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85호 - 2016.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엮음 / 문화과학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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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이와 반복

*1) 흥미로운 것은 두 시기의 문학권력론 모두 ‘표절’이라는 추문의 형식을 통해 전면화됐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절과 문학권력론은 모두 대상의 ‘이면적 진실’을 전제하고, 그것을 추적·고발하는 메커니즘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표절 스캔들과 문학권력론의 클라이맥스는 ‘숨겨진 실체가 드러나는’, 즉 대상의 탈신비화의 순간에 있으며, 바로 그때 발생하는 충격과 실망, 분노와 수치심, 냉소와 환멸 등의 정동을 자원 삼아 기존 문학장에서 유지되던 (가상의) 질서와 안정을 뒤흔든다. (-)

(-) 2015년 재생된 문학권력론이 여전히 ‘신앙’의 대상을 지키려는 “사제적인 비장함”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 오염된 한국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타락’한 문학/비평 정신의 회복이 주창됐다는 점, 그리고 문학권력으로 지목된 자들 역시 다른 산업 분야의 질서와 구분되는 문학장의 ‘예외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기방어를 시도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반복’의 의미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신경숙과 창비의 ‘명시적’ 표절 인정 여부에 다소 강박적일 만큼 집착하면서 진정으로 문제화하고자 했던 것의 의미 말이다. 신경숙의 표절과 이에 대한 창비의 비호 혹은 자기합리화는 신경숙을 알리바이 삼아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저버렸던 과거 ‘잘못된 선택’의 반복이자 ‘오래된 미래’로 해석됐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1980년대적인 것’이 성급하게 시효만료된 것으로 간주되거나 용도 폐기됐던 역사적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5년의 문학권력론은 1990년대의 문학(장)이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침윤되면서 정당한 사후평가를 받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청산된 것들, 즉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기억하는 신경숙과 창비의 성장 과정은 ‘진보적 가치’의 보루였던 한국문학이 ‘변절’ 혹은 ‘타락’한 시간과 겹친다.
 

