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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내용이나 재미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글자는 읽을 수 있으니 한 글자 한 문장 한 페이지 한 챕터씩 차례로 읽어나간다.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 도서관 휴관일인 월요일만 빼고 그녀가 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은 없다.
어느 새벽에 만취해서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탔던 생각이 났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겁도 없이 남의 차에 올라탔다. 새벽이라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옆에서 그녀는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고, 은회색 차가 섰고, 운전자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그녀가 태워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승을 허락했다. 그런 일은 얼마나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 트럭 밑에 누워 조만간 이 트럭이 부르릉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면, 하고 상상한 적도 있다. 그런 상상을 해도 두렵지 않고, 그런 일은 그저 상상일 뿐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서 트럭 바퀴가 자신을 타넘고 간다 해도, 그래, 그건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수첩이나 메모지에 '나는'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자신이 앉은뱅이가 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한동안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발음도 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젊은 날의 일일 것이다.
이모가 죽은 후 나는 그녀가 매일 다녔다는 문화센터 1층에 있는 도서관에 가보았다. 창가에는 일자형 바처럼 컴퓨터 좌석이 여섯석 놓여 있고, 그뒤로 4인용 책상 네개와 열여섯개의 의자가 있고, 벽을 따라 ㄷ자 형태의 개가식 서가가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셋, 열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일곱 정도 되었는데, 노인도 있고 컴퓨터 앞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도 있어 마치 주민 쉼터 같았다.
나는 이모가 항상 앉곤 했다는 열람실 중앙의 사각기둥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거기에는 이미 머리가 길고 몸집이 비대한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가씨와 한 자리 건너 창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앉았다. 실내가 좁고 좌석 사이에 칸막이도 없어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도 다른 사람의 숨소리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놓고 뭔가 써보려다 그만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2월이라 밖은 황량했다. 이모는 황량한 2월을 이곳에서 두번 보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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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씩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녀는 내게 입술에 물을 축여달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거즈에 보리차를 묻혀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여긴, 책도 없는데, 목이 마르구나."
그녀는 어린 강아지처럼 눈을 감은 채 물을 빨았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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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파트 보증금과 통장에 남은 현금은 그녀가 유언장에 써놓은 대로 상속되었다. 원래는 가장 우선순위인 시외할머니에게 모두 상속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시외할머니에게 1/3, 시어머니에게 1/3, 그리고 태우와 내게 1/3을 상속한다고 지정해놓았다. 시외할머니는 우리가 합의하여 맏딸의 유산 전부를 외아들 빚을 갚는 데 쓰기를 바랐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가 그토록 사양하는데도 우리 부부의 통장에 이모의 유산을 입금했다.
통장에 입금된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여덟자리 숫자는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_권여선, 이모, 창작과비평 42(3), 2014.9, 216-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