준 것인데 그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친구의 항의를 듣고 링컨은 이렇게 말한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만들어준 얼굴로 통하지만 인간이 마흔을 넘어서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네."


그렇다. 우리는 아무리 재미없는 세상에서라도 우리들의 얼굴을 만들 책임이 있다.


_법정 스님 「우리들의 얼굴」 『산방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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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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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요동지방에서 비둘기를 기르는 것이 널리 보편화되었다고 언급하면서, 매일 비둘기가 요동벌의 콩을 배불리 먹고 저녁에 돌아오면, 미리 석회수를 석조石槽에 받아 두었다가 비둘기를 마시게 한다. 그러면 비둘기들이 하루 종일 먹었던 콩을 모두 토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소나 말을 먹인다고 했다.*

 

*현전 『열하일기』에서는 해당 구절을 못 찾았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발합변증설>에 관련 기록이 있다. “遼東多畜鵓鴿. 每日飽食遼野之菽, 而夕還家, 故養鴿家預置猛灰水於石槽, (?)鴿栖前. 鴿群夕還, 必飮石槽灰水, 而吐菽, 取之以飼牛馬, 日以爲常.”


(-)


유의경劉義慶의 『명험기冥驗記』에 실린 이야기는 이렇다. 앵무새가 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산에 날아왔다. 산 속 새들이 앵무새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다. 앵무새가 한 동안 이 산에 머물다가, 비록 이곳이 즐겁긴 해도 오래 있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떠나갔다. 몇 달 뒤 산 속에 큰불이 났다. 앵무새가 멀리서 보고 문득 물 속에 들어가 깃털을 적셔서는 날아가 이를 뿌렸다. 천신天神이 말했다. "네 뜻이 비록 가상하나, 어찌 그렇게 해서 불을 끌 수 있겠는가?" 앵무새가 대답했다. "비록 끌 수 없는 것은 알지만, 일찍이 이 산에서 몸을 맡겨 살았습니다. 같은 금수로 형제된 처지에 차마 볼 수 없어서일 뿐입니다." 천신이 가상히 여겨 즉시 불을 꺼주었다.


_『녹앵무경』


_정민 「18세기 지식인의 완물(玩物) 취미와 지적 경향─『발합경』과 『녹앵무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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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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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경험이라는 말

 

작품은 작품에 헌신하는 자를, 작품이 스스로의 불가능성의 시련을 견디어내야 하는 지점으로 끌어당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작품은 하나의 경험이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말테의 수기>의 한 구절 중에서 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시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이다.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사물들을 보았어야 한다 ……." (-) 추억은 잊혀질 필요가 있다. 망각, 이 심오한 변신의 침묵 속에서 마침내 한 줄 시의 한 단어, 그 첫 마디가 탄생하기 위해 추억은 잊혀질 필요가 있다. 경험은 여기서 존재와의 접촉, 이 접촉에 의한 자기 자신의 개혁, 즉 하나의 시련, 그러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련을 의미한다.

발레리는 어느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생동안 진정한 화가는 그림을 추구하고 진정한 시인은 시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확정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정되지 않은 작업 속에서 필요와 목표, 수단들 또 장애물들까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접근할 수 있는 진리나 확신처럼 시가 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인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또 시란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작품 하나하나, 작품의 순간순간은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려야 하는 자는 아무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지 작품은 그가 하고 있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그를 끄집어낸다.

(-)발레리는 시를 더욱더 까다로운 작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 시를 보호하고자 하는, 거의 순진하기까지 한 염려에서였다. (-)이러한 예술은 특히 그 활동 자체를 거북하게 하는 것, 이 활동을 더할 나위없이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이 활동을 모든 살아 있는 자에게 그리고 그중 누구보다도 예술자라는 자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 같다. (-)시는 연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연습은 바로 정신의 순수함이며, 의식이라는 모든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이 공허한 능력이 현실적인 능력이 되어, 그 조합의 무한성(-)을 엄격한 한계 안에 가두는 순수한 지점이다. (-)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작품이란 정신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의 구체적 실현에 불과하며, 정신은 작품을 스스로 다시 확인하고, 무한히 스스로를 훈련하는 기회로만 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글을 쓰는 작업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것에 따라 현재의 우리가 된다. 그러면 쓰여진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문학작업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어떤 가능성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책을 만드는 행위, 그것은 다른 행위보다 더욱 깊이 우리를 수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글을 쓴다는 행위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작업, 인내, 그리고 정신집중력 등 이것이 그 행위 자체일까?(-)