2. 두 개의 퇴행과 ‘K문학/비평’의 기원

그러나 (-) 시인 황인찬의 언급처럼,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과 독자들은 신경숙과 창비에 대해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창비 및 한국문학의 흥망을 ‘변절과 타락의 서사’로 설명하는 일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었으며,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에게 이번 표절 스캔들과 문학권력 담론의 전개는 현재 한국문학(장)에 주어진 선택지가 오직 ‘두 개의 퇴행’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젊은 작가와 독자들은 이번 표절 사건이 작가 스스로 자신의 이력에 남긴 오점이자, ‘신경숙’이라는 브랜드가 사회적 신뢰를 잃게 된 사건일 뿐인데, 그게 왜 한국문학 전반의 타락으로 의미화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신경숙의 표절 고발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것이 또다시 문학의 “치열하고 고결한 빛”, 즉 ‘신앙’ 혹은 ‘순정’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점이 드러났을 때 이들은 모종의 ‘퇴행’을 감지했다. 문학은 “수호”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야말로 21세기 독자에게 20세기 계몽주의적 문학관이 내려준 마지막 교훈이 아니었던가. ‘수호자’를 자처하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주체로 상정된 “우리”라는 술어도 의심스러웠다. 또한, 신경숙을 비롯한 1990년대 문학의 재평가 필요성에 동의하더라도, 그 작업에 동원된 수사와 논리가 여전히 감상성과 미문주의, 그리고 ‘소녀취향’ 운운하는 젠더화를 경유하는 장면을 볼 때, 이 ‘수호자들’이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갱신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음을 거의 확신하게 됐다.
(-) 게다가 문학에는 ‘누군가가 반드시 응답하게 하는’ 차원의 힘이 있을 뿐이라거나, (-) 원론적인 이야기로 문학권력론자의 문제의식을 무화하며 문학장을 탈정치화하려는 이들의 입장은 젊은 독자들에게도 명백한 위선이거나 시대착오로 여겨졌다. 문학권력 비판론에 대한 이들의 방어논리가 여전히 철 지난 ‘문학(장)의 자율성’을 근거로 성립하는 것임을 확인한 순간, 오늘날의 독자는 그 역시 또 하나의 ‘퇴행’임을 지각했다. (-)
(-) 문학권력 논쟁의 두 입장들은 여전히 차세대 ‘에이스’ 발굴에 골몰한다는 점, 즉 세계문학·노벨상·영화화 등의 강박을 통한 가부장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상통하며 공모한다. 실제로 이 욕망은 2000년대 이후 문학계의 가장 강력한 지향 중 하나가 되어 한국문학(사) 전반을 규율하는 비평적 기준으로 작용해왔다. (-) 문학권력 비판론자들 역시 세계문학으로서 신경숙 소설의 자격미달을 지적할 뿐, ‘시장제패’ 혹은 ‘세계문학’에 대한 욕망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예컨대 2000~2010년대 내내 창비를 선두로 거듭 제기된 ‘장편대망론’은 시장주의적 욕망과 경험주의적 환원론에 입각한 586세대의 문학관이 행복하게 조우해 생산해낸 강력한 비평적 의제였다. 이들에게 ‘사사화된 개인’의 내면성과 여성성을 바탕으로 성립한 1990년대 문학은 ‘현실 경험이 일천한 청년들의 자폐적 형상’만을 다루는 2000년대 문학의 부정적 시원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는 곧 한국문학이 “아저씨 독자”를 잃고 몰락하게 된 경위로 설명됐다. 그러니 1970~1980년대 황석영·조정래 등의 맥을 이으면서 2000년대 하루키와 대항할 수 있는 강렬한 서사성을 지닌 ‘장편소설’이야말로 세계의 총체성을 담아내면서도 영화화 등을 통해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시대 정합적 양식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요 논리였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1990~2000년대 문학의 몰락을, ‘가시화된 전선이 사라지면서 운동성을 잃어버린 채, 그저 텍스트를 통한 간접경험만을 문학적 자원으로 삼은 세대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2000년대 세대의 “체험이란 게 학교 다녔고 연애 몇 번 했고 컴퓨터 게임에 빠져본 정도의 평범한 것”뿐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이런 주장은 ‘경험의 특권화’ 혹은 ‘경험환원주의’라 할 만한 것으로, 586세대가 널리 공유하는 인식이다. 특정 세대의 체험에 대한 위계화를 통해 문학(사)의 가치화를 시도하는 이런 인식은 기실 악명 높은 ‘20대 개새끼론’에 깃든 반동성과도 궤를 같이한다. ‘장편대망론’은 바로 이러한 586세대의 낡은 공통감각이 공모해 만든 지배적 문학 규율이었으며, 여기에 깃든 정치적 무의식은 명백히 1990~2000년대 문학사의 젠더화와 타자화를 통해 586세대의 노스탤지어와 정통성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국의 주류 문학사가 ‘개저씨*들의 문학사’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개저씨’는 ‘아저씨’라는 보통명사에 ‘개-’라는 접두어를 붙여 형성된 조어지만, 일반의 오해(?)와 달리 ‘중년 남성’ 전체를 칭하는 호칭은 아니다. ‘개저씨’는 한국 중년 남성 중에서도 성별, 연령, 지역, 학벌, 장애, 계급, 인종 등을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예의를 지키자는 ‘문명인들의 약속’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칭한다. 그들은 자신이 ‘남성’ 및 ‘연장자’라는 이유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우위를 점해 함부로 무례를 범한다. 이들은 지난 날 자신의 경험을 미화해 ‘너무 자주’ 말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기괴할 정도로 확신을 가지며, 자신이 고수해온 질서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자신보다 열위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에 맞선다면 매우 당황하거나 화를 낸다. 이처럼 ‘남성숭배+부성숭배+나이숭배’가 결합된 ‘개저씨’는 그 지적·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월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경우가 많아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조롱과 지탄의 대상이 된다. 최근에는 ‘개저씨’가 지극히 ‘한국적이고 특수한 존재’라는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의미로 ‘K저씨’라고도 쓴다(Se-Woong Koo, “GAEJEOSSI MUST DIE,” KOREA EXPOSE, 2015. 12. 23).

