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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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마리이고 에멘탈 출신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 손에 컸어. 억척같이 일했지. 강인하니까. 그런데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금세 차갑고 낯설고 하찮게 느껴졌어. 사람들이 인생이라 일컫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사람들이 느끼는 하찮은 애환이 갈수록 더 낯설어지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어. 사람들이 쉽게 기뻐하는 일에도 공감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이해할 수 없었어. 나는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했지. 동요와 불안도 느낀 적이 없어. 그 어떤 일에도 불안을 느낀 적이 없어. (-)나는 여기 숲속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 물론 내가 숲속에서 사는 건 아니야. 지난번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저 아래 시내에, 어느 변두리 골목에 살아. 하지만 늘 나도 모르게 지금 있는 이곳으로 올라와서 하루 종일 지내지. 당신도 숲을 좋아하지.”

“당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말했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특별히 기뻤던 적도 없어. 그런 희비의 차이나 복잡한 문제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늘 진지했지. 지금 당신이 보는 모습 그대로. 화를 내거나 슬퍼한 적도 없어. 나는 늘 똑같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무심한 여자라 하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지. 내가 사람들한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화를 냈고, 나한테 격분해서 나를 밀쳐냈지. 사람들은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고 곧장 이해하고 싶어 하거든. 내가 믿는 하늘처럼 좋아하는 나의 침묵 때문에 그들은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나의 평온함과 침묵이 그들을 모욕했다는 거야. 내가 반항심 때문에 평온하고 침묵하는 게 아닌데. 나는 그 누구도 모욕하려 한 적이 없어. 나는 워낙 천성이 그럴 뿐이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고의로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아. 더구나 오늘은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니까 더더욱 전혀 걱정되지 않아.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지.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도 평온하고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아.”

우리는 다시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말없이 가만히 귀 기울이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



_마리




어느 날 어릿광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선량한 젊은이가 진짜 알거지답게 태평하고 유쾌하게 신록이 아름다운 시골길을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 그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좋게 대해주었고 온 세상에 호감을 가졌는데,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의 그런 모습을 금세 알아보았다. (-) 젊은이가 풀밭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머리를 내밀고는 먹을 것을 좀 달라는 시늉을 했다. 혹은 어쩌면 송아지는 젊은이와 친구가 되어서 뭔가를, 이를테면 송아지의 삶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착한 송아지야,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그렇게 말하고서 젊은이는 계속 길을 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그에게 뭔가를 원했던 송아지가 자꾸만 생각났다. 얼마 후에 그는 숲의 언저리에 자리 잡은 커다란 농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커다란 개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짖으며 그를 향해 달려와서 그는 잔뜩 겁이 났다. 하지만 겁낼 필요가 없었다. 개는 그의 앞에서 팔짝팔짝 뛰었는데, 성나서가 아니라 반가워서 그랬고, 멍멍 짖는 소리도 분명히 기쁨의 표시였다. 농가의 선량한 안주인이 멀리서부터 개를 부르면서 사람들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덤비면 안 된다고 굳이 주의를 줄 필요도 없었다. “착한 강아지야, 나한테 뭘 원하니? 보아하니 나한테 뭘 달라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단다.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젊은이는 그렇게 말했고, 커다란 개는 너도밤나무 숲까지 그를 따라오면서 그와 우정을 맺고 그에게 개의 일생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친구가 계속 길을 가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자 개는 따라가기를 단념하고 다시 농가로 돌아갔고, 젊은이는 계속 정처 없이 길을 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젊은이는 그토록 자기를 믿고 가까이 따르며 분명히 뭔가를 원했던 개가 자꾸만 생각났다. 한참 후에 젊은이는 아래쪽 계곡으로 내려가서 아름답고 널찍한 시골길에서 염소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염소는 그를 보자 금방 가까이 다가와서 다정하게 어울렸다. 염소는 마치 우정을 그리워하는 사람인 양 그에게 불쌍한 염소 생활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 나한테 뭔가를 원하는 모양인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단다. 착한 염소야,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젊은이는 측은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걸어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그는 그에게 뭔가를 원했던 동물들이, 염소와 개와 송아지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들은 우정을 맺고 싶어 했고, 묵묵히 인내하는 먹먹한 자기네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건만. 언어도 모르고 말할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이용하고자 사로잡아서 세상에서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 그는 그들에게 호감이 갔고, 그들 역시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데려가고 싶었고, 그들 역시 어쩌면 기꺼이 그를 따라왔을 것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갑갑하고 불쌍한 동물 나라에서 구해내어 자유롭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넓은 세상에서 나는 가난하고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일 뿐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너무 안타깝게 동물들이 생각났고, 그 자신과 모든 친구들, 인간들과 동물들이 그토록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었다. 그는 길에서 멀지 않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펑펑 울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1917년)



_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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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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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여지는 삶을 잘살고 있군(나말고). 그것들이 아무 소용없고 아무 의미 없어질 때까지 보여주고 보여주어서 닳게 만들고 싶다.

