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았다.
돈도 한 푼 없었고 며칠 버틸 정도의 옷가지가 전부였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중에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 앞에서 모범적인 아이비리그 걸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드디어 어마어마한 자유가 밀려왔다.
그렇게 거의 1년간 피닉스에서 살았다. 나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제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오랫동안 나인 척 했던 그 착한 소녀는 절대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을 했다. 이제 전 과목 만점을 받는 학생인 척할 필요도, 성적에 신경 쓸 필요도, 좋은 딸인 척할 필요도, 좋은 무엇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온전한 백지 상태가 될 수 있었다. 나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것 사이에 점점 깊게 벌어지고 있던 그 틈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 물론 질문들이 있었고 분노도 있었고 상처도 표현했지만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내 몸무게가 왜 그렇게 계속 늘어가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보다는 덜 실망스러운 딸이 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내가 돌아가면 기뻐해주고 사랑해주는 집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전히 엉망인 상태였다. 내 방에 처박혀서 컴퓨터 앞에 앉아 모뎀으로 연결된 전화선으로 하루 종일 인터넷을 했고 (-)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나를 잊는 편이, 내 삶을 추스르려 노력하거나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쉬웠다.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고 다시는 옳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의 그 자포자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나 노력 없이 사는 것이 좋았다.
나는 애초에 우정이라는 용어를 굉장히 막연하게 사용하는데, 나에게 우정이란 한때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고 연약한 끈이고 보통은 고통의 원천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에게서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얻는 즉시 나를 떠나버렸다. 나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이런 관계들을 다 참았다. 인간적인 교류를 희미하게 닮기만 해도 내겐 충분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한 척해야만 했다.
음식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 혼자, 내 아파트에서 음식으로 나를 달랬다. 음식은 나를 판단하지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먹을 때는 오로지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45킬로그램이 늘고, 45킬로그램이 더 늘고, 또 한 번 45킬로그램이 늘었다.
자기 관리란 어떤 면에서 부정이나 거부의 몸짓이기도 하다. 원하지만 가질 수 없다. 어떤 음식들을 거부하기로 한다. 휴식을 거부하고 운동하기로 한다. 우리 몸을 늘 감시하고 초조해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거부한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자신을 억제하고 그 목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억제한다.
내 육체는 심각할 정도로 방만하고 통제를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갈망하는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거부하기도 한다. 공공장소에서 내 공간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허리를 수그리려 하면서, 사실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거구인 이 몸을 어떻게든 보이지 않게 하려 한다. 공유하는 팔걸이에 대한 권리를 부정한다. 감히 어떻게 그런 폐를 끼친단 말인가? 나 같은 몸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장소에 가기를 거부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대부분의 공간, 대중교통, 내가 눈에 띄거나 내가 어쩌면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거슬릴 수 있는 장소는 거부한다. 밝은 색상의 옷을 거부하고, 청바지와 짙은 색 셔츠를 유니폼처럼 입으며 옷장에 있는 훨씬 다양한 옷들을 거부한다. 내가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여성스러운 표현이 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성스러운 몸에 대한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내겐 그런 표현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혹은 내가 누군가를 부드럽게 만지는 식의 온화한 애정 표현을 거부한다. 마치 나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쾌락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듯이. 학대는 사실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내게 매력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물론 내게도 매력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것을 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행동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금기시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깨고 뛰쳐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둘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호텔 방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즐겁게 밀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엄지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했다. 꼭 발라주고 말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말했지만 나는 애매한 이유들을 대가며 거부하고 또 거부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불복했고 내 손을 친구의 손에 맡겼고 친구는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내 손톱을 정성스럽게 칠해주었다. 호호 불었고, 마르게 놔두라고 했고, 두 번째 코팅을 했다. 