그러나 ‘장편소설’을 통해 한국문학을 성공적인 수출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것, 즉 문학의 ‘한류’를 이뤄보겠다는 이 열망은 오늘날의 독자가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허황된 꿈이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한국문학은 세계시장은커녕 국내에서의 위상조차 ‘하위문화’로 강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어 문학시장의 협소함으로 인해 한국문학 자체가 세계 문학시장에서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및 웹툰, 웹소설, 게임, 논픽션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구성된 국내 시장 내에서도 한국(순)문학은 가장 국지적인 위상을 점유하는 열세종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런 정황을 상기할 때, 한국문학의 현실이 아무리 개탄스럽더라도 이 모든 것을 ‘수준 미달’의 작가 신경숙 및 상업주의와 결탁한 창비의 ‘타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딘지 전가의 혐의가 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이 독자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게토화되기까지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문학권력 논쟁에서 두 입장들이 노정한 퇴행의 양상은 지극히 ‘한국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그 퇴행의 내용들이야말로 지금의 필연적 ‘몰락’을 초래한 한국문학의 어떤 ‘체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 독자들은 바로 이 ‘체질’의 총체를 가리켜 ‘K-문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K-팝’을 기원적 용례로 삼은 ‘K-문학’은 본래 한국문학을 유력한 ‘해외상품’으로 개발·가공하려는 문학계의 움직임을 지칭하기 위해 미디어에서 먼저 사용한 말이다. 이 용어는 “변방의 언어”로 쓰여 오랫동안 “번역의 장벽”에 가로막힌 채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못했던 한국문학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음악이나 영화처럼 진짜 ‘한류’를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야심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
그러나 최근 젊은 독자-대중에게 ‘K문학’이라는 신조어는 원래의 어의에서 이탈해 새로운 내포를 지니게 됐다. 그것은 주류 문학장의 식민주의적 열등감과 시장패권주의적 열망을 동시에 반영한 ‘조잡한 조어’로 간주되며, 의심할 바 없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이는 ‘K문학 프로젝트’가 상정하는 한국문학의 ‘수출용’ 가치들과 그 존재방식 전반이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예컨대 ‘K문학’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주류 한국문학의 오랜 습성과 체질은 다음과 같다. 여성에 대한 도식적 재현 및 여성에 대한 물리적·상징적 폭력을 필수적으로 경유하는 한국문학 전반의 여성혐오, 외국인 노동자 및 결혼 이주 여성,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재현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약자 혐오 및 소수자 혐오, 장르문학에 대한 철저한 위계화를 통해 관철되는 순문학주의, 자체 동력을 상실한 채 환금화 가능성에만 매달리는 기생적 존재 방식, 세계시장 진출 및 세계 문학상에 집착하는 제국주의적 욕망 및 후진국 콤플렉스, 가족·모성애와 같은 전통적 질서의 수호에만 골몰하는 폐쇄적 보수성, ‘국뽕’ 기획과 결합한 무차별적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교조주의적 “꼰대질”, 오락성의 현저한 결여…. 이제 ‘K문학’은 (-) ‘한국문학’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조롱의 기표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21세기의 독자들이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 복권에 냉담한 이유다.

