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母音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법정
1
어린 왕자!
지금 밖에서는 마른 바람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구르고 있다. 창호(窓戶)에 번지는 하오의 햇살이 지극히 선(善)하다.
이런 시각에 나는 티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같은 눈매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그리고 이런 메아리가 울려 온다.
‘나하고 친하자.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어린 왕자!
이제 너는 내게서 무연(無緣)한 남이 아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낯익은 식구다. 지금까지 너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레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책장을 훌훌 넘기기만 하여도 네 세계를 넘어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간에 씌어진 사연까지도, 여백에 스며 있는 목소리까지도 죄다 읽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몇해 전,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1967년 5월, 너와 마주친 것은 하나의 해후(邂逅)다. 너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수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너를 통해서 본래적인 나와 마주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가난한 서가(書架)에는 너의 동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애들은 메마른 나의 가지에 푸른 수액(樹液)을 돌게 한다. 솔바람 소리처럼 무심한 세계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재임을 투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더러는 그저 괜히 창문을 열 때가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인다. 방울처럼 울려 올 네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그리고 혼자서 웃음을 머금는다. 이런 나를 곁에서 이상히 여긴다면, 네가 가르쳐 준 대로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난 언제든지 웃음이 나네……
2
어린 왕자!
너의 아저씨(쌩 떽쥐뻬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더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동무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동무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동무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틀에는 제라니움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일억 원짜리 집을 보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 하고 감탄한다.
지금 우리 둘레에는 숫자놀음이 한창이다. (-) 잘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숫자의 단위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스리는 사람들은 이 숫자에 최대한의 관심을 쏟고 있다. 숫자가 늘어나면 으시대고, 줄어들면 마구 화를 낸다. 말하자면 ‘자기 목숨의 심지가 얼마쯤 남았는지는 무관심이면서,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다.’
(-)
어린 왕자!
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버섯’이라고 했던가.
─그는 꽃향기를 맡아 본 일도 없고, 별을 바라 본 일도 없고, 누구를 사랑해 본 일도 없어. 더하기밖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그러면서도 온 종일, 나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하고 뇌이고만 있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버섯이야!
그래, 네가 여우한테서 얻어들은 비밀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한 모서리에 불과해. 보다 크고 넓은 것은 마음으로 느껴야지. 그런데 ‘어른들’은 어디 그래. 눈앞에 나타나야만 보인다고 하거든. 정말 눈뜬 장님들이지. (-)
3
어린 왕자!
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꽃인 줄 알았다가, 그 꽃과 같은 많은 장미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풀밭에 엎드려 울었었지? 그때에 여우가 나타나 ‘길들인다’는 말을 가르쳐 주었어. 그건 너무 잊혀진 일이라고 하면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길들이기 전에는 서로가 아직은 몇천 몇만의 흔해빠진 비슷한 존재에 불과하여 아쉽거나 그렇지도 않지만, 일단 길을 들이게 되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해가 돋은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난 어느 발소리하고도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다.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이 되어 나를 굴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여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밀밭이 어린 왕자의 머리가 금빛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황금빛이 감도는 밀을 보면 그리워지고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질 거라고 했다.
그토록 절절한 ‘관계’가 오늘의 인간 촌락에서는 퇴색해 버렸어. 서로를 이해와 타산으로 이용하려 들거든. 정말 각박한 세상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없어지고 만 거야. ‘나’는 나고 ‘너’는 너로 끊어지고 말았어. 이와 같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나’와 ‘너’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거야. 인간관계가 회복되려면 ‘나’ ‘너’ 사이에 ‘와’가 개재되어야 해. 그래야만 ‘우리’가 될 수 있어. 다시 네 동무인 여우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다 만들어 놓은 물건을 가게에서 사면 되니까. 하지만 친구를 팔아 주는 장사꾼이란 없으므로 사람들은 친구가 없게 됐단다. 친구를 갖고 싶거든 날 길들여!
(-)
5
어린 왕자!
이제는 너를 길들인 후 내 둘레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어린 왕자』라는 책을 처음으로 내게 소개해 준 벗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벗이다. 너를 대할 때마다 거듭 거듭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벗은 나로 하여금 하나의 눈을 얻게 해 주었으니까.
지금까지 읽은 책도 적지 않지만, 너에게서처럼 커다란 감동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책은 일찌기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나한테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이라고 한대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더러 지묵(紙墨)으로 된 한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선뜻 너를 고르겠다. 내게는 화엄경(華嚴經)이나 임제록(臨濟錄)과 같이 즐겨 읽는 성인의 말씀도 적지 않지만.
(-) 너를 읽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내 신뢰감과 친화력을 느끼게 된다. 설사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내 벗이 될 수 있어. (-)
(-)그러니까 너는 사람의 폭을 재는 한 개의 자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고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 뒹굴면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 다닐 수 있는 거야.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 해. 그건 영원한 모음(母音)이야.
아, 이토록 네가 나를 흔들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영혼이 너무도 아름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렇듯이.
네 소중한 장미와 고삐가 없는 양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너는 항시 나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