 

 

만족한 죽음

 

카프카가 그의 일기의 어느 메모에서 지적한 사항은 우리가 숙고해볼 만한 것이다. "(-)아주 설득력 있는 가장 좋은 구절들에서는 언제나 누군가가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매우 힘든 죽음이다. 또한 죽음을 하나의 부당함으로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모든 부분은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독자에게 매우 감동적이다.(-)" 이것은 카프카가 1914년 12월에 한 사색이다. (-)이 모든 구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주인일 수 있어야만, 또 죽음과 절대주권의 관계를 맺게 될 때에만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 우리가 침착성을 잃게 되는 것(-) 억제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면 작가는 더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소리친다. 이것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혹은 아무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서투르고 확실치 않은 외침이다. (-)

(-)카프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경험과 관련된 개념이다. (-) 자기 글 중 어느 것을 생각하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감옥에서 In der Strafkolonie>라는 작품일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일기를 쓰기 며칠 전 카프카는 친구들에게 이 작품을 읽어주었으며, 그렇게 읽는 동안 카프카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

(-)"예술은 진실이라는 불 주위를, 거기에 타죽지는 않겠다는 확고한 의도를 품고 맴돌며 난다." 여기서 예술은 죽음 주위를 맴돌며 난다. 그러나 그 속에 뛰어들어 타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그 화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예술은 태워 화상을 입히는 것, 차갑게 거짓으로 감동시키는 것이 된다. (-)만족스럽게 죽는다는 것, 그 자체로서는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 카프카의 견해이다. (-)"만족하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은 세계와의 정상적인 관계가 벌써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는 말하자면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유배생활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이런 죽음 또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 이런 선물은 글을 쓰는 재능과 관계가 있다. 물론 정상적인 가능성들로부터 추방당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극단적인 가능성에 대한 통제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삶을 빼앗겼다고 해서 죽음의 행복한 소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 같은 해에 두 번씩이나 카프카는 그의 일기 속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것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평화롭게 죽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격리, 이러한 고독에의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글을 쓰는 작업이다. (-)카프카는 글을 쓰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평화 속에서 죽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어떻게 쓸 것인가?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족하게 죽을 수 있어야만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를 이 경험의 심오함 속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

 

 

 

(-)작가란 죽을 수 있기 위하여 글을 쓰는 자이다. 그는 미리 앞당겨진 죽음과의 관계로부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이다.(-) 시인은 단지 시 앞에서만 마치 시를 쓴 후인 것처럼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쓰는 작품을 통해서 카프카가 죽을 수 있는 능력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이것은 작품은 그 자체가 죽음의 경험이며, 또한 그에 앞서 사전에 죽음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작품에 다다를 수 있으며 또 그럴 때에만 작품을 거쳐 죽음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함을 우리는 예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와 작품 간의 이토록 이상한 관계, (-) 이런 비정상성은 시간의 형태들을 뒤흔들어 엎는 이 경험에 기인한다고까지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숙히는 이 경험의 모호성, 즉 카프카가 너무나도 단순하게 죽을 수 있기 위하여 글을 씀─글을 쓸 수 있기 위하여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이 경험의 이중적인 면에 기인한다. 이 말은 우리를 그것들이 표현하는 순환적인 의무 속에 가두어버린다. 순환적인 의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찾아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단지 출발점만을 추구하게 강요하여, 이 지점을 거기로부터 멀어짐으로써만이 다가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또한 허용한다. (-) 끝을 포착하고 한계를 솟아나게 하는 희망도(-)

(-)천재는 죽음을 무릅쓴다. (-)프루스트의 알쏭달쏭한 표현에 의하면 작품은 "쓴맛이 덜해지고" "덜 불명예스러워진" 그리고 "아마도 가망성이 더 희박해진" 죽음이다. (-) 예술은 어떤 한 순간에는 스스로 역사의 하나가 되는, 기억해야 할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주의가 주는 만족도는 곧 힘을 잃는다. (-)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작업, 이 세상 속에서의 행동, 그리고 진실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고자 원하여,(-) 작품 속에서 부동의 안정된 존재로 지속하고자 하는 바람은 헛된 것이다. 이런 욕망은 헛되다.(-) 필요한 것은 우상들과 같은 게으른 영원성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고 소멸하여 우주의 변모에 협동하는 것이다. (-)작품에 의해 살아 남고자 하는 꿈은 비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

 

 

나는 죽을 수 있는가?