 
3. ‘취향의 시대’와 비평의 존재론

(-) 우선 ‘비평의 위기’ 담론과 ‘비평의 회복’이라는 과제가 소환된 맥락을 점검·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한국 문학장을 ‘계도·정화’하기 위해 비평의 권위가 ‘회복’돼야 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20세기적 계몽주의 프레임에 붙들려 있다. (-)
실제로 최근 문학장에서 당위명제처럼 통용되는 ‘비평의 위기’라는 진단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각종 주체에 의해 각종 소재가 비평의 대상이 되는 ‘비평 전성시대’라고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대중이 스스로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어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고, 통용되는 온갖 콘텐츠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 이는 두말할 것 없이, 한때 강력한 의제로 제출됐던 ‘대중지성에의 기대’에 따른 결과물이다. 다만 오늘날 그런 비평을 ‘의사-비평’ 또는 ‘반(反)비평’으로, 그 비평 주체들을 ‘사이비 비평가’로 인식하는 낡은 입장이 있을 뿐이다.
(-) 비속어를 남발하며 인신공격을 일삼는 ‘종편’의 정치평론가들, 별 기준 없이 별점을 남발하는 영화 소비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비평들이 아무리 반지성적·반문화적이라 해도 그건 ‘아무나 비평을 할 수 있게 된 시대’ 탓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나쁜 비평(가)’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이 ‘불순한’ 행위들에 감히 ‘비평’이라 이름 붙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 예컨대 ‘비평의 타락’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언급되는 ‘주례사비평’을 생각해보자. 특정 작품이 지닌 미덕에 비해 과도한 상찬을 늘어놓는 것을 ‘주례사비평’이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나의 독서 실감과 너무나 판이한 판단을 내리는 적지 않은 작품평”이 문제라면, 이는 오래 전에 ‘취향’의 문제로 전환됐다. ‘취존(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의 논리 앞에서 모든 문학관과 가치관은 평등하다. 문학이 일종의 ‘취향 공동체’로, 그리고 비평은 ‘취향의 정당화’ 문제로 수렴된 것이 벌써 오래 전이다. 어쩌면 “나”와 “판이한 판단”의 주체들은 서로를 ‘주례사비평’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은 답이 없는 싸움. 이들은 오직 ‘취향’의 영역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독서취향과 감식안,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비전인지를 겨눠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문학은 취향 그 이상’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각자의 취향을 형성하고, 타인의 취향과 다툰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만은 아니다. ‘취향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세계관을 높은 강도로 부딪쳐야 하고, 무엇보다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계몽 또는 운동으로서의 문학’과 같은 지난날의 비평적 자원들도 모두 학습·활용해야 한다. 취향은 그야말로 중층결정의 산물인 것이다.
요컨대, 21세기의 비평은 ‘취향’을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로 사유하고, 이곳에서 포스트-포스트모던의 문학 주체들이 펼치는 문화정치와 인식 및 교양의 갱신을 면밀히 주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4. 백래시 시대의 ‘문학적 사건’

