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판 / 2017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내 이름은 마리이고 에멘탈 출신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 손에 컸어. 억척같이 일했지. 강인하니까. 그런데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금세 차갑고 낯설고 하찮게 느껴졌어. 사람들이 인생이라 일컫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사람들이 느끼는 하찮은 애환이 갈수록 더 낯설어지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어. 사람들이 쉽게 기뻐하는 일에도 공감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이해할 수 없었어. 나는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했지. 동요와 불안도 느낀 적이 없어. 그 어떤 일에도 불안을 느낀 적이 없어. (-)나는 여기 숲속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 물론 내가 숲속에서 사는 건 아니야. 지난번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저 아래 시내에, 어느 변두리 골목에 살아. 하지만 늘 나도 모르게 지금 있는 이곳으로 올라와서 하루 종일 지내지. 당신도 숲을 좋아하지.”

“당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말했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특별히 기뻤던 적도 없어. 그런 희비의 차이나 복잡한 문제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늘 진지했지. 지금 당신이 보는 모습 그대로. 화를 내거나 슬퍼한 적도 없어. 나는 늘 똑같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무심한 여자라 하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지. 내가 사람들한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화를 냈고, 나한테 격분해서 나를 밀쳐냈지. 사람들은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고 곧장 이해하고 싶어 하거든. 내가 믿는 하늘처럼 좋아하는 나의 침묵 때문에 그들은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나의 평온함과 침묵이 그들을 모욕했다는 거야. 내가 반항심 때문에 평온하고 침묵하는 게 아닌데. 나는 그 누구도 모욕하려 한 적이 없어. 나는 워낙 천성이 그럴 뿐이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고의로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아. 더구나 오늘은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니까 더더욱 전혀 걱정되지 않아.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지.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도 평온하고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아.”

우리는 다시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말없이 가만히 귀 기울이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



_마리




어느 날 어릿광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선량한 젊은이가 진짜 알거지답게 태평하고 유쾌하게 신록이 아름다운 시골길을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 그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좋게 대해주었고 온 세상에 호감을 가졌는데,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의 그런 모습을 금세 알아보았다. (-) 젊은이가 풀밭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머리를 내밀고는 먹을 것을 좀 달라는 시늉을 했다. 혹은 어쩌면 송아지는 젊은이와 친구가 되어서 뭔가를, 이를테면 송아지의 삶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착한 송아지야,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그렇게 말하고서 젊은이는 계속 길을 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그에게 뭔가를 원했던 송아지가 자꾸만 생각났다. 얼마 후에 그는 숲의 언저리에 자리 잡은 커다란 농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커다란 개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짖으며 그를 향해 달려와서 그는 잔뜩 겁이 났다. 하지만 겁낼 필요가 없었다. 개는 그의 앞에서 팔짝팔짝 뛰었는데, 성나서가 아니라 반가워서 그랬고, 멍멍 짖는 소리도 분명히 기쁨의 표시였다. 농가의 선량한 안주인이 멀리서부터 개를 부르면서 사람들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덤비면 안 된다고 굳이 주의를 줄 필요도 없었다. “착한 강아지야, 나한테 뭘 원하니? 보아하니 나한테 뭘 달라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단다.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젊은이는 그렇게 말했고, 커다란 개는 너도밤나무 숲까지 그를 따라오면서 그와 우정을 맺고 그에게 개의 일생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친구가 계속 길을 가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자 개는 따라가기를 단념하고 다시 농가로 돌아갔고, 젊은이는 계속 정처 없이 길을 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젊은이는 그토록 자기를 믿고 가까이 따르며 분명히 뭔가를 원했던 개가 자꾸만 생각났다. 한참 후에 젊은이는 아래쪽 계곡으로 내려가서 아름답고 널찍한 시골길에서 염소 한 마리를 만났는데, 염소는 그를 보자 금방 가까이 다가와서 다정하게 어울렸다. 염소는 마치 우정을 그리워하는 사람인 양 그에게 불쌍한 염소 생활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 나한테 뭔가를 원하는 모양인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단다. 착한 염소야, 내가 가진 게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줄 텐데.” 젊은이는 측은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걸어갔다. 하지만 계속 가면서도 그는 그에게 뭔가를 원했던 동물들이, 염소와 개와 송아지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들은 우정을 맺고 싶어 했고, 묵묵히 인내하는 먹먹한 자기네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건만. 언어도 모르고 말할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이용하고자 사로잡아서 세상에서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 그는 그들에게 호감이 갔고, 그들 역시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데려가고 싶었고, 그들 역시 어쩌면 기꺼이 그를 따라왔을 것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갑갑하고 불쌍한 동물 나라에서 구해내어 자유롭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넓은 세상에서 나는 가난하고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일 뿐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너무 안타깝게 동물들이 생각났고, 그 자신과 모든 친구들, 인간들과 동물들이 그토록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었다. 그는 길에서 멀지 않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펑펑 울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1917년)



_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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