싱글맨. 난 앞부분부터 몰입도 쩔었는데... 결국 몰입이란 경험에 대한 재탕? 허기인 것인가? . 그 상황을 재현하고 싶어, 다시 그 감정, 그 드라마에 나를 설득력 있게’(변명하지 않을 수 있게) 밀어넣고 싶어, 이런 뜻이었을까. 형과 같이 살던 집, 인천 간석오거리의 오피스텔 그 아래 식탁, 좁은 통로, 화장실, 서로 싸운 거, 죽어감(죽어가는 줄 착각했던) 등등.. 드라마퀸이 되어서 열심히 감정을 소비할 수 있었던, 그것을 고급스럽게 소비한다는 인상을 주어서 좋다!’라고 외쳤던 책이다, 동시에 내가 늘 호감 있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안타까운 마음.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태.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는 상태. 하면 망할 것이고 안 해도 망하는. 일반남에 대한 호감을 주체 못하는 나에 대한 경멸, 혐오, 불만, 안타까움 등이 자존심과 뒤섞여 나를 사람들에게서 분리시키고 나아가 서서히 나를 의심하게끔, 내 삶의 방식이나 지향하는 바를 거듭 의심하라고 스스로에게 요구받는 경험. 그런 맥락에서 읽었던 책이다. , 같은 사람, 비슷한 사람이 썼구나, 라고 읽는 사람이 믿게끔 만들었던. 하지만 늘 좋은 문학작품은 그게 다가 아니야, 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적어도 한두 개의 생각은 더 하게끔 만들어준다. 내가 만들어놓은 사고의 경로, 사건의 인과관계가 아닌 다른 지점을 비춰주는 희미한 빛으로서의 소설. 싱글맨을 읽고 내가 느낀 건 뭐였는지? 그 부분에서는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아마도 내 경험 역시 이와 같이 세련되게 재구성하고 싶다, 라는 욕구만이 내가 느꼈던 지루함에 대한 보복(...)처럼? 느껴졌는지도, 라는 건 너무 뻔한 생각이다. 음 토요일에는 다른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더 흥미로운 이야기다. 지금 나는 너무 근친적이네. 나한테 술 마시는 거 좋아해요? 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에게는 좋아해요! 라고 대답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음료수 좋아해요, 라고 말한다. 당연히 당신이라면 전자가 누구인지 알겠지. 그렇게 취기가 오를 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봐도 될 것 같은 기분, 그것들이 나를 잠식하고 나는 그게 아무것도 나에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안다(돈을 대신 벌어주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그냥 꿈이다. 술기운에 꿈이 잠깐 눈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 경멸과 가라앉진 않은 잔잔한 흥분이 뒤섞인 상태로 초조하게 잔을 기울이다 헤어져선 아무나와 자러 간다. , 집에 갈게요, 조심히, 빠이, 택시 태워 보내고 남은 나는. 나는 충실히 나였고 자신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술 마시는 동안 잘 억눌렀기 때문에 나에게 상을 준다. 그 보상은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어제 느낀 건, 아 이제 이게 재미가 없다. 예전에는 내가 망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망칠 게 남았고 더 무너뜨릴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무 재미도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을 때와 지금은 너무 달랐다. 인간 이하? 그것은 빤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욕구이고, 욕구와 욕구의 반응이다. 일시적이고 지속되지 않는다. 어제 느낀 것은,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었다. 지속되려면, 무언가가 지속되려면 정교해져야 하고, 다듬어져야 한다. 인간 이하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확신+필요한 기다림의 시간, 사이에서 나는 너무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 지루함을 달래는 놀이로서의 자기드라마에 대한 흥미도 이제 거의 다 잃었다. 빨리 남은 일부도 잃어버리고 싶다.


