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과 오크 문학과지성 시인선 464
송승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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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녹음된 천사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커브



창이 없으면 그림도 없지 그림이 없으면 나도 없다 문 앞에 지워진 발자국 쏟아지는


너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입을 벌린다 그것은 내게 없는 표정

어쩜 저렇게 환할까 치아 사이로 펼쳐진 복도를 따라서 하나 둘 둘 하나


복도는 어둠이고 복도 끝은 하얀 방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창과 복도는 없고 따라서 울리는 둘 하나 하나 둘


복도를 공유하는 많은 방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손잡이를 돌리면 잠겨 있고 손잡이를 돌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개방되는 문

벽 한가득 걸려 있는 얼굴들이 새하얗게


복도 끝으로 휘어진 그늘을 보았다

창을 열어 몸을 내밀었다


입은 벌어지고

투명한 입에 들어차는 여름 둘 하나 하나 하나




물의 감정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태도는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듣지 않는다 벽지는 자주 바뀐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꽃잎 무늬였다가 방울 무늬가 된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다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 유리를 좋아하고 창의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는다 우리는 생활로 대립한다


나는 출근하고 너는 출근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젖고 나는 젖지 않는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듣지 않는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빛은 닫힌 창으로 들어온다 너는 물을 마시고 물을 준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고 물과 빛이 섞이는 양상을 바라본다


붉은 컵에 담은 물은 붉은 물이 되고 푸른 컵에 담은 물은 푸른 물이 된다 물고기들은 빛나는 물의 양상을 배운다




기원



아침에는 작은 전쟁이 있었다


나무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우리의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지


교실에서 나와 태양 아래 있었다


정오에는 언니들이 이장되었다

이 강에서 저 강으로

언니들은 영원히 방학이구나


주방에선 이방인의 심장이 끓고 있었다


창에 꿰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생일을 떠올렸다

우리 중 누군가 매장되고

누군가 아주 오래 살았던 날


아침에는 숲이 벌목되었다

산에 피가 났다


우리의 반은 우리의 반을 떠나며

낯선 얼굴로 돌아온다 말하고


우리의 손은 일렁이는 물에 가까워진다


정오에는 우리가 불어났다

빛 속에서,


산의 얼음이 녹자

수원지에서 고대의 언니가 발굴되었다




내 책상이 있던 교실



내 책상 위에 국화가 있었다

국화 위에 편지가 있었다

편지 위에 국화가 놓였다

국화 위에 국화가 쌓였다


줄 세워진 우리들 손에 들린 국화를 잊는


선생이 들어온다 활자 가득한 칠판

국화를 들고서 말이 없었다

말을 못했다 오늘 당번 누구지

선생은 말하고


당번은 죽었어요 말을 못했다

국화를 들고서

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린다


편지가 놓였다 내 책상 위에

당번은 읽어라 선생은 말한다

읽지 못했다 당번이 죽었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선생은 말한다


너는 교과서를 읽어라 종이 울릴 때까지


읽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

얘가 죽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흔들리는 등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쌓였다

흰 손이 계속되었다




철과 오크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죽은 시들의 성찬



너는 초대받았다. 완전한 시의 이름으로 너는 시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만찬장으로 통하는 긴 복도는 거의 아침이 지나간 궤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의 궤적이 아니어서 집사들은 빛의 부스럼을 거두어 간다.


주인은 오고 있는가? 모든 죽은 시들이 초대받았다. 한없이 기나긴 그래서 하나의 여정이랄 수 있는 테이블. 너는 그 말석을 허락받았다. 너는 두리번거린다.

너는 다른 시들의 만듦새를 본다. 큰 시, 위대한 시 승리한 시 실패하는 시 졸고 있는 시도 있고 귀여운 시도 있다. 미친 시는 참석하지 않은 채 새벽의 음악이 되어 날아다닌다.

시들은 기다리고 있다, 주인을. 그러나 주인을 본 적이 없어서 주인의 얼굴을 모르고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찬은 시작되지 않고 있다.