(-) 두 번째 사례는 ‘한국문학과 여성혐오’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탄생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가 분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2015년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이 새롭게 리부트된 ‘원년’으로 기록됐다. 그에 따라 “촛불소녀-배운 여자-메갈리안”이라는 이력을 통해 고유의 정치적 주체성을 획득한바 있는 20~30대 여성 독자들은 이광수부터 박민규까지에 이르는 한국문학사 전반의 여성혐오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성에 대한 물리적·상징적 폭력을 통해 남성 인물의 자기 각성을 수행하거나 가부장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는 한국문학의 오랜 관습적 재현이 새로운 비평적 의제로 대두됐다. 한국문학이 ‘가부장적 남성 멘탈리티의 재생산 장치’로서 새로운 독해와 심문의 대상이 된 것이다.
(-)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유일하게 대중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크고 작은 논쟁들의 성격을 점검해보자. 올초 신춘문예 작으로 당선된 SF소설 논란이나, 듀나의 인터뷰를 계기로 촉발된 ‘악스트 사태’는 모두 ‘순문학/장르문학’이라는 이분법으로 지탱되는 한국문학의 임계를 문제 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캐롤>에 대한 이동진의 비평과 동명 소설의 한국어 번역자가 보여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벽은 주된 문화 소비자층인 20~30대 여성들의 고양된 정치적 문화적 교양에 부딪혀 문제가 됐다. 이때, 다른 무엇도 아닌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과 위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재현의 문제가 대중독자의 문화적 정치적 통각을 가장 예민하게 자극하는 비평적 화두였다는 사실은 깊이 되새겨져야 한다. 이 논쟁들은 한국문학/비평이 결코 재현하지 않거나 애써 해석하려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독자들의 오랜 불만의 표현이다.
그런데 한국문학/비평은 한국문학(장)의 옆과 아래에서 무차별적으로 진격해오는 이와 같은 비평적 의제들을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로 인지하고 있을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독자-대중의 불만이 ‘한국문학의 문호개방’ 혹은 ‘시혜적 하방’과 같은 차원의 요구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차라리 ‘재현장치로서의 한국문학’이 지니는 무능 혹은 기능부전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며, 이것이 바로 현재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비평을 기각한 이유다. 새롭게 갱신되는 지식과 정동, 윤리와 정치에 무관심한 ‘이성애자-남성-지식인’들의 문학(사)은 이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산적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유물이거나 시대착오적 양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장르문학을 제도문학의 영토 넓히기 차원에서 구색 맞추기용으로만 배치한다든가, ‘장애인, 성소수자, 투쟁하는 노동자’ 같은, 현실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에 대한 관성적 재현과 해석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적·문화적 호기심 충만한 오늘날의 독자들이 왜 구태여 한국문학/비평을 읽어야 할까. ‘무식할 정도로’ 거의 모든 재현과 해석의 금기에 도전하는 팬픽과 웹툰, 웹드라마 등을 보는 게 훨씬 더 이롭지 않나?
예컨대, ‘투쟁하는 노동자, 싸우는 시민’에 대한 최근 한국(순)문학의 재현은 매우 인색한 반면, <송곳>과 같은 웹툰의 세계에서 그것은 낡고 구태의연한 대상이 전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순)문학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동성(성)애와 퀴어는 최근 부상한 ‘브로맨스’ 혹은 ‘백합물’의 인기에서 보듯, 팬픽과 웹툰에서 가장 집중적인 재현을 시도하는 대상 중 하나다. 이 콘텐츠들은 한국(순)문학이 지닌 재현의 임계를 넘어서는 소재와 문제의식을 선취함으로써 주된 문화소비층인 젊은 (여성)독자들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다. (-)

 
5. ‘K문학/비평’의 종말과 뉴웨이브

그런 의미에서 이번 표절 사태 및 문학권력 담론 중 새로운 독자론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논의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국문학(장)이 처한 고사 위기의 원인을 ‘비평의 타락’이 아니라, ‘한국문학과 독자의 관계’에서 찾은 것은 일리 있어 보인다. “문제는 독자들이 자기 얘기인 것 같다는 느낌을 문예지나 단행본에서 못 받는 거”라거나, 독자를 “‘교양’의 대상으로서, 혹은 그저 시장 논리에 종속된 소비자로서만 파악해온 것이 결국 독자의 냉담한 반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진단은 더 이상 독자-대중에게 한국문학/비평이 유효한 사회적 담론양식으로 간주되지 않게 된 이유를 잘 말해준다. 이른바 ‘문학의 대중화’ 시대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학은 신앙도 아니고 고결하지도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표절사태로 인해 열등감의 족쇄를 찬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적어도 내가 아는 대부분의 문인들은 이응준이 말하는 ‘침묵의 공범’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응준의 고해성사에 낯을 붉히는 이유는 낯이 간지러워 너무 긁어대다 불거진 상처 탓일 게다. 거기에 더해서 애먼 독자까지 끌어들여 말의 권위로 삼고 있는데, 이를 사자성어로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한다. 이 종이호랑이인 독자를 서로 자신의 배경으로 삼으려는 것이 권희철이 말하는 ‘동참’의 의미이다. (…) 정치적 수사로 쓰이는 국민이 실제 국민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로맨스, SF를 좋아하는 독자가 있고, 별로 본격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글을 본격과 순수의 이름으로 좋아하는 독자가 있다. (…) 비판하는 자들과 방어하는 자들이 독자를 문학장의 절대적인 그룹으로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마치 ‘독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의사문학(疑似文學)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그 답은 기존 문학 담론에서 독자를 인식하는 방식이 지극히 편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기존 문학/비평 주체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온 ‘독자중심주의’가 기실은 ‘독자바보론’에 불과하다는 위의 지적은 정곡에 닿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따르면, 기존 문학/비평에서 독자론이 ‘문학성/대중성’과 같은 허구적 이분법에 입각해 공회전해온 까닭, 즉 문학성을 추구하면 대중과 괴리되고, 대중성에 편향되면 문학의 질이 저하된다는 식의 가짜 논의로 흡수된 이유가 바로 독자에 대한 허구적 상상 때문이라는 점도 명확해진다.