 

작가는 죽을 수 있기 위하여 글을 쓰기에 전념한다.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상식을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하나의 사건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 같다. 즉 우리 쪽에서 다가가지 않아도, 우리가 노력하지도 조심하지도 않아도, 죽음이라는 사건은 오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올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그 사건에 진실이 결핍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죽음이라는 사건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진실, 즉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존재의 척도인 진실이 없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그 어느 누구도 죽는다는 사실에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곳에서는 사고의 단호함과 진실은 부서져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

그러므로 죽을 수 있는 능력은 이제 의미 없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의 목표가 죽음의 가능성의 추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나는 죽을 수 있는가? 나는 죽을 능력이 있는가? 오로지 모든 핑계가 거부되었을 때에만 이러한 질문은 힘을 발휘한다. 인간이 온 힘을 다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의 확신 속에 자신을 집결시킬 때, 그때부터 인간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가 된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목숨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인간은 다시 유한한 목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두 번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목숨이 되어야 한다는 것. (-) 바로 이것이 인간의 인간적 사명이다.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죽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죽음은 임무, 우리가 능동적으로 장악해야만 하는 것,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자제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존재한다. 그는 강렬하게 자기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또한 이 관계의 심판관은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죽음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이루어가며, 유한한 목숨이 된다. 그럼으로써 무언가 이루는 능력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가 하는 일에 의미와 진실을 부여한다. 존재함이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 이것이 바로 죽음의 가능성이다.(-)

 

 

키릴로프 Kirilov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살할 수 있다. 이것은 경이로운 수단이다.(-)자기 가까이에 있는 온순하고도 확실한 죽음, 그것은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바로 우리에게 공기, 공간, 유쾌하고 경쾌한 움직임을 주기 때문이다. 죽음, 그것은 가능성이다.

(-)"나는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새롭고 끔찍한 나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살할 것이다."(-) 그가 자유의사로 죽는다면, 죽음 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죽음의 자유를 체험하고 또 그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다면, 그는 절대에 도달할 것이다. (-)문제는 증거 이상의 것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키릴로프의 앎이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그 자체가 걸려 있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투인 것이다. 과감한 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 자유로운 죽음 속에 신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내거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죽음에까지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는 또 바로 자기 이후에 인간들은 더이상 자살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음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그의 죽음이 삶을 해방하고 삶을 충만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광기, 두려움으로 현기증이 날 때까지 그 방황하는 사고가 스스로 위장하는 가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인 이 가면, 이러한 것만으로도 키릴로프의 기도는 매혹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그것에 거는 지고함에 직면하기 위하여 신이라는 이 지고의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에게 죽음을 부여할 수 있는가? 나는 죽을 힘을 가지고 있는가? 완전히 나의 자유를 행사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나는 죽음 속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인간적으로 한 인간의 죽음을 죽는 것일까? 그 죽음에 나는 모든 자유, 인간적인 의도를 배어들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나 자신으로서 죽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죽는 것일까?(-)

(-)순수성, 그의 행위의 총체가 막연한 것의 무한함, 죽음이라는 거대한 불분명성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기 자유를 긍정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자기 자신이 확인되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죽음을 진실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리아 Arria

 