시들도 한다, 주인이 이미 당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아무도 주인을 모르고 주인도 주인을 모른다는 생각, 시들도 한다. 생각하면 문이 열리고


빈 접시들이 집사 대신

들어온다 빈 접시들이 테이블에

쌓여간다 흔들거리며


율법을 따르는 빈 접시들

깨져야 할 때를 아는


접시들이 반사시키는 빛으로 접시들이 떠오르고 빛 속에 한가득 차오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들의 얼굴인가. 너는 죽은 너의 얼굴을, 죽은 너의 해골을 골똘히 바라본다. 그러면 해골도 잠에서 깨어나 너의 얼굴을 골똘히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너는 문득 주인의 얼굴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기분은 거의 눈물 같아서 너는 곧장 그 기분을 떨쳐낸다.


빛의 원형으로, 새벽 별이 지루한 음악의 시간을 관통한다. 퇴장을 서두르고 있다.




재앙



꽃집에 불이 났다 창이 밝았다 꽃은 연기 속에 잎을 감추고

식물은 불에 타들어간다

건물에서 네가 뛰쳐나온다


우리는 말없이 너를 걱정한다


건물은 불에 타들어간다 안에 사람이 있다고

너는 말한다 우리는 너의 말을 믿는다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


뛰어들려는 너를 막는다

생명을 구해라 너는 말하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건물 밖으로 물이 흘러넘친다

물을 든 남자가 걸어 나온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 네가 말한다




카논



영원을 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말씀하셨지요

수업은 끝났습니다


어제 당신이 쬔 햇볕이 이제야 내게 쏟아집니다


당신이 숲 속으로 사라지면 수업은 시작됩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늘 사이로 나무 그늘이 끼어드는 책상에 앉아

나무의 속을 생각했어요

상처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총보에 대해 말입니다


칠판의 고요에 귀를 기울이면

나를 삼키려는 숲이 들립니다, 아마 아닐 테지요

나는 나무의 속에 스며 든다고 느낍니다


이끼가 자신이 이끼인 것을 모르듯이

풍경 속에서 풍경은 잊히고

나무의 속에 있어 나무의 속을

모른다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한곳을 맴도는 물소리만이 들린다는 것

이 교실에 내가 없다는 것


풍경이 잠시 나를 생각한 모양입니다




에덴



그는 집이 없었고 피리를 잘 불었고 뱀과 물고기의 친구였다 아무도

그를 듣지 않았다 그는 죽어서 천국으로 갔다


천국에서도 그는 집이 없었고 피리를 잘 불었다 죽은 뱀과 죽은 물고기의 친구였다


아무도 그를 듣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천국에서도 그는 죽고 천국에는 천국이 없어서


그 영혼은 굽이치는 천국의 만곡을 따라 떠내려간다


우리는 뒤늦게 천국으로 가서

그의 장례식을 열어 그를 초대했다

웃는 입에 물뱀 하나씩을 물고

뻐끔거리며




유형지에서



해변에 버려졌다

알 수 없는 해변이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알 수 없는 바다 생물의 사체와

파도에 깎여나가는 돌의 먼지들이

빛나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하나의 빛살로 보일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내리고 배가 고프고

밤이 오고 잠도 오는데 인가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이 해변만 밤을 밝혔다


할 수 없이 바다 생물의 사체도 주워 먹고

모래 굴속에서 잠도 잤는데

파도 소리가 먼 땅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알 수 없는 해변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살았다가

죽는 것처럼

죽게 되고

살게 되듯이


깨지 않고 싶었지만 나는 깨었고

알 수 없을 해변이 빛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날리고 눈이 쌓이고

날리는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고

회전하는 겨울 속에서 머리카락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미처 찍지 못한 흑점처럼