그날 밤은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나라 반대쪽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서 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언제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라는 단순한 기쁨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내 손톱을 바라보는 건 매우 기쁜 일이었는데 내 손톱은 적당히 길었고, 모양도 가지런했고,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지만 아직 물어뜯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자의식에 사로잡혔고 엄지를 손바닥에 바짝 붙였다. 마치 이 손가락을 숨겨야 한다는 듯이, 마치 나에게는 예쁠 자격이 없다는 듯이, 나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을 느끼면 안 된다는 듯이,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여자란 아담한 몸을 가져야 하고 공간을 적게 차지해야 한다는―을 명백히 어기고 있기 때문에 나를 여성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친구는 비행기에서 먹으라고 감자칩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했었지만 나는 거부했다. 내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그런 음식 먹는 거 아니야.”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우리 우정의 깊이 덕분에 그런 고백까지 할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내가 이런 끔찍한 서사에 나를 맞추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고, 너무나 많은 것을 부정하고 살면서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듯 수많은 것을 부정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의식한다. 이 세상 안에서 움직이는 내 몸에 관해 격렬하게, 끊임없이 몰두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볼지 안다. 내가 일반 여성의 외모 기준에 관한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차지하는지에 관해 매우 예민하게 의식한다. 여성으로서, 뚱뚱한 여성으로서 나는 원래 자리를 많이 차지하면 안 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서의 나는 내가 자리를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자리를 차지하되 너무 많이 차지해서는 안 되며, 그것도 잘못된 방식으로 차지해선 안 된다는 모순적인 공간에서 살고 있는데, 내 몸을 고려할 때 나는 모든 방식으로 잘못될 수 있다. 사람들 근처에 있을 때 되도록 몸을 움츠려서 내 몸이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이런 행동을 굉장히 극단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다섯 시간의 비행 동안 몸을 창문에 바짝 붙이고 내 팔은 안전벨트 위에 얌전히 걸쳐놓아 마치 과도한 존재감이 있는 곳에 부재감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는 것만 같다. 인도에서는 가장자리로 걷는다. 건물 안에서는 벽을 거의 끌어안을 정도로 벽에 붙어 있다. 누가 내 뒤에서 걸어오는 것 같으면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걸으며 마치 나에겐 이 세상에 대한 권리가 그 어떤 사람보다 적은 것처럼 행동한다.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예민하지만 늘 이런 식이 되어야 할 때는 화가 나고, 내 주변 사람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에 무심할 때면 순수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다. 그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싫다. 그들은 원하는 속도대로 걸을 수 있다. 팔걸이에 팔을 아무렇게나 걸칠 수 있다. 어디에 있든 꾸물거릴 수 있고 팔다리를 펼 수 있고 어깨로 밀칠 수 있다. 매 순간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아도 되고 잠시 멈춰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민다. 그들은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해 느긋하게 생각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악의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서 있게 되고 어떻게 보이게 될지 질문해봐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아파트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일걸. 나는 이 교실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군. 나는 이 대학교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야. 나는 이 극장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지. 나는 이 비행기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야. 나는 이 공항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야. 나는 이 고속도로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일 거야.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일지 몰라. 나는 이 행사장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겠지. 나는 이 모임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네. 나는 이 레스토랑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 맞아. 나는 이 쇼핑몰에서 가장 뚱뚱해. 나는 이 패널 중에서 가장 뚱뚱해. 나는 이 카지노 안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야.
나는 가장 뚱뚱한 사람이야.
이것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날 파괴하는 후렴구이고 나는 이 반복적인 문장에서 도망갈 수가 없다.
가끔은 어떤 사람들, 내 생각에는 날 아껴주려는 사람들이 나에게 뚱뚱하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말을 한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들은 ‘뚱뚱하다’는 것을 무언가 부끄러운 것으로, 무언가 모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나 같은 경우는 ‘뚱뚱함’을 내 몸의 실체로서 이해한다. 내가 그 단어를 쓸 때 나를 욕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착한 척하는 사람들은 부끄럽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 뚱뚱한 거 아니에요.” 혹은 이런 게으른 칭찬들을 한다. “얼굴이 참 예쁘시잖아요.” “정말 훌륭한 분이시잖아요.” 내가 뚱뚱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보기에 가치 있는 자질들을 보유할 수는 없는가 보다.