201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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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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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반인데 너무 밝네부끄럽게죽거나 더 나은 걸 만들어야겠네여덟시 이십분아직도 밝아이제 여기에 아무 재미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할 수 있는 걸 내가 좋아하는 선에서 충분히 해보고 더 해보고 또 해보았는데도삼겹살 먹고 싶다부속고기를 잔뜩 넣은 순대국 먹고 싶다아니면 부추를 잔뜩 넣고도 더 넣은 추어탕이제 나는 뭐해야 하나압도적인 게 있으면 좋겠다나를 박살내는 거해야 하는구나뭘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해야 하는구나나를 위해서그리고 또 나를 위해서.. 누가 재미를 줄까이제까지 해온 방식으론 아닌 것 같다사람들이 재미 없다일로 만나 이야기하는 건 재미있다거기엔 아직 꾸민 모습이아직 꾸민 모습의 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그 꾸민 모습은 진짜다꾸민 채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이다그럼에도 이 반대편꾸민 게 아니라 솔직하거나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야 하고 생각하는 영역에서의 행동삶들은 너무 지루하고 지겹다이제 할 걸 다 했다나는 거짓으로 재미있는 체하는 수밖에 없다뭐가 재밌을까똑똑한 사람똑똑한 사람을 보고 싶다말을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직관하는 사람아는 사람그냥 보면 아는 사람잘생긴 사람몸 좋은 사람 그런 것은 그냥 색깔 같은 거지나는 노랑을 좋아해하지만 그 노랑으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다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언지 솔직해져야 한다고 느껴서 무섭다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믿는 걸 솔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순진하게 느껴진다즉 거짓말 같다귀찮다모든 솔직한 마음은 귀찮음이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았는데 그것들은 내가 바쁘다고 믿게 만들거나지루하다달랠 길이 없다같이 다니면 사람은 초라하고 사람이 초라하지 않으면 내가 초라하다둘이 멋지면 내가 둘을 못 견디고 혼자 있으면 미쳐버리지 않는 이상 안 괜찮다이 지루한 일이 지루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듭한다거듭하고 또 한다저번에 잘 안 되었는데 또 한다그리고 다시 한다누가내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이제 완전히 끝난 거 같다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이미 내게 왔던 사람이다이미 만나봤고 헤어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거듭 만나면서 그들이 완전히 내게 무미로 남을 때까지아무 맛도 없어질 때까지세상의 재미가 내게는 그저 읽고 쓰는 것에 있는 것만 같다그게 사실이라면 좋겠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느낀다저번에 해봤는데 잘 안 됐어하지만 다시 하지좋았던 적도 있거든이번에 좋지 않아도 나는 또 하지좋을 수 있거든좋든 안 좋든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바도 아니야그냥 무엇이든 해음 너무 안타깝다너무 빨리 다 해버렸다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렸다하면 안 돼하고 금지해둔 게 있었다면 그걸 동력으로 살아보았을 텐데하고 싶은 걸 해보았다원없이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진다흥미로운 걸 하고 싶다싸우는 일사람들이 다 죽여야 한다고 믿는 어떤 대상이 되고 싶다그런 위치에 있고 싶다지켜주고 싶고 보호하고 싶지만 지지함을 드러낼 수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해야 하는 그런 대상이 되고 싶다그런 의미가 존재할 것 같다미움받고 싶다모두에게 미움받고 돌이킬 수 없이 미움받고 싶다그러면 나는 그에 맞서는 힘으로 뭔가 활활 타오를 수 있을 거다언제 포기해도 상관없지만 그 상관없음으로 적절히 삶의 동력을 얻다가 이길 수 있는 순간에 포기하고 싶다처음부터 그만두면 되었지만 그만두지 않은 채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다가발버둥치고 발버둥치다가 탁 놓고 싶다행복하다감당하기 힘들게 어렵거나 지루하다값싼 빵충분히 배부른 빵적은 돈으로 더이상 먹기 힘들 만큼 먹을 수 있는 빵내 삶은 딱 그런 거 같다딱 그 정도그 빵을 팔아야 하는 젊은 알바생이 나름의 이유로 열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가도 상관없는 이미 체념된 상태의 마감을 앞둔 가게의 빵 그 매대 위의 기다려짐으로체념된 상태포기했다고 말했지만 내가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된 상태견딜 수 있을 만큼의 의미가 없다그걸 굳이 꾸며보기에도 피로감이 든다사람들하고 놀아그건 재미있다와 놀고 또 놀고 재밌다일은 의미를 준다고일은 기쁨을 준다고 방금처럼 나는 말할 수 있다그게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이룰 가망 없는 허황된 가정처럼그 가정법의 형태로만 제시되는뼈대 없음가능성 없음아무 가망이 없어병을 앓거나 그래서 고통에 압도당하고 괴로워하거나그래도 살고 싶다오늘 샤워하면서 계속 생각한 것은 살고 싶음이었다일찍 죽고 싶지 않다나는 오래 살고 싶다아프지 않으면서확정된 고통예고된 고통 앞에서 뭘 하나나는 강한가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무엇도 가르치지 않는 다만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 뭘 배우고 어떤 의미로 몸부림쳐야 하나살고 싶지 않다다만 죽고 싶을 뿐이다죽어야 한다재미가 없다아무것도 지금은 재미가 없다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게 있다면 이야기에 대한 허기다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고 반응하고 싶다내가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궁금하다그 호기심이 지금의 동력이다그걸 끌어내지 못하는 작품은 없다나쁜 작품 좋은 작품 그런 건 없다다만 내가 말하고 싶어지는 거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찾아야 할 정도로 긴급한 것뿐이다너무 배가 고파서 폭식하는 사람처럼천천히 먹어도 되고 느리게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억울함으로 이상하게 부당하다고 느끼도록 하는화낼 대상 없음의 분노에 대해서살고 싶다너무너무 살고 싶다그리고 아주 오래 살고 싶다아주 오래 살아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고 싶다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내가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하지 않아서 그 고통을 다 느껴야 하고 그 고통을 어떻게 완화시킬 수 있는지 모른다는 거나는 멍청하지만 햄버거를 먹지 않았다배가 고팠지만 집에 빨리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돈이 없지만 오늘 이계삼님의 책은 샀다잘했다 나 새끼야읽지도 않는데 왜 사라고 하지만 내 경우에 안 사면 안 읽는다나는 이 모든 책을 다 끌어안고 싶다배가 고프다부침개 냄새가 나는 버스손가락 끝에 힘이 빠진다장도 실컷 보고 밥도 먹고 간다초코파이가 들어 있는 쇼핑 봉투가 부끄럽다.