얼어붙고, 녹아내리는 먼 바다

파도에 밀려오는 뿌연 빛 사이로

내가 삼켰던 생물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없는 다리와

없는 입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울면서


피는 파도와 섞인다

살은 먼지에 덮인다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글속에서 울었다




_

한번 읽으면 "너는 말한다 우리는 너의 말을 믿는다/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에서 끝내지만

다시 읽으면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 뛰어들려는 너를 막는다" 이렇게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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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아포칼립스 -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
시우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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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의 저자 김정현은 스스로를 동성애에서 ‘전향’한 탈동성애자라고 주장하면서 남성 동성애자가 선호하는 스타일, 성적 관계를 맺는 형식, 찜질방 문화, 군대 내 동성애 등 이른바 동성애자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더불어 독자에게 “감정적으로 인권을 지지”하기보다 “동성애자들의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


탈동성애자의 수기는 ‘경험한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당사자 중심주의에 기초해 있다. 수기는 게이 커뮤니티를 성적 비규범성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힘들어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이 집단에게 ‘치료’가 필요하다고 단정한다. 이는 보수 언론에서 북한 이탈 주민을 북한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로 부각시키고 이들의 경험을 반공주의 강화에 활용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수기는 퀴어 집단에게 성적 낙인을 찍음으로써 퀴어 이슈를 둘러싼 복합적이고 비판적인 논의를 중단시키고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추문을 일으킨다.

퀴어 가시성이 낮은 한국사회에서 수기의 내용이 경험적으로 반박되기는 어렵다. 수기의 저자인 김정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퀴어문화를 누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재현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퀴어 집단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회적 경험이 부재한 상황에서 하위문화의 몇 가지 모습을 선정적으로 편집한 수기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퀴어 커뮤니티가 오염된 벽장으로 묘사되면서 퀴어 당사자는 자긍심이 아닌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존재가 된다. 퀴어 논쟁이 펼쳐지는 시기마다 수기가 유포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퀴어 집단을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만드는 수기는 퀴어 변화에 대한 요구를 침묵시키는 장치로 꾸준히 활용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이유로 인해서 개신교회를 떠났거나 더 이상 개신교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이들은 ‘탈개신교인’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개신교인들이 말해주지 않는 개신교회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개신교회를 다닌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 있기에 탈개신교회 경험이 여러 사례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탈개신교인은 저마다 사연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이에 반해 탈동성애자의 수기에 그려진 동성애자는 얼굴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에 가깝다. 따라서 동성애자 한 명, 심지어 과거에 동성애자였다고 밝힌 한 명의 경험이 모든 동성애자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개신교회가 집을 상징한다는 데 있다. 개신교회에서 탈개신교인은 잠시 개신교회를 떠난 사람으로 이해된다. 탈개신교인이 개신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마치 돌아온 탕자(루가의 복음서 15장 11~32절)처럼 언젠가 복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는 말이 통용되는 개신교회에서 탈개신교인은 주체적인 선택을 내린 개인이 아니라 방황하는 주님의 자녀로 간주된다. 지독한 낙관주의로 무장한 개신교회에서 탈개신교인의 양심고백은 오직 과거 시제로만 표현될 수 있다. ‘예전에 교회를 떠난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흔한 간증은 탈개신교회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개신교회가 마침내 되돌아올 집을 상징한다는 점은 반퀴어 운동이 동성애를 정의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반퀴어 운동은 동성애를 이성애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상태로 규정하고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동성애는 안정적이고 중립적인 성적 지향이 아니라 일시적 일탈, 인지적 착각, 성적 중독으로 의미화된다. 반퀴어 담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로 태어나기에 우연적이고 예외적으로 일어난 동성 간 성적 실천이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집(이성애 가족질서)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지옥(퀴어 커뮤니티)에 머물기를 원할 때 발생한다. 마치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교만함이 죄악의 근본으로 여겨지듯이, 지배규범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퀴어 집단의 자긍심은 타락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반퀴어 집단은 퀴어 집단을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안타까운 이들로 묘사하지만, 퀴어 연구자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길을 잃는 경험disorientation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 희망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은 어지러움과 혼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상실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풍겨 나오는 위화감, 딛고 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불안감,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되돌아가거나 정반대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서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길을 잃는 경험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을 느끼는 우연한 순간을 만들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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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 우드스톡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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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장혜영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에 한 가지 상상을 하면서 시작해보고 싶어요. 여러분은 이제 막 열세 살이 되셨어요. 열세 살이 된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평생 살아야 해. 그게 너의 가족들의 생각이고, 너에게 거절할 권리는 없어.”