마른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들에게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들의 의견을 내가 청했건 아니건 말이다.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뚱뚱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나 내 몸과 내 몸의 현실을 부정하려 하는 것 또한 매우 모욕적이다. 어떤 식으로선 내가 나의 육체적인 것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욕적이다. 그리고 내가 뚱뚱하니까 나를 수치스러워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 또한 모욕적이다. (-)
은밀하고 약간은 지저분한 관계가 아닌 관계에는 소질이 없다. 데이트를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 모른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갖는 관심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키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에게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른다. (-)
역시나 20대에 만났던 과거의 연인들 중 한 명 이야기를 하자면,(-) 가끔은 육체적인 학대보다 정신적인 학대가 더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실 맞는 건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사실이 자랑스럽고 당당해서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뿐이다. 이 사람은 나를 무너뜨리고 싶어 했는데 그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던 건 내가 여기서 더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을까? 그들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한테서 내가 상처를 줄 만한 사람이라는 냄새를 맡기도 한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 극적이거나 폭력적인 사건은 없었다. 그저 나는 지속적인 비난이라는 총알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못마땅했다. 나는 아직 20대였고 안타까울 정도로 자기 확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사귀는 사이는 다 이런 줄만 알았다. 또한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기에 이 정도가 나에게 허락된 관계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의 모든 점이 잘못되었다며 제발 고치려고 노력이라도 하라고 다그치곤 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만 난 그 사람에게 부족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인이 아닌 척하기로 했다. 나는 충분히 예쁘지 않다. 너무 큰 소리로 말한다. 숨소리가 너무 크다. 잘 때도 너무 시끄럽다. 자면서 몸이 닿으면 뜨겁다. 자는 동안 너무 뒤척인다. 그래선 나는 잠을 자지 않게 되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거의 매달리다시피하면서 나의 잠이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루 종일 피곤했다.
나는 설거지를 똑바로 못 한다고 했다. 설거지도 잘하는 법이 있고 못하는 법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안다. 바닥에 물 흘리지 마. 식기 건조대를 미리 말려놓으라고 했잖아. 접시는 식기 건조대에 차곡차곡 크기별로 정리해.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설거지를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고 나서 씩 웃는다. 여긴 빌어먹을 나의 집 바닥이고 모두 내 그릇들이고 바닥에 물 좀 떨어진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
음식을 이상하게 먹는다. 너무 빨리 먹는다. 씹는 소리를 낸다. 얼음을 너무 자주 깨물어 먹는다. 물건을 제자리에 놓지 않는다. 현관 앞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지 못한다. 걸을 때 팔을 너무 흔든다. 이런 말들을 수시로 들었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시로 들었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 목록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같이 걷다가 그 말을 기억했다. 맞아, 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여야지. 팔 흔들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의를 주며 산 적도 있다. 팔 흔들지 말기. 그러다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서 잊어버리고 실수로 팔을 몇 센티 흔들게 되면 나는 땅이 꺼지게 내쉬는 그의 한숨 소리를 또다시 들어야 하고 그때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두세 배 더 노력한다. 팔 흔들지 말아야지, 록산. 요즘에도 걸으면서 팔을 흔들지 않으려는 나를 발견할 때면 분노가 치솟는다. 미칠 듯이 화가 치솟아서 양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걷고 싶다. 여긴 내 팔이란 말이다. 내 걸음걸이란 말이다.
한번은 백화점에 가서 메이크업을 받았다.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었다. 앞으로도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 화장품을 잔뜩 사왔다. 나는 그 사람을 놀라게 해주고 싶어 그 사람 집에 갔고 그 사람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가 조금 더 참고 봐줄 만한, 자기 눈에 더 보기 좋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이것으론 부족하니 다른 것들을 더 해보라 했다. 현관 앞에 서서 내 몸이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 길에 너무 신났었고 예뻐져서 행복했었는데 이것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나는 그 비싼 화장품들과 나의 예쁜 얼굴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서 화장이 전부 지워질 때까지 울었다. 그때 산 화장품은 아직도 내 옷장의 노란색 쇼핑백에 담겨 있다. 가끔 꺼내서 물끄러미 바라보긴 하지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
나는 무엇을 하건 결코 충분하지 않았어도 그래도 절실하게 노력했었다. 나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써왔다.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체 왜 내 곁에 있으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던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들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그 모든 끔찍한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들 곁에 남았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을 참아줄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 곁에 남았다. 바람을 피우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그들 곁에 남았다. 그들이 나를 더 이상 원치 않을 때까지 그들 곁에 남았다. 관계가 끝난 후에는 결국 내가 먼저 떠났을 거라 생각하곤 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좀 더 좋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가, 안 그런가?
하지만 나는 운 좋은 여자다. 나의 슬픈 이야기 대부분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참지 않는 것들이 생겼다. 혼자라는 건 짜증나는 일이지만 나에게 끔찍한 기분을 안겨주는 사람과 같이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사실을 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의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깨달을수록, 나의 가치를 깨달을수록 그 짐은 가벼워질 것이다.