죽음을 정복한다는 것은 죽음 앞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극기적인 평온함으로 표현되는 무관심한 지고의 권위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리아 Arria는 남편인 카에시나 포에투스 Caecina Poetus가 주저하는 것을 보고 단도를 가슴에 깊이 찔렀다가 다시 뽑아 그것을 남편에게 주면서 "아프지 않군요,"라고 말한다. 이때의 이 단호함, 꼿꼿함은 매우 인상적이다. 위대한 죽음, 임종의 고통을 맞아들이는 침착성과 절도는 우리를 기쁘게 감동시킨다. (-) 키릴로프의 마지막 순간은 말할 수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또 키릴로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기의 동반자, 예전에 자기가 불유쾌한 침묵 속에서 그 곁에 누워 있던 자신의 또다른 반쪽의 목숨도 끊어버린 것이다. 키릴로프는 최후의 대화자로서, 또 결국은 유일한 적으로서 적나라하게 가장 음침한 이 얼굴밖에는 대할 수 없었으며, 그 속에서 그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의도의 실패였다. (-)죽는 순간, 그는 신과의 고결한 투쟁 속에 돌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만난 것은 고귀함이란 전혀 없는 힘, 그것의 훨씬 더 현실적인 이미지인 베르호벤스키였다. 키릴로프는 이 비천한 힘과 짐승처럼 맞서 겨루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모순들 속에 빠져들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고자 애쓴 우리들 자신의 한 부분, 자유롭고 지배적인 이 부분은 자살 속에 깃든 계획적인 면, 특히 자살이라는 사건 속에 문제시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클라이스트의 얼굴에서 읽는 것은 목표 없는 열정, 당치 않은 헛된 정열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정열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수동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자발적인 죽음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또한 바로 이 극단적인 수동성이다. (-)행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했다는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아리아의 태연자약함은 자기 스스로의 통제권을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부재의 증거, 자기 실종을 위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리아의 태연함, 그것은 비인칭이며, 중성인 그 누군가의 그림자인 것이다. 열에 들뜬 듯한 키릴로프의 불안정성과 방황하는 발걸음은 삶의 동요나 항상 살아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키릴로프가 아무도 머무를 수 없는 공간, 이런 점에서 밤의 공간이며, 아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공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살은 물론 삶에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삶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자살은 더 본질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자살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부정에 속하는 자는 부정에 대한 소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벌써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부재의 중립상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절망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른 그 절망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이 죽음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병인 것이다. 죽음 속에서 더이상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병, 죽음이(-) 이제 더이상 오지 않는 것이 된 병인 것이다.

자살이 나약한 것은 자살을 수행하는 자가 아직도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행하는 자는 이 세상의 시민에게만 합당할 힘을 입증해 보인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자는 살 능력이 있는 것이다. 목숨을 끊는 자는 희망에 얽매여 있다. 끝장을 내버리겠다는 희망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 희망은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 아직도 종말에서 시작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죽음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던 의미를 개시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준다. 절망하는 자는 자발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죽기를 희망할 수 없다. 그에게 시간이란 없다. 죽기 위해서 디뎌야 할 발판인 현재가 없는 것이다. (-)

 

 

기이한 계획 혹은 이중의 죽음

 

우리는 목숨을 끊을 것을 "계획"할 수는 없다. 표면상으로는 계획이라 해도 이것은 결코 도달되지 않는 그 무엇, 조준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계획이다. 그 계획의 끝은 내가 끝으로 간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도착할 수 없는 것으로 내가 잡을 수 없는 죽음, 그 어떤 종류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도 나와 연관되지 않은 죽음, 결코 오지 않는 죽음, 내가 그것을 향하여 갈 수 없는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살 속에 깃든 기이함, 그 피상적인 면, 매혹적이고도 기만적인 면을 이해하게 된다. 자살한다는 것은 죽음을 다른 죽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죽음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죽음에 다다르리라고 생각한다. 그 죽음에 대해 나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리고 죽음 또한 나에게 아무런 힘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자살은 본질적으로 내기이며 뭔가 모험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일어나듯이 내가 살아날 수 있는 요행을 남겨놓기 때문이 아니라, 자살은 의식적으로 결심하고 씩씩하게 결행한(-) 확신에서부터 (-)이방의 것으로 남는 것,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것(-)으로의  도약이며 이동이기 때문이다. 자살을 통해서 나는 내가 결정한 순간에 내 목숨을 끊기를 원한다. 나는 죽음을 현재에 묶고자 한다. 그렇다, 지금, 지금. 그러나 이 "나는 원한다"라는 광기보다 더한 착각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코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에는 죽음의 신비로서의 미래를 파괴하려는 놀라운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살하고자 하는 것은 말하자면 미래가 아무런 비밀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미래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미래가 이제 더이상 해독해낼 수 없는 죽음의 불투명한 창고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자살은(-) 오히려 미래로서의 죽음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피상적인 것, 깊이 없는 것, 위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