(-)
그러나 앞서 말했듯,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부장적 패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을 하루빨리 탈피해 한국문학의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것이다.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한국 독서계, 특히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릴 것 없이 한국문학의 주요 독자층은 언제나 20~30대 여성이라는 점은 바로 그 대수술을 감행해야 할 강력한 이유이자, 그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결국 “소설에 종이인형 같은 여성 캐릭터를 쓰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나는페미니스트다”라는 소설가 정세랑의 발언에서 보듯, 작가들의 자의식을 추동해 실제로 한국문학의 형질변형을 이끄는 것은 낡은 비평의 복권이 아니라,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는 독자-대중의 지적·문화적 호기심이다.
그간 주류 문학 담론의 주체들은 ‘이성애자-남성-지식인들의 문학’이라는 한국문학(사)에 대한 심상한 진단을 관용적이고 중립적인 진술로만 받아들일 뿐,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 오랜 습성은 시장패권주의와 결합하면서 ‘K문학/비평’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문학/비평이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갱신하는 데 기여하지 못함으로써 생산적인 문화자원의 반열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안타까운 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문학/비평이 ‘K문학/비평’ 혹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오명을 벗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 및 문학권력 논쟁을 계기로 한국문학계의 퇴행적 욕망이 다 드러난 지금, 또다시 소설가 한강 등을 매개로 K문학/비평을 확대 재생산 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은 앞으로도 한국문학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예언컨대, 젊은 독자를 잃은 한국문학/비평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 혹은 방언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애도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K문학/비평이 없는 세계는 축복이며, 거기서 21세기의 독자들은 압도적인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_오혜진(2016).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2016.3, 8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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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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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내용이나 재미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글자는 읽을 수 있으니 한 글자 한 문장 한 페이지 한 챕터씩 차례로 읽어나간다.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 도서관 휴관일인 월요일만 빼고 그녀가 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은 없다.



어느 새벽에 만취해서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탔던 생각이 났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겁도 없이 남의 차에 올라탔다. 새벽이라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옆에서 그녀는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고, 은회색 차가 섰고, 운전자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그녀가 태워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승을 허락했다. 그런 일은 얼마나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 트럭 밑에 누워 조만간 이 트럭이 부르릉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면, 하고 상상한 적도 있다. 그런 상상을 해도 두렵지 않고, 그런 일은 그저 상상일 뿐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서 트럭 바퀴가 자신을 타넘고 간다 해도, 그래, 그건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수첩이나 메모지에 '나는'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자신이 앉은뱅이가 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한동안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발음도 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젊은 날의 일일 것이다.



이모가 죽은 후 나는 그녀가 매일 다녔다는 문화센터 1층에 있는 도서관에 가보았다. 창가에는 일자형 바처럼 컴퓨터 좌석이 여섯석 놓여 있고, 그뒤로 4인용 책상 네개와 열여섯개의 의자가 있고, 벽을 따라 ㄷ자 형태의 개가식 서가가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셋, 열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일곱 정도 되었는데, 노인도 있고 컴퓨터 앞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도 있어 마치 주민 쉼터 같았다.