어떠세요? 만약에 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은 저의 한 살 어린 여동생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 동생은 열세 살 때부터 중증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떠나서 무려 십팔 년 동안 시골의 외딴 산꼭대기에 있는 시설에서 살았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최근이 되도록 동생의 삶을 동생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것은 부당한 일이고, 동생이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한 나에게도 인간적인 삶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동생을 다시 시설에서 사회로 데리고 와서 둘이 함께 살아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생처럼 시설에 살고 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오는 것을 탈시설이라고 해요. 제가 동생의 탈시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 얘기했을 때 사람들 대부분이 물었어요.

비장애인도 살아가기 어렵고 힘든 위험한 사회에 어떻게 네 동생 같은 중증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오히려 안전한 시설에 있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니야?”

사실 이것은 동생을 데리고 나오기 전에 제가 저 자신에게 가장 깊이 물어봤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도 이렇게 살기 힘들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이 사회에서 동생이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는데 동생이 자립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데 문득 그럼 나는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거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하게 됐어요.

저는 제 동생의 자립이라는 것이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다 해결하고, 모든 위협을 스스로 헤쳐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삶을 돌아보니 저는 가족, 친구, 선생님, 혹은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고, 그들에게 의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내가 정작 동생에게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던 거죠. 제 동생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격리가 아니라동생이 무언가를 배우는 데 필요한 더 많은 시간, 이 사회 속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힘을 기를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였음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아주 기쁘고, 확신에 찬 마음으로 동생을 사회에 데리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사회는 단 하나의 시설도 존재하지 않고, 단 한 명의 장애인도 격리당해 살지 않는 그런 사회입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 지구상 어딘가에 그런 사회가 있어요. 바로 스웨덴입니다. 스웨덴은 1997년 시설폐쇄법이 제정됐고, 19991231일을 기점으로 모든 시설이 폐쇄됐어요. 국가가 시설을 사서 점차 폐쇄해나갈 정도로 적극적인 정책 의지가 있었고, 그렇게 시설의 모든 장애인은 지역사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스웨덴이니까, 그쪽은 인권의식이 높으니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스웨덴의 70년대는 지금의 한국과 똑같았습니다. 오히려 정부는 시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고, 시설에 가족을 보낸 사람들의 80% 이상이 시설 폐쇄를 반대하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여기서 칼 그루네발트(Carl Grunewald 1921~2016) 박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분은 스웨덴 보건복지부의 공무원이었어요. 그는 시설에 실태조사를 나갔다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대와 인권침해의 양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두 눈으로 보고 탈 시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스웨덴 사회에 폭로하기 시작하는데요. 그것이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특히 문제가 많았던 시설들이 폐쇄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역사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칼 그루네발트 박사는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그렇게 지역사회에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편견(장애인이 많은 동네는 땅값이 떨어진다는 것과 같은)이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 등에 관해 몇 십 년에 걸쳐 연구하고 사회에 알려나가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샀어요. 그 결과, 스웨덴은 어떤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모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장애인 수용시설에 사는 장애인의 수는 3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가 단지 이 3만 명을 사회로 데리고 나오자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 이 3만 명을 데리고 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가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들어 우리 사회가 아주 촘촘한 격리의 프랙털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능력으로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분리하고 서로 다른 처우를 하는 경험을 수없이 해왔어요. 우열반, 장애, 피부색 등등 수많은 다르다는 이유들,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제하고 분리하고 격리하고 내가 격리당하고 혹은 남이 격리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라오면서 어느 순간 그게 당연한 거라고 믿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이 오히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밖으로 격리당하는 것을 봤을 때도 뭐 그런 삶도 있는 거지,라며 고개를 끄덕여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격리로 가득한 사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낮추는 게 아니라 문제와 고통을 숨기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곪아 터지기 마련이죠.