(-)죽으려고 하는 자가 종종 나타내는, 더할 나위없이 보잘것없는 현실에 대한 세심함, 세부사항에 대한 사랑, 참을성 있고 광적이기까지 한 염려는 바로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죽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의지의 대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죽기를 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의 불확실한 문턱에서 멈춘다. (-) 죽기를 원하는 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밤의 매혹 속으로 진입하여 거기서 의지 없는 열정 속에 죽는 것이다.

 

 

예술, 자살

 

(-)자살은 미친 짓, 광기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런 광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 권리이다. 의무의 이면으로서의 권리가 아닌 유일한 권리이다. (-) 결정적인 순간에 끊어져 꿈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는 무한한 구름다리와도 같이(-) 그러나 그 꿈은 실제적으로 건너야만 하는 꿈이다. (-)

(-)예술가나 자살자, 이들은 둘 다 확고하게 원한다. 또한 그들이 원하는 그것에 그들은 강력한 의무감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능숙함과 수완, 노력, 그리고 이 세상의 확신들을 통해 그 점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은 그런 수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고, 또 영원히 그 어떤 성취와도 무관하며, 끊임없이 모든 의도적인 행동을 망가뜨리는 지점이다. 방향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향하여 어떻게 확고한 걸음으로 다가갈 것인가? 예술가나 자살자 둘 다 무언가 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여, 바로 눈 앞의 것만 바라볼 때뿐인 것 같다. 자살자는 죽음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며, 예술가는 한 권의 책을 작품으로 생각한다. 이런 오해에 장님처럼 그들은 자신을 맡긴다. 그러나 오해가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의식은 있어 이것이 그들의 임무를 오만한 도박으로 만든다. 그들이 마치 한없이 반복함으로써만 그 한계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의 첫 스케치를 하는 것과 같다.

(-)자살자나 예술가 두 경우 모두 문제삼고 있는 것은 포착할 수 없는 것 곁에서, 모든 목적의 왕국이 끝나는 그곳에서조차 능력이고자 하는 어떤 능력이다. 두 경우 모두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결정적인 도약이 개입된다. (-)죽는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전복을 내포한다.(-) 죽음은 시작하고 끝맺음을 하는 나의 능력 밖으로 나를 내던져버림으로써, (-) 죽음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내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 즉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확정성의 비현실성이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전복은(-) 돌이킬 수 없는 횡단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전복이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며 끝나지 않는 것, 또 그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러한 역전을 마치 작품의 기원처럼 추구한다. 이것이 자살과 예술 사이의 첫번째 차이점이다. 자살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 사실을 부인하며,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살은 이러한 거부 안에서만 "가능"하다. (-)자살은 우리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죽음을 보지 않겠다는 거부이다. (-) 자살은 볼 수 없는 것을 추방하기 위하여 볼 수 있는 죽음과 동맹을 맺는 것이며, 내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행사하는 이 선하고 충직한 죽음과 계약을 맺는 것이다. 자살은 그 계약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 계약의 죽음을 그 자체를 넘어서서, 즉 이 계약의 죽음이 또다른 죽음으로 되어버리는 그곳에서조차 더욱더 유효하고 진실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

작품은 말하자면 이러한 무관심 속에 자리잡고 거기에 머무르고자 한다. 그곳에서부터 작품으로 유혹이 온다. 작품을 절대적으로 시련에 부딪히게 하는 것,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 존재가 걸려 있고 무가 사라지며 죽을 권리와 죽을 능력이 달려 있는 본질적인 모험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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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사는 사람들 -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이야기
정순택 외 지음, 윤수종 엮음 / 이학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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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의 몇몇 사람들은 이제 수술도 했으니 돈 조금 모아 외국에 나가 살아라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지만 나는 이 땅에서, 이 나라에서 살 것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이 세상에 가진 희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다. …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로 향해 가는 그 길 위에 있다. 아직까지 제도나 법은 인정 많은 사람들의 포용력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고 몇몇 고집스러운 분들은 여전히 새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가끔은 일침을 가하는 한마디를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_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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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회학
페이스 R.엘리엇 지음 / 을유문화사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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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와 켈너는 기능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부부 가족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불안정하고 관료화된 공적 세계의 냉혹한 비인간성과 무자비한 경쟁과는 아주 뚜렷한 반대의 입장에 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흔히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예를 들면 자살률이 낮다는)에 의하여 지지된다. 게다가 가족이 안식처라는 논지는 자녀의 '건강한' 인성 발달에 안정된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여 보완된다(-). 