나는 이모가 항상 앉곤 했다는 열람실 중앙의 사각기둥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거기에는 이미 머리가 길고 몸집이 비대한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가씨와 한 자리 건너 창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앉았다. 실내가 좁고 좌석 사이에 칸막이도 없어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도 다른 사람의 숨소리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놓고 뭔가 써보려다 그만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2월이라 밖은 황량했다. 이모는 황량한 2월을 이곳에서 두번 보냈으리라.

(-)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씩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녀는 내게 입술에 물을 축여달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거즈에 보리차를 묻혀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여긴, 책도 없는데, 목이 마르구나."

그녀는 어린 강아지처럼 눈을 감은 채 물을 빨았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

그녀의 아파트 보증금과 통장에 남은 현금은 그녀가 유언장에 써놓은 대로 상속되었다. 원래는 가장 우선순위인 시외할머니에게 모두 상속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시외할머니에게 1/3, 시어머니에게 1/3, 그리고 태우와 내게 1/3을 상속한다고 지정해놓았다. 시외할머니는 우리가 합의하여 맏딸의 유산 전부를 외아들 빚을 갚는 데 쓰기를 바랐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가 그토록 사양하는데도 우리 부부의 통장에 이모의 유산을 입금했다.

통장에 입금된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여덟자리 숫자는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_권여선, 이모, 창작과비평 42(3), 2014.9, 216-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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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1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 민음인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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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위대한 영화를 갈망한다. 지난 이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여러 편의 좋은 영화들과 몇몇의 아주 좋은 영화들을 보아왔지만 압도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는 정말로 본 적이 드물다. 아마 문제는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지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예술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또한 알고 있는 것은, 만약 당신이 이야기라는 오케스트라에 사용되는 모든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상상 속에 어떤 음악이 자리 잡고 있더라도, 당신은 오로지 그 오래된 똑같은 곡만을 중얼거리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



<개인적인 이야기>는 구조가 덜 짜여져 있고 삶에 대한 통찰력의 부족에서 온 단면적인 초상에 그치고 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일상 생활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고, 따라서 더욱 더 진실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분 단위로 세밀하게 관찰한다고 해도 이때 얻는 진실이란 사소한 진실일 뿐이다. 더욱 큰 진실은 현상의 배후, 표면의 안쪽, 저 깊은 곳에서 사실성과 뒤섞인 채, 또는 그것을 찢어발기면서 관찰될 수 없는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작가는 실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삶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란 말이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이야기에 포함시키기 위한 가장 약한 구실일 뿐이다.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조차 일어난다. 그러나 이야기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의 세계가 아니다. 사소한 실제 사건들은 우리들을 진실 근처에도 데리고 가지 못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일 뿐이다. 진실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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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집 렛츠! 당사자연구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지음, 이용표.김대환 감수, 이진의 옮김 / EM커뮤니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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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공유한다. 사람들은 그날 상태에 따라 일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한다. 하다가 힘들면 멈춰도 된다. 무리해서 일하면 재발한다. 이곳에서 약함은 감춰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베델의 집에선 이를 ‘약함의 정보공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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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2016-07-2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9928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47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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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세계가 없는



우유를 마시다가 잔에 금이 간 것을 본다


이걸 버릴 수 있겠군

이젠 버릴 수 있어

가차없이


우유잔을 치워버리니

내 방이 그 잔만큼 더

넓어진다


도발되어 나는

책상 서랍을 뒤집는다

옷장을, 화장대를 뒤집는다

샅샅이

그들은 떨고 있다

자신에 금이 갔는지 안 갔는지

알 바 없고 알지 못하면서


더 이상 볼펜이 아닌 볼펜

더 이상 달력이 아닌 달력

더 이상 편지가 아닌 편지

더 이상 건전지가 아닌 건전지


더 이상 메모가 아닌 메모


더 이상 향기가 아닌 향기를 풍기며

병 속의 꽃은

목까지 죽이 되어

그러나 얼굴은 극단의 건조를 보이고 있다


뿌옇게 버캐진 거울 속에서

나는 영정처럼 내 방을 내다본다


때때로 그들도 돌아올까?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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