201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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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부끄러움 - 현대소설 백년, 한국인의 마음을 본다
서영채 지음 / 나무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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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다는 말을 가까워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이나 동물친구)에게도, 마음은 굴뚝 같으나 어쩐지인 사람에게도 쓰게 된다. 서영채는 후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소중이는 아니다. 그건 '해야지...' 같은 혼자 하는 약속이다. 그렇게 따지면 책을 사는 일은 쉽다. 그것은 할 수 있다. 읽는 일은 좀더 어렵다. 쓰기야말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다. 내가 무엇무엇을 보거나 결국엔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을 안 해야지 생각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전에는 그토록 가까이 있었다 느꼈는데. 쉽게 되는 일은 마무리가 어렵고 시작이 어려운 일은 끝내 어렵다. 감독이 낙엽 얘기를 한다. '여름에 무성했던 잎이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지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양분이 되어 봄에 싹을 내밉니다...' 나는 어떤 말들에 대해 덜 공격하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지 아닌지를 본다.

나는 늘 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실제로 그렇다고 쓰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인지를 손꼽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걸 지금 다 할 수는 없는데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앞만 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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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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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현실이 눈 덮인 하얀 세상처럼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만든다. 마치 보름달의 빛이 들판으로 번져나갈 때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은 뒤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세상 사물들을 모두 다르게 보는 것이다. (-) 시詩는 세상의 모든 것, 즉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에서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늪 속에 잠들어 있는 그것을 찾아서 깨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고독의 길’에 이르는 문에 당도하면,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덕성, 그리고 죄업과 순결함이 담긴 잔을 깨끗이 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항상 우리의 영혼을 세상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를 보고, 또 마법과도 같은 우리의 감성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 모든 것을 보고, 또 모든 것을 느껴야 한다. 영원한 세계에 이르면 우리는 끝없는 축복을 얻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우리 모두는 꿈에 그리던 세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꿈꾸어야 한다. 꿈꾸지 못하는 자여! (-) 


_인상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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