(-)


(-) 또한 그는, 험한 세상에서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은 가족에게 '내적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 자유의 실제적 영역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족의 가치를 주장한다. 그의 견해로는 우리 문제의 뿌리깊은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는 것이지 가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구원은 자본주의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진다.


(-)

도바시와 도바시(Dobash and Dobash, 1980)는 스코틀랜드의 두 도시에 대한 폭력 범죄에 관한 공식 기록을 분석하였는데 아내 구타가 모든 심한 폭행의 26%, 그리고 모든 가정 폭력의 76%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부인을 때리는 것이 술주정뱅이나 정신 이상자들이 하는 드문 현상이 아니라 광범위한 것이고, 문화적으로도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도바시와 도바시에 의하면, 많은 남성들은 아내 구타를 남편 권위의 자연적인 확장으로 이해한다. 이 학자들은 또한 가족의 사생활과 독립성에 대한 신념이 경찰의 개입을 어렵게 하고, 아내 구타에 대한 처벌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하며, 여성이 공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도바시와 도바시는, 애정과 보살핌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가족이 동시에 여성에 대한 부당한 폭력이 가장 묵인되는 장소가 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

이러한 논쟁들은 가족이 부정적 긍정적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족에 대한 폭넓은 수용뿐만 아니라 거부를 설명하는 이론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우리는 현대 부부 가족에 대한 플레처(Fletcher, 1973)의 지속적인 치열한 방어에서 이러한 경향을 본다. 플레처는, 현대 가족은 자녀 양육과 부부의 정서적·성적 욕구를 감탄할 정도로 잘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개인적인 친화력의 관계로 보는 관념은 서로의 기대와 생활 방식을 조화시키는 계속적인 과정이 반드시 따르며, 따라서 성공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만약 성공적이라면 결혼이 '가장 보상적이고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가장 비참하고 참을 수 없는 인간 경험'이 될 수 있다(Fletcher, 1973, p.140). 그는 또한 가족이 애정적 관계의 장소로서, 긍정적인 정서가 있는 장소인 동시에 파괴적인 정서가 있는 장소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족은 좋든 나쁘든 인간 자질과 가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진가─진실됨과 정직함, 거짓과 속임, 친절과 동정, 무관심과 잔인함, 협동과 인내, 자기 본위와 적의, 인내, 공정함과 공평함, 편견, 독단과 완고함, 타인의 자유와 성취에 대한 너그러운 관심, 남을 노골적으로 못살게 굴거나 심리적으로 교묘한 방법으로 지배하려는 비열한 욕망과 같은─가 일어나는 집단이다(Fletcher, 1973, p. 42).


(-) 이혼 경험은 배우자들이 가능한 대안들에 의하여 매개된다. 한쪽 또는 양쪽 모두에게 이혼은 재혼(-)이나 동거(-)를 통해 새로운 관계(반드시 더 행복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끼리의 결합(-) 또는 집단 생활(-)에서 결혼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혼이 편부모 역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이혼이 고립된 고독한 생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혼 경험이 이혼에 관련된 사람에게 미치는 궁극적인 결과는 이러한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분명히 다르다. 끝으로, 이혼이라는 상처의 가혹함은 평생 사랑하는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이상과 단혼 핵가족의 특권적 지위에 '수반되는' 모든 기대의 함수이다. 이혼이 더욱 보편화되어 감에 따라, 단혼 핵가족에 대한 대안이 합법성을 갖게 됨에 따라, 그리고 여성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가 됨에 따라 사랑하는 부부에 대한 이상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혼이 갖는 의미는 감소되고, 이혼은 상처를 덜 주는 경험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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