(-)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제 채널의 구독자 중에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건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우리 교실에선 1, 2등 하는 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요. 우리의 존재는 그곳에서 가치가 없어요.”

크고 작은 격리들이 만연하고, 서로서로 격리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누군가를 격리하는 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에요. 사회가 정한 모든 기준을 충족한 사람만이 잘살 가능성과 기회와 권리가 주어지고, 내가 못살고 불행한 이유는 내 탓이라고 생각하기를 강요당하는 게 지금의 사회입니다.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제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아기로 태어나서 별일 없이 죽는다면 노인으로 죽습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게 태어나서 연약하게 죽는다는 거잖아요. 단 한 순간도 연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약자를 자꾸 밀어내는 사회를 이대로 두고 있는가, 왜 격리라는 것을 이 사회의 철학으로 여전히 두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

단지 개인의 노력만이 이 모든 격리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체제와 시스템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여기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의 마음속에서 이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신념을 갖는 것이 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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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퀴어 어른이책) 퀴어 어른이책
브라네 모제티치 지음, 마야 카스텔리츠 그림,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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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 국제도서전 때 목격하고 여태 기다린 소중된 그림책... 드디어 나왓네요... 감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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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협려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이덕옥 옮김 / 김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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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조와하는 김용 영ㅇ웅문 둘부 신조협려에는 중상을 입은 소용녀릉 치료할려고 양과가 고묘 한옥침상 위에 올라가 서로 집중돠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고묘에 잠입해 들어온 사백 이막수한테 들키게됞다


여막수는 양고와 소영녀가 강적이라고 생각해 공격하고 한창 치료중이러 다른 어쩌구를 할 수 없는 양과는 꾀를 내어 입김을 후 부는데 이막수는 거기에 놀라 두로 훌쩍 물러난다


잠시루 양과한테 속은걱을 안 이막수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서 죽고샆으냐! 하면서 죽일려고 하는데 아무 힘도 쓸수없고 무방비로 죽게된 양과는 막수분에게 부탁을 한다


저가 그때 빌려준 옷 한벌을 지금 밧을 수 잇을가요? 

일전에 여막수가 충철정과 결투할때 풍철장이 휘둘른 달아오른 쇠자팡이에 옷이 타버려 알몸이 되다시피 햇을때 양고는 자기가 입고잇던 옷을 던져 몸을 가릴수 잇게 해주엇던 것이다


막수는 그때의 인정을 생각하면 마땅되게 이들을 살려주어야 하지만 호랑이등에 타기는 쉬워도 내리긴 어려운 법, 후롼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양과를 죽일려고 한다


이후 양과와 소용녀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지만? 곽부 를 통하여 또다른 위기를 다가온다...


그런데 항상 이때의 무력한 부탁, 옷을 던져준 것 역시 무협지에서 그려고잇는 폭력관 성질이 달르다.. 누구를 죽을 위깅서 구해준 것도 아니고 체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회에서 합의한 채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때의 부탁을 돌려밧아지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막수는 자기가 원하지 않앗던 방법으로 두 사람을 돕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두 사람을 더 길고 큰 시련ㅇ 빠드리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어떤 독자가 막수여 너는 정말 이군아... 라고 생각하게 될가? 여기에 김용에 매력이 잇다.

훗날 절정곡애서 정화에 찔려 고통스러운 노래를 불러며 불속에서 죽어갈 때 그녀에 악독돳던 삶에 대하여서도 독자는 한번쯤 공감하고 기도하는 마음을가지게 된다..


김용분이여.. 갑자기 나는 당신에 글을 